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여인의 음모 (팽호상 감독)

2009. 10. 29. 10:25홍콩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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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영화계에 팽호상(彭浩翔 Ho-Cheung Pang)이란 감독이 있다. 우리나라의 김기덕 감독만큼이나 독특한 감독이다. 아마도 작금의 홍콩의 규모로 봐서는 ‘가장 현실적인 홍콩’ 영화감독일 것이다. 그의 영화데뷔작 <나는 쏘고, 너는 찍고>(▶영화리뷰 보기)를 어떻게든 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비참하리만치 쪼그라져버린 홍콩영화판에서 가장 홍콩적인 이야기를 아주 애써서 자신의 영화에 담고 있다. 그의 2007년도 작품 <출애굽기>를 소개한다.

  물론 <출애굽기>는 구약성서의 한 챕터이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유태인)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시나이산에 이르는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애굽’은 이집트를 이야기한다. ‘출애굽기’ 즉, ‘엑소더스’는 오토 프레밍거 감독에 의해 왕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폴 뉴먼이 이끄는 현대판 이스라엘 건국사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드물지만 <영광의 탈출>이라는 한국제목은 기억할 것이다. 장엄한 음악은 아주 오랫동안 영화팬들의 귓가에 맴돌 것이다. ‘출애굽기=엑소더스’ 는 결국 고통과 고난의 받던 족속들이 지도자를 만나 온갖 난관을 뚫고 신이 약속한 새로운 땅에서 위대한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내용일 것이다. 그럼 홍콩감독 팽호상이 그린 ‘출애굽기’는 무슨 내용일까. 홍콩시민들이 대거 중국으로 건너가서 위대한 ‘大중화인’이 되는 것인가? 흥미롭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면 아주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된다. 아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퍼포먼스를 보게 된다. 심오한 주제를 상징하는 전위예술인가? 여왕의 모습(알고 보니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이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여왕의 초상화이다. 여왕의 근엄한 모습에 아랑곳없이 복도에서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진다. 물안경을 쓰고, 오리발을 하고, 수영복을 입은 일단의 남자들이 도망가려고 발버둥치는 한 남자를 잡아 마구 때린다. 망치로 내리치고. 결국 그 남자는 죽는 모양이다. 장엄한 클래식 선율에 슬로우 비디오로 ‘폭행구타치사 광경’이 3분 정도 이어진다. 그리고 본 영화로 들어간다. 이건 무얼 의미할까.


여자들, 남자를 죽이고 있다

 임달화는 극중에서 홍콩 경찰(詹建業,짠졘예)로 등장한다. 적어도 경찰국장은 아니어도 강력계 팀장으로는 나와야할 사람이지만 그는 만년 말단 경관 같다. 어느 날 동료경찰의 요청으로 용의자 진술조서를 꾸민다. 잡혀온 놈은 관병문(關炳文)이란 잡범. 장가휘가 연기한다. 그놈은 여자화장실에 몰래 잠입하여 카메라로 뭔가를 찍다가 잡혀온 놈이다. 변태 잡범이잖은가. 임달화는 심문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놈은 전혀 뜻밖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봐요. 경관아저씨 아세요? 여자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어요. 세상의 남자를 죽이려는 계획을요. 그런 계획을 어디서 논의하는지 아세요. 바로 여자화장실에요. 그곳에는 여자들만 있으니 자기들끼리 음모를 꾸미기엔 최적이지요. 서로가 남자제거에 대한 정보를 나누어요. 증거를 잡기 위해 화장실에 갔던 거예요.” 그럼 이 놈은 변태 아니면 음모론에 경도된 정신병자? 관병문의 진술 중에 하나 현실적인 게 있다. “여자들이 왜 화장실에 오래 머무는지 아세요. 음모를 꾸미는 거예요.”


  임달화 경관은 20년째 경찰생활을 하고 있지만 매번 승진시험에서 탈락한 비운의 경관이다. 아내(劉心悠,류심유)와는  특별히 나쁜 것도 없다. 단지 장모가 가끔 와서는 경찰 말고 딴 일을 해보라고 옆구리를 찌를 뿐이다. 그런데 다음날 ‘변태, 혹은 또라이’ 장가휘의 조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안다. ‘여자들이 남자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아니라 ‘그냥 여자화장실 몰카범’임을 자인했다는 진술조서이다. 임달화 경관은 진술을 바꾼 것이 궁금해서 알아보니 직속상관 소미기(邵美琪)가 그렇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임달화는 더욱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되고 풀려난 장가휘를 뒤쫓는다. 장가휘의 행동도 이상하고. 장가휘의 아내 온벽화(温碧霞)도 이상하다. 그런 과정에서 조금은 의문스런 사고를 겪게 된다. 남자들이 ‘의문스럽게’ 죽는 것이다. 결국 장가휘도 사체로 발견된다. 임달화는 점점 온벽화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고...



