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감독은 작가 김은희의 남편이자 입담 좋은 한량, 코믹 담당 TV 패널로 대중에게 더 익숙하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극본가와 감독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인장 같은 대표작을 단번에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 감독은 코미디만 쓴 게 아니다. 데뷔 시나리오인 <박봉곤 가출 사건>부터 반짝이는 재능을 보였고, 전작 <오픈 더 도어>에서는 뉴저지 한인 가족의 비극을 다룬 정통 스릴러를 선보였다. 어쩌면 우리는 그의 연출력을 ‘보이는 희극적 요소’로만 판단해 왔는지 모른다. 신작 <왕과 사는 남자>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 인물을 다루는 방식,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장항준의 깊은 심원을 발견하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의 영원한 ‘아이템’인 단종과 수양대군의 비극을 다룬다. 1457년,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이홍위(단종)는 강원도 영월의 산골 청령포로 유배된다. 수양과 한명회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상황, 열일곱 살 어린 폐왕의 곁에는 청령포의 민초들과 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어 하는 촌장 엄흥도가 있었다.
가장 창의적인 대목은 초반부 ‘유배지 쟁탈전’이다. 이웃 노루골 촌장(안재홍)이 고관대작 피유배자를 잘 봉양해 마을이 안분자족하게 되자, 광천골 사람들도 ‘한양 귀한 몸’ 덕을 좀 보나 꿈을 꾸게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유배 온 이가 이 사람이라니. 영화는 여기서부터 주민과 폐왕의 정서적 교류를 그리기 시작한다. 역사적으로는 어림없는 상상이겠지만 감독은 이 지점에서 관객이 폐왕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비극적 역사의 시곗바늘 속에서 이 ‘우연한 만남’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지켜보게 하는 흡입력이 상당하다.
장항준의 카메라는 역사를 박제된 기록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단종의 죽음을 감정적으로 소비하기보다, 유배지 속 공기와 민초의 호흡으로 비극을 재구성한다. 사료와 상상력을 적절히 섞어 최대치의 비극을 이끌어낸다. ‘왕과 사는 남자’의 핵심은 권력의 몰락이 아니라, 몰락한 자 곁을 지키는 자의 존엄이다. 이홍위는 역사 속에서 죽었으나, 엄흥도는 그 비극 속에서 의연하게 되살아난다. 엄흥도는 동강의 다슬기를 잡으며 왕을 모신 것이 아니라, ‘버려진 세계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자’로 그려진다.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의 열연은 조선의 비극을 오늘날의 울림으로 완벽하게 재현했다.
혹시 올여름 동강 래프팅을 계획한다면, 우선 영월 읍내의 <라디오 스타> 박물관을 찾길 바란다. 이준익 감독이 영월에 남긴 영화적 정취를 느꼈다면, 그다음엔 '한반도 지형'과 청령포, 그리고 장릉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남긴 여운이 영월의 굽이치는 물줄기마다 깊게 배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박재환.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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