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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의 응답하라 1958 (お早よう, Good Morning)

설 극장가에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 1903~1963) 감독의 1958년 작품 <안녕하세요>가 걸렸다. ‘다다미 쇼트’로 잘 알려진 그는 낮고 고정된 카메라, 절제된 편집, 반복되는 일상 속 대화를 통해 삶을 관조하게 만드는 연출로 평가받는다. 거대한 역사와 격정을 스크린에 펼쳐 보인 구로사와 아키라와 달리, 오즈는 서민의 생활을 미니멀한 시선으로 포착해왔다. <안녕하세요>는 그런 그의 미학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배경은 1958년 도쿄 교외 신흥 주택가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마주치면 자연스레 건네는 인사, 소소한 오해와 소문이 오가는 골목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들은 등굣길에 장난을 치고, 하교 후에는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모여 스모 경기를 본다. 영어 단어를 흉내 내며 세계를 상상하는 모습에는 당시 일본 사회의 변화가 배어 있다. 급속한 근대화와 소비사회로의 진입, 가전제품을 둘러싼 욕망이 일상의 풍경과 겹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미노루와 이사무 형제가 있다. 형제는 집에 ‘테레비’를 들이고 싶어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하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꾸지람에 아이는 어른들이 의례하는 인사말이야말로 공허하지 않느냐고 대든다.    영화를 보고나면 영화제목 “안녕하세요”가 얼마나 상징적인지 알게 된다. 이웃사촌과는 자연스레, 출근하는 직장인은 당연하게,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아 호의와 선의와 친근감의 표시로 인사말을 건넨다. 그런데, 이런 형식적인 인사말이 쓸데없는 말일까. 그런 위선의 에티켓을 멈추고 침묵을 선택한다면? 일본인과 일본사회의 특징을 말할 때 ‘분장한 친절’과 ‘과도한 예의’를 언급하기도 한다. 1958년의 일본사회는 여전히 이웃의 정과 공동의 규범, 소속감이 뜨거울 때이다.  영화는 1950년대 후반 일본의 사회변화 분위기를 잘 그리고 있다. 인구과밀의 도쿄 도심을 벗어나 교외에 대규모로 조성되는 공동주택단지(Danchi)에 모이게 되고, ‘흑백TV + 세탁기 +  냉...

[넘버원] 리미티트 밥상 (김태용 감독, Number One, 2026)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지로 대학을 가거나, 직장을 구하면서 그 동안 살아온 집, 부모와 살던 집을 떠나게 된다. 마치 ‘토이스토리’의 앤디처럼.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잊고 있었던 것은 그동안 우리는 엄마가 해준 밥, 이른바 집밥을 몇 끼나 먹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설이나 추석, 혹은 이런저런 일로 고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게 된다면 그런 계산을 해보게 될지 모르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엄마가 해 준 밥을 먹게 될까?” 이 정도 이야기하면 해마다 흰머리가 늘어나는, 살아계실 때 부모님께 효도 하거라, 전화라도 한 통 드려라는 공익방송 같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설 연휴에 맞춰 개봉된 김태용 감독의 영화 <넘버원>이 그런 작품이다. 그렇다. 엄마의 집밥을 먹을 기회가 ‘한 번’ 남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따듯한 햇볕이 거실로 내리 쬐는 부산의 한 아파트. 고등학생 하민(최우식)이 혼자 밥을 먹고 있다가 눈을 들어 벽을 쳐다보니 숫자가 보인다. ‘365’. 저게 뭘까. 그런데 그날 이후 그의 눈앞에 계속 숫자가 어른거린다. 364, 363.....200,.. 150.. 식으로.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이내 하나의 법칙을 발견한다. 그가 엄마(장혜진)가 해준 밥, 집밥을 먹을 때마다 그런 숫자가 나타난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밥, 소풍 갈 때 사준 도시락, 학교 갔다 와서 먹는 저녁밥. 밥을 먹을 때마다 그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것이다. 하민은 결국, 저 숫자가 ‘0’이 되면 엄마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엄마가 차려주는 밥은 더 이상 먹지 않는다. 도시락도 그냥 버린다. 그리고 서울로 대학을 가고,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며 엄마의 밥을 영원히 먹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한다.  과연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어떤 신비로운 법칙을 거스르거나, 그 법칙을 준수한다면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하민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엄마와 인연을 끊는 셈이 되어버린다. 엄마는 자식에게...

