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評] ‘바냐 삼촌’ 130년 전부터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웠다 (Play 'Uncle Vanya' 2026)

불멸의 클래식이자 한국 연극계의 스테디셀러인 안톤 체호프의 [바냐 삼촌]이 다시 한 번 무대에 오른다. 이번엔 서울 강서구 마곡나루의 LG아트센터 시그니처홀(대극장)에서 손상규 연출로 만나볼 수 있다. 이번 무대가 특별한 것은 이서진과 고아성이라는 ‘연극’무대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대중스타의 생생한 연기라는 것이다. 130년 전, 러시아제국이 흔들릴 때 어느 시골 영지에서 벌어지던 순수 그 자체의 인간드라마가 2026년의 서울에서,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유니크한 건물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여러모로 결과물이 궁금해지는 공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공연은 체호프의 원작에 충실하다. 최근 볼 수 있는 스토리의 전복이나 한국적 변형이 아니라 원작에 충실히 기대어 기본에 탄탄한 드라마로 살아난다.

 19세기가 시작되기 전의 러시아의 어느 시골. 바냐는 외조카 소냐와 함께 이곳 영지를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 묵묵히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만 한다. 이곳에 매형 세레브랴코프 가 찾아온다. 세레브랴코프는 도시에서 평생 학문에만 전념해온 교수. 바냐와 소냐는 그를 우상숭배 하듯이 받든다. 그를 위해 시골 영지를 유지하고, 수입을 꼬박꼬박 그에게 보내왔던 것이다. 자신들을 위해선 그 아무것도 쓰지 않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수고와 노력, 정성도 빛이 바래기 시작한다. 세례브랴코프와 젊고 아름다운 두 번째 아내 엘레나의 등장은 이곳에 사는 모두에게 혼란과 갈등의 씨앗을 뿌린다. 바냐는 엘레나에게 끌리고, 이곳에 와있는 의사 아스트로프 역시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소냐는 아스트로프를 연모하게 된다. 서로를 바라보지만 끝내 닿지 못하는 감정들, 평생을 바쳤지만 보상받지 못했다는 허무, 이미 늦어버린 시간에 대한 자각이 좁은 영지 안에서 천천히 균열을 만든다. 그리고 세레브랴코프가 영지를 처분하겠다는 계획을 꺼내는 순간, 바냐가 평생 눌러왔던 분노와 절망은 한꺼번에 폭발한다.

<바냐 삼촌>은 안톤 체호프가 1897년에 쓴 희곡이다. 이듬해 처음 무대에 올린다. 이후 오랫동안 <바냐 삼촌>은 탁월한 인물묘사로 인간 본성을 파고든 걸작으로 평가받아왔다. 제한된 공간인 저택 내 거실에서만 펼쳐지는 이 연극은 시골과 도시, 우상과 찬미자,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심리를 인간적으로 보여준다. 평생 떠받들던 학문적 성취는 허명뿐이고, 쏟아내는 사랑의 열정은 빗나간 짝사랑일 뿐이다. 

오래 전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명대사를 남겼던 이서진은 최근 예능프로그램에서 투덜대는 캐릭터로 각인되어있다. 그런 이서진은 이번 작품에서는 화려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시골 영지에 눌러앉은 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캐릭터가 된다. 무대에서 쿨하게, 자조적으로, 때로는 코믹하게 느껴질 만큼 툭툭 던지는 대사에서는 그의 특유의 말버릇과 클래식 연극이라는 무게감이 적절히 충돌하며 묘한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고아성 역시 생소한 연극무대에서 한 가닥 생동감을 준다. ‘아름다운 엘레나’와 대비하여 ‘예쁘지 않은 시골 일꾼’ 소냐를 맡은 고아성은 첫사랑의 고백에서 패배한 비극의 히로인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사라져도 내일을 기약하자는 굳건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서진과 고아성의 화제성에 빛이 가려졌지만 배우들은 모두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서진과 고아성을 비롯하여 양종욱(아스트로프), 이화정(엘레나),,김수현(세레브랴코프), 조영규(쩰레킨), 민윤재(마리야), 변윤정(마리나)이 모두 전 회차 원캐스트로 무대를 채운다. 이화정이 연기한 엘레나의 열정은 무대 위 남자배우들의 일방적 숭배를 받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바냐 삼촌>은 혁명의 열정도, 애욕의 폭발도, 인성의 파탄도 없는 그러면서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간들의 드라마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바냐 삼촌과 소냐가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두 사람의 대화 중 “그때서야 알겠지. 우리 삶이란 게 사실은 얼마나 눈부셨는지.”는 오랫동안 기억될 인생대사이다.

 <벚꽃동산>(2024), <헤다 가블러>(2025)에 이어 LG아트센터가 제작 연극시리즈 <바냐 삼촌>은 5월 31일까지 서울 강서구 마곡나루 LG아트센터서울 LG시그니처홀에서 공연된다. (박재환,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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