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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상처는 오래 간다 (빅토리 에리세 감독,El sur/The South,1983)

The Cut Runs Deep

 스페인의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영화를 극장에서 만난다. 최근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개봉되었고, 오랫동안 시네필들이 시네마떼크에서나 겨우 만나볼 수 있었던 데뷔작 <벌집의 정령>과 그의 대표작 <남쪽>이 ‘뒤늦게’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남쪽>(El sur/The South)은 1983년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절반 정도 찍고는 촬영이 중단되었다. 감독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고, 어떤 이야기를 찍지 못했을까. 그리고, 과연 완성된 영화는 감독이 처음 하고자 한 이야기를 오롯이 전해줄 수 있을까. 좋은 영화, 좋은 이야기의 조건을 전해주는 듯하다.

 영화는 소녀 에스트레야가 회상하는 1950년과 1957년의 스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15살 에스트레야는 아버지를 찾는 엄마의 소리에 눈을 뜬다. 아버지 아구스틴은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화면은 8살의 에스트레야가 영성체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가족은 스페인 북부의 외딴 마을에 살고 있다. ‘도시와 시골의 경계’에 위치한 무인지대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그 집의 지붕에는 ‘갈매기’ 모양의 풍향계가 있다. 에스트레야는 아버지를 관찰한다. 아구스틴은 의사이면서 수맥탐지사이기도 하다. 추를 한 손에 들고 대지를 밟으며 우물을 팔 곳을 찾는 아버지의 모습이 신비롭고, 전지전능하게 느껴진다. 딸은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왜 남부 출신인 아버지는 ‘남쪽’으로 가지 않을까, 왜 ‘남쪽’에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늘 궁금하다. 영성체에 맞춰 무척 오랜만에 아들을 만나러 온 할머니를 통해 사연을 듣는다. 오래 전 내전이 있었고 할아버지와 이념이 달라서 크게 싸웠고, 어느 날 남쪽을 떠났다는 것이다. 에스트레야는 아버지가 왜 남쪽을 떠난 후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아버지의 메모에 등장한 ‘이레느 리오스’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다 극장 포스터에서 그 이름을 만난다. 소녀는 온갖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자살한다. 소녀는 할머니가 살고 있는 ‘남쪽’으로 가서 아버지의 숨겨진 비밀을 알고 싶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스페인 내전’의 함의를 잘 모르는 ‘2026년 한국관객’은 이 영화가 소녀의 성장담이자 아버지의 첫사랑을 찾는 로맨스 영화로 인식하기 쉽다. 그런데 이 영화는 스페인 관객에게는 꽤나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리고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렸던 당사자의 고통을 되살리는 작품이다. 1930년대, 스페인은 내전이 일어났다.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내전은 큰 생채기를 남겼고, 프랑코 독재정권은 오랫동안 희생자의 침묵을 강요한다. 아구스틴은 내전에서 아버지와 맞섰고, 아마도 좌절된 꿈으로 영원히 고향을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 상상도 못했을 고통을 겪었을지 모른다. 영화에서는 엄마도 보복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떤 보복인지 소녀는 감을 잡을 수 없다.

 이 영화는 행복한 가족, 평화로운 공동체라는 아름다움 뒤에 가려진 어두운 역사와 대지에 깔린 비극을 애써 감추는 드라마이다. 아버지는 어두운 극장에서 옛 연인이 출연한 영화를 보고, 카페에 앉아 편지를 쓴다. 딸은 아버지의 사연, 스페인의 아픔을 모른다. (모두가 침묵을 강요받은 역사의 빈자리!) 관객들은 ‘남쪽’은 고향이며, 고국이며, 행복이다. 어쩌면 첫사랑이 존재하는 환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빅토리 에리세 감독은 카라바조의 화풍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인물이 마주하는 모습을 자주 연출한다. 어둠이 익숙해질 즈음에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손을 내밀고, 사건이 이어진다. ‘수맥’을 찾는 기술을 가진 아버지는 ‘추’의 진동을 통해 딸에게 무거운 진실을 전해주는 듯하다. 유려하면서도, 숨 막히는 아름다움은 에스트레야와 아버지가 춤을 추는 장면(‘En Er Mundo’ 노래가 나온다)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 영화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의 사라진 시간, 숨겨진 역사를 조용히 전해준다.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 세력)와 국민파(군부와 보수세력)의 대결이었다. 1939년 프랑코가 승리하면서 스페인은 장기 독재체제로 들어섰다. 1975년 프랑코가 죽기까지 스페인에서는 강력한 검열과 사상통제가 이어졌고, 공화파 지지자들은 처형·투옥·망명으로 내몰렸다. 패배한 쪽의 기억은 공적 공간에서 지워졌다. 마치 아버지 아구스틴처럼.

 <남쪽>은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벌집의 영혼> 이후 10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당시 감독과 결혼했던 작가 아델라이다 가르시아 모랄레스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감독은 소설처럼, 시나리오대로 에스트레야가 남부로 여행을 떠나 아버지의 과거를 만나는 것을 찍고 싶어 했다. 아버지의 절망의 원인을 찾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제작자(엘리아스 퀘레제타)는 촬영을 중단시킨다. 이후 제작자, 감독, 촬영감독들은 그 원인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남겼다. 감독은 ‘미완성 드라마’로 불만스러워했다. 관객들은 에스트레야가 꺼내보던 아버지의 옛날엽서,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세비야 지명을 보면서 많은 상상을 할 것이다. ‘에스트레야’는 손솔레스 아랑구렌(8살)과 이시아르 보야인(15살), 두 배우가 연기한다. 아버지를 대단한 사람으로 존중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를 의심하고 멀어져가는 캐릭터를 훌륭하게 연기한다. 

 아버지의 침묵, 딸의 의심. 미완의 촬영이지만 <남쪽>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더 깊은 사유의 시간을 전해준다. (박재환.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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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원제: El sur / The South) ▶감독: 빅토르 에리세 ▶출연: 오메론 안토누티, 손솔레스 아랑구렌, 이시아르 보야인, 오로르 클레망 ▶배급: M&M 인터내셔널 ▶개봉: 2026년 2월 18일 ▶상영시간: 94분 ▶상영등급: 12세이상관람가
박재환 영화리뷰 kinocine.com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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