[왕과 사는 남자] 엄흥도는 동강에서 다슬기만 잡은 것이 아니다 (장항준 감독, The King's Warden, 2026)

장항준 감독은 작가 김은희의 남편이자 입담 좋은 한량, 코믹 담당 TV 패널로 대중에게 더 익숙하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극본가와 감독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인장 같은 대표작을 단번에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 감독은 코미디만 쓴 게 아니다. 데뷔 시나리오인 <박봉곤 가출 사건>부터 반짝이는 재능을 보였고, 전작 <오픈 더 도어>에서는 뉴저지 한인 가족의 비극을 다룬 정통 스릴러를 선보였다. 어쩌면 우리는 그의 연출력을 ‘보이는 희극적 요소’로만 판단해 왔는지 모른다. 신작 <왕과 사는 남자>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 인물을 다루는 방식,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장항준의 깊은 심원을 발견하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의 영원한 ‘아이템’인 단종과 수양대군의 비극을 다룬다. 1457년,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이홍위(단종)는 강원도 영월의 산골 청령포로 유배된다. 수양과 한명회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상황, 열일곱 살 어린 폐왕의 곁에는 청령포의 민초들과 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어 하는 촌장 엄흥도가 있었다.  가장 창의적인 대목은 초반부 ‘유배지 쟁탈전’이다. 이웃 노루골 촌장(안재홍)이 고관대작 피유배자를 잘 봉양해 마을이 안분자족하게 되자, 광천골 사람들도 ‘한양 귀한 몸’ 덕을 좀 보나 꿈을 꾸게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유배 온 이가 이 사람이라니. 영화는 여기서부터 주민과 폐왕의 정서적 교류를 그리기 시작한다. 역사적으로는 어림없는 상상이겠지만 감독은 이 지점에서 관객이 폐왕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비극적 역사의 시곗바늘 속에서 이 ‘우연한 만남’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지켜보게 하는 흡입력이 상당하다.  장항준의 카메라는 역사를 박제된 기록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단종의 죽음을 감정적으로 소비하기보다, 유배지 속 공기와 민초의 호흡으로 비극을 재구성한다. 사료와 상상력을 적절히 섞어 최대치의 비극...

[폭풍의 언덕] 언덕 위의 연인 (에멜랄드 페넬 감독,Wuthering Heights,2026)

 영국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쓴 단 한 편의 소설 <폭풍의 언덕>(1847)이 다시 영화로 만들어졌다. 아마 어려서 [세계명작동화]판 소설을 읽었거나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흑백영화를 TV를 통해 본 사람이라면 이번 작품을 아주 기대했을 것이다. 독자와 시청자는 세월이 지나며 찬바람 휘몰아치는 그 황량한 언덕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집착,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옛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다. 하지만 성폭행당하고 자살한 절친의 복수를 위해 7년의 세월을 담금질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프라미싱 영 우먼]의 에메랄드 페넬 감독의 <폭풍의 언덕>은 적어도 [세계명작동화]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18세기 영국의 읍내에서 행해지는 공개 교수형 장면을 보여준다. 황량하고, 거칠고, 무례하고, 건조하고, 으스스한 마을에서는 그나마 사람들에게 즐거운 볼거리이다. 사형수의 목이 걸리는 순간 구경꾼들은 기이한 모습에 열광한다. 캐서린은 그런 요크셔의 바람 부는 황무지 ‘폭풍의 언덕’에 위치한 언쇼 집안의 딸이다. 술주정꾼 아버지가 어느 날 거리에서 꼬질꼬질한 아이를 하나 구해 집으로 데려온다. ‘히스클리프’는 그렇게 캐서린의 애완동물이자, 술주정꾼의 학대의 대상이 되어 자란다. 하지만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 차가운 워더링 하이츠의 소울메이트가 된다. 하지만, 캐서린이 에드거와 결혼하면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끔찍한 호러 드라마로 변한다. ● 폭풍의 언덕에는 지금도 차가운 바람이 분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은 ‘두’ 집안이 ‘세’ 세대에 걸쳐 펼치는 ‘한’ 커플의 이뤄지지 않은 격렬한 사랑과 집요한 복수, 그리고 문학적 화해를 담고 있다. 136분의 영화는 원작의 등장인물과 사건을 대폭 압축한다. 폭풍의 언덕에 위치한 언쇼 집안과 ‘티티새 지나가는 저택’의 린턴 집안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린턴 집의 세입자가 하녀 넬리에게서 듣게 되는 두 집안의 오래된 이야기이다. 길에서 데려온 아이는 ‘어두운 피부...