여자들은 화장실에서 무얼할까

 과연 장가휘는 왜 여자화장실에 들어갔을까. 널리 알려진 이야기. 여자들은 혼자 화장실 가는 것보다 친구랑 같이 화장실 가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남자들보다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더 길다. 볼일 보는 물리적 시간이 길 수도 있고, 거울 앞에서 화장 손질을 할 수도 있다. 아니면, 뭔가 음모를 꾸밀 지도 모른다. 언니 동생하며 제 남편을 흠잡을 수도 있고, 제 남친을 죽일 음모를 꾸밀 수도 있고, 오늘밤 회식 때 자기를 집적대는 팀장의 술잔에 흔적도 남지 않는 독약을 집어넣자는 정보를 교류할지도 모른다. 장가휘만이 그런 낌새를 알고 증거를 잡기 위해 나섰다가 ‘변태’ 오명을 뒤집어쓴 것인지 모른다.

  팽호상 감독은 그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임달화의 직속상관 소미기 경고나이 그런 여성조직의 리더였다. 소미기는 장가휘가 너무나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기에 제거하라고 명령하고, 결국 임달화에 대해서도 같은 결정을 내린다. 온벽화도, 류심유도 결국 그 조직의 일원일 뿐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본 것은 중국산 DVD인데 아마도 홍콩 판본이랑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홍콩영화사이트에서는 임달화도 아내에 의해 제거된다고 밝히고 있는데 내가 본 것은 임달화의 아내 류심유가 경찰에서 조사 받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이다. “너의 음모는 밝혀졌어. 남편도 알고 있어.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그러더군...” 아마도 중국영화심의당국은 여자들의 남자제거 음모를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 영화는 팽호상 감독이 ‘芝See菇Bi’ 등과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芝See菇Bi’(지시고비)라니? 참 필명도 독특하다. 본명은 탁운지(卓韵芝,쭤윈쯔)이다. 1979년 홍콩출신으로 14살 때 홍콩의 한 라디오DJ선발대회에 뽑히면서 방송생활을 시작한 여자이다. 이때부터 ‘芝See菇Bi’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라디오 진행자, 시나리오 작가이자 책도 많이 썼다.  이 영화 <출애굽기> 개봉에 즈음하여 모친이 암으로 사망하였고 그 충격으로 유설 써놓고 자살을 시도했었다. 친구에 의해 발견되어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단다. 그 후 열심히 방송생활, 영화 활동을 하고 있단다. 다행이다.
 
 프로이드 정신분석 이론을 거론하며 이 영화에 나오는 세 여인, 온벽화(애인), 소미기(상사) 류심유(아내)를 각각 이드, 자아, 초자아로 분석한 사람도 있다.

다시, 영화 첫 장면

 영화의 시작은 이상한 복장의 사람들이 영국 여왕 초상화 밑에서 누군가를 집단 폭행하는 장면이었다. 아마도 여전히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즉, 1997년 이전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홍콩 경찰서 내에서 경찰에 의해 자행되는 피의자 구타장면인 모양이다. 소심한 임달화 경관은 그 문제를 상부에 보고했고 아마도 그 일로 왕따 당하고 매번 승진에서 탈락했을 것이다. ‘개인’ 임달화는 ‘조직’ 경찰(혹은 국가)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개인 임달화는 조직 (여성조직)에 이길 수가 없는 것이 이 영화의 올바른 서술방식일 것이다. 영화에는 휠체어를 탄 남자가 가끔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누군가를 데려가기 위한 죽음의 사신인 모양이다.

자, 이제 프로이드에 죽음의 사신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여자화장실의 음모까지 등장했고 말이다. 팽호상 감독이 어찌 만만한 감독이리오. 돈 없는 홍콩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홍콩판 <제 7의 봉인>과 <브라질>인 셈이다。

추가. 팽호상의 첫 작품은 12살에 형과 찍은 홈무비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이태리의 한 영화제에서 정식 상영되었단다. 재미삼아 찍은 작품인데 은행털이 이야기란다. 영화가 뭔지도, 영화촬영기법도 몰랐단다. 그래서 슬로우 모션을 찍을 때는 배우(그와 그의 형)가 진짜 슬로우 모션으로 연기했단다.(갑자기 주성치가 떠오른다!) 배경음악이란 것도 어떻게 집어넣는지 몰라 연기를 하며 노래도 부르고 그랬단다. 영화감독은 떡잎부터 다른 모양이다. 


류심유 (劉心悠/유심유)


온벽화. 인터넷 뒤져보면 서기 만큼 섹시 포토가 많은 여배우이다

임달화나 장가휘, 소미기는 두기봉 영화에 워낙 많이 등장하는 배우라서 통과. 아내 역으로 나온 배우는 류시유이다. 대만에서 태어났고 캐나다에서 디자인공부하였고 홍콩에서 영화배우하고 있단다. 임달화가 예쁜 아내 두고 빠져드는 온벽화는 왕년에 ‘홍콩의 섹시 스타’였다. 아마도 안소영 정도의 이미지일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CF스타(속옷광고*)로 다시 각광받고 있단다. 영화에도 가끔 출연하고 말이다. 이 영화엔 임가동, 두문택, 증지위 등도 출연했단다.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볼 기회 있음 두 눈 부릅뜨고 봐야겠다.

(by 박재환 2009-10-29)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때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만난 팽호상 감독과 나(박재환). 자기 영화 좋아한다고 하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니 한국에도 자기 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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