[휴민트] 총부리가 향한 곳 (류승완 감독, HUMINT, 2026)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 개봉에 맞춰 최근 인터뷰전문작가 지승호와 함께 <재미의 조건>이라는 책을 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충격적인 데뷔를 한 류승완 감독은 이후 계속하여 충격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그 사이 류 감독은 충무로 주류감독을 지나 한국영화의 흥행기대주로 자리 잡았다. 책 제목에서 감히 ‘재미’를 앞세운 것처럼 그의 영화는 대중적 시선의 그라운드와 한국적 상황의 바운드리 안에서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신작 <휴민트>는 어떤가. 감독은 <베를린> 찍고 난 뒤 이 이 작품을 구상했단다. 그동안 남과 북의 상황은 그다지 바뀐 것 같지 않지만 국정원을 바라보는 시선, 국정원을 대하는 대중의 시선은 많이 변했다.  이 영화는 류승완 감독이 상상하는 한반도의 상황을 극화한다. 북한이 마약을 판다면, 북한의 국경 너머 동토의 왕국에서 은밀한 비즈니스를 한다면? 한국의 국정원이 여기에 비밀스러운 공작을 펼친다면? <휴민트>는 그런 상황에서 펼쳐지는 남북대결이다.  ● 가열찬 외화벌이, 가멸찬 총격전  동남아의 한 국가. 국정원 블랙요원 조과장(조인성)은 성매매 업소에서 한 여성과 접촉하고 있다. 북한여자 김수림은 외화벌이로 시작하여 인신매매 당해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조과장은 그 과정에서 ‘북한의 역할’을 파헤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하지만 ‘국정원’은 ‘북한의 인신매매’보다는 ‘마약사업의 전모’를 파헤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결국, 보호받지 못한 ‘국정원 휴민트’ 김수림이 죽고, 조과장은 절망하지만, 꺾이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그곳에서 거대한 악의 실체를 대하게 된다. 이야기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첩보전이다. 남에서는 국정원 요원이 국제인신매매의 증거를 잡기 위해 진을 치고 있고, 북에서는 국경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국가보위성 박건 조장(박정민)이 급파된다. 남과 북의 은밀하고 위대한 작전은 블...

[드림 홈] “전망 좋은 아파트를 가져야 해!” (Dream Home/維多利亞壹號,2010)

 설 연휴를 앞두고 한국의 초기대 작품들과 아카데미를 노린 할리우드 작품이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꽤 특이한 홍콩 영화가 한 편 슬그머니 극장에서 개봉된다. 홍콩 팽호상(彭浩翔) 감독의 <드림 홈>이다. 2010년 홍콩에서 개봉되었던 작품인데 꽤 늦게 한국에서 소개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꽤 살펴볼 구석이 있는 작품이다. 비록 수위가 높은 폭력과 선정적 화면이 있지만, 그 밑바닥엔 그보다 더 뜨거운 지옥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내집 마련의 꿈’이다.   홍콩 원제는 ‘維多利亞壹號’이다. ‘빅토리아 1호’이다. 아마, 홍콩을 가본 사람이라면, 가보지 않았더라도 고층 빌딩이 즐비한 홍콩의 시그니처 야경 사진을 보았을 것이다. 바로 그 빅토리아 하버에 위치한 건물을 생각하면 된다. 홍콩의 주거환경, 부동산 상황은 알 것이다. 끔찍할 정도라는 것을. 그럼, 홍콩의 민초들은 내 집 마련을 어떻게 할까. 2010년 작품으로 살펴본다.   영화는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아시아금융의 중심이었던 홍콩의 사정은 어땠을까. 영화의 시작은 한 고층건물(아파트)의 경비실을 습격하는 복면여성을 보여준다. 은밀하게 경비실에 잠입한 그 여자는 잔혹하게 경비원을 살해한다. 그리고 화면은 금융회사 전화상담원을 비춘다. 그는 하루 종일 전화기를 들고 금융상품을 판매하려고 매달린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낡은 연립주택(唐樓)에서 자랐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집들이 하나둘 철거되고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보아왔다. 홍콩 서민으로서는 새집으로의 이사는 꿈도 꾸지 못한다. 홍콩 부동산은 끊임없이 폭등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집값, 부동산업자들의 강제 퇴거(철거) 등이 그들을 더욱 빈곤의 나락으로 몰고 간다.    상담원 정려상(鄭麗嫦,Josie Ho)은 빅토리아 하버가 보이는 꿈의 아파트 ‘빅토리아1호’를 사려고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의료보험 혜택도 못 받게 되자 절망...

[멜라니아] 지구최강, 우주최고의 셀럽 (브랫 래트너 감독, MELANIA,2026)

The Ultimate Icon of Global Glamour   지난 주말 미국에서는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한 편 개봉되었다. 마블 작품도 아닌데 홍보비는 그에 못지않다. 개봉 전날 워싱턴DC 트럼프-케네디센터에서 열린 공식시사회에는 미국 47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팸 본디, 피트 헤그세스, 크리스티 노엠, RFK 주니어, 카쉬 파텔 등 ‘ 슈퍼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New 람보’라도 만들어졌단 말인가? 놀랍게도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를 정면에서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제목부터 거룩한 ‘멜라니아!   이 영화는 시사회에 이어 미국 1500여 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미국 매체 기자/평론가들은 기사에서 아주 고상한 예술영화를 본 듯한 상투적인 문구를 빠뜨리지 않았다. “극장에는 나 포함하여 두 사람, 세 사람이 앉아서 지루함을 끝까지 이겨내며 영화를 보았다!”는 식으로.   과연 어떤 영화일까. 우선, 영화의 정체부터. 이 영화는 멜라니아의 화려한 20여 일을 담고 있다. 트럼프가 치열했던 대선 레이스 끝에 당선을 확정한 날부터, 취임식까지,(그리고 다음날 아침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향후 펼쳐질 트럼프의 또 한 번 ‘위대한 미국 만들기’를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말이다. 트럼프의 부유한 친구인 제프 베이조스의 아마존은 무려 4천만 달러에 이 작품의 배급권을 획득한다. 그리고 마케팅 비용은 3,500만 달러를 더 쏟아 부으며 멜라니아 찬가를 만방에 퍼뜨릴 준비를 마친다. 디즈니보다 약 2,600만 달러 더 많은 금액이었다고들 한다.    영화가 개봉된 날 미국 TV 방송사의 입담 좋은 코미디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영화를 헐뜯기(!) 시작한다. 지미 키멜은 “영화 '터미네이터' 이후로 유럽 출신 사이보그에 대한 영화에 이렇게 큰 기대감이 쏠린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지미, 팰런은 “이번 주말 극장에는 멜라니아 다큐멘터리도 있고, 레이첼 맥아담스의 'Se...

[시라트] 절망에 빠진 사람들, 그 다리를 건너지 마소서 (올리베르 라셰 감독, Sirāt,2025)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며 영화팬의 주목을 받았던 올리베르 라셰(Oliver Laxe) 감독의 영화 <시라트>가  한국에서 정식으로 개봉되었다. 길/통로를 뜻하는 ‘시라트’(sirāt)는 이 영화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더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슬람 경전에서는 시라트는 지옥 위에 놓인 가느다란 다리로,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로워 의로운 자만이 다리를 건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설명해 준다. 어떤 운명의 아랍 사람들이 그 아슬아슬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일까. 영혼을 흔들고 심장을 끝없이 쿵쾅거리게 하는 음악과 함께 관객들은 그 고행의 길을 함께 한다.  모로코 남부 사막지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시처럼 모여든다. 수많은 캠핑카와 트럭, 밴들이 보이고 유랑자들이 강한 비트의 테크노/신디사이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이른바 ‘레이브 파티’이다. 사람들은 약에 취해, 술에 취해, 음악에 취해 흐느적댄다. 그 사람들 사이를 루이스(세르지 로페즈)와 어린 아들 에스테판이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이들 부자는 오래 전 소식이 끊긴, 실종된 딸 마르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이들을 불쌍히 여긴 사람이 이곳 파티가 끝나면 모리타니아 쪽에서 또 다른 레이브 파티가 열리니 그 곳으로 가보라고 일러준다. 그때 트럭을 탄 군인들이 몰려온다. 축제는 끝났다고. 어디선가, 무슨 일로 전쟁이 일어났고 EU시민권자는 안전지대로 신속히 이동해야한단다. 하지만 딸을 찾으려는 생각뿐인 루이스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약속된 땅을 향해 길을 떠난다. 끝없는 황야, 붉은 돌산, 깎아지른 절벽의 좁다란 도로를 따라.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아야할 것 같다. 치지직대는 라디오에서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전한다. 총을 든 군인의 모습은 잠깐 보였지만 이곳, 황량한 사막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인 듯하다. 이들은 흙먼지를 날리며, 낡은 차에 올라 국경을 통과해야한다. 그렇게 아프리카 서북...

[시스터] “친언니를 납치했다!” (진성문 감독, Sister, 2026)

“나는 오늘, 언니를 납치했다.” 해란(정지소)은 태수(이수혁)의 도움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한밤의 골목길에서 소진(차주영)을 납치해 두건을 씌우고, 미리 봐둔 철거 지역의 버려진 집에 감금한다. 납치된 소진을 협박해 재력가인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거액의 몸값을 받아내려는 계획이다.  해란은 절박하다. 중국에는 수술을 받아야 할 동생이 있기 때문이다. 소진은 자신의 아버지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 결코 돈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주도면밀하게 납치극을 준비한 태수는 더 끔찍한 방법을 찾겠다고 위협한다. 태수가 동향을 살피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해란과 소진은 계획에 없던 대화를 나누게 되고 납치극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강력범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란, 살기 위해 필사적인 소진,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절대 빌런 태수. 이 세 사람만이 버려진 주택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안대로 눈을 가리고 손발이 묶인 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10억 원의 몸값 세계적인 갑부나 분쟁 지역의 인질극에서 요구하는 몸값은 천문학적이다. 그에 비하면 10억 원은 ‘재벌집 딸’의 몸값으로 꽤 현실적인 액수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등장한다. 부녀 관계가 이미 절연된 상태인 데다, 납치범이 존재조차 몰랐던 이복동생이라니.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설정은 극 중반 ‘현실적인 빌런’이 등장하며 이야기의 동력을 얻는다. 거액을 받아내기 위한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납치범과 인질 사이에는 기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인질극에서 나타나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한국적 정서가 결합된 기이한 형태다. 하지만 그 온기가 지속될 리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수든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절박함이 만드는 긴장감 중국에서 온 해란은 어떻게든 동생의 수술비를 마련해야 한다. ‘우연히’ 만난 태수는 그 범죄의 길을 일러준다. 영화는 밀실에서의 제한된 대화를 통해 진실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또 다른 탈출구를 모색한다. 해란은 차마 모질지 못하고...

[직장상사 길들이기] ‘헤드’헌팅의 달인, 가스라이팅의 여왕 (샘 레이미, Send Help, 2026)

샘 레이미는 마블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찍기 전, <이빌 데드> 같은 B급 공포영화로 호러 매니아를 즐겁게 한 감독이다. 그가 <드래그 미 투 헬> 이후 실로 오랜만에 호러로 돌아왔다. 샘 레이미의 호러는 ‘과다출혈’과 ‘신체분리’의 비주얼 폭격과 블랙코미디가 유려하게 결합한 장르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번에 개봉된 영화 <직장상사 길들이기>도 그런 샘 레이미 호러 월드의 전형을 보여준다. 가끔 오리지널 타이틀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한글 제목의 영화가 등장하는데 이 영화도 그러하다. 보고 나면 <직장상사 길들이기>가 영어 제목(Send Help)보다 훨씬 직관적이다. 정말 때려죽이고 싶은 직장상사가 있다면 말이다! 금융자산관리회사 전략기획팀의 만년 평사원 린다(레이첼 맥아담스)는 출중한 업무력을 가졌지만 무슨 이유인지 승진을 못 하고 있다. 대강 짐작하겠지만 ‘직장 내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운 CEO 브래들리(딜런 오브라이언)는 이런 린다를 자르고 싶지만, 일단은 주요한 비즈니스를 성사시키기 위해 함께 방콕으로 출장을 가게 된다. 근사한 전용기에서 ‘정치력 만랩’의 남자 직원들이 브래들리와 하하호호하며 ‘린다 흉보기’에 급급할 때 악천후를 만나고, 비행기는 손 쓸 틈도 없이 태국 앞바다 어느 무인도에 추락한다. 린다와 브래들리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그런데 린다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극한 생존 프로그램 ‘서바이벌’과 각종 생존지침서를 독파한 ‘생존의 달인’ 린다는 이 무인도에서 종횡무진 대활약을 펼친다. CEO 브래들리와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생존하기, 버티기의 극한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진다. 예전에 음성으로 전화번호를 자동 연결하는 이통사 광고가 있었다. ‘때려죽이고 싶은 직장상사’의 단축 이름은 ‘X새끼’ 같은 것, ‘마음에 안 드는 시엄마’의 닉네임도 적당히 입력하면 됐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으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