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2002.4.11.) 미국의 인기 글쟁이는 단지 출판사의 보배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헐리우드가 서로 모셔가려는 머니메이커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만큼이나 영화사 사장에게 큰소리 치고 그 만큼 큰 돈 벌어주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바로 마이클 크라이튼이다. 그는 나이 겨우 14살에 뉴욕타임즈에 기행문을 썼을 만큼 타고 난 글솜씨를 가졌다. 그가 쓴 소설은 당연히 베스트셀러이고, 그것을 원작으로한 영화와 TV드라마는 언제나 인기를 끌었다. 어떤 소설? 어떤 영화 ? <쥬라기공원>! <ER>! 물론 감독 잘못(?) 만나 원작의 재미를 망쳐놓은 것들도 다소 있다. <열 세번째 전사>, <스피어> 같은 것. 그의 작품 목록에는 <트위스트>나 <콩고>,<폭로> 같은 것도 있으니 그의 관심 영역의 폭넓음과 전문성에 감탄하게 된다. 이렇게 소설과 영화를 넘나드는 커리어 가운데 흥미롭게도 그가 각본이나 원안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감독을 맡은 몇몇 작품이 있다. TV드라마 <Pursuit>를 처음 감독하고 나서 <웨스트월드>(1973)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물론, 그가 직접 시나리오까지 썼다. 이 영화는 그의 향후 작품들의 원형들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편의 관광 홍보영상물, 광고를 보게 된다. 들로스(Delos)라는 곳은 미래의 디즈니랜드. 도시의 일상에 지친 현대인은 들로스에서 서부시대, 로마시대, 중세시대로 만들어진 테마파크에서 그 시대의 복장으로 그 시대의 풍미를 즐길 수 있다. 서부시대에는 선술집이 있고, 총싸움이 있으며, 유곽의 무희가 있다. 피터(Richard Benjamin)와 존 (James Brolin)은 함께 서부시대를 택한다. 그들은 카우보이 복장으로 갈아 입고 선술집에서 독한 술을 마시며, 여자를 골라 향락을 즐긴다.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무뚝뚝한 사내(율 브린너)가 시비를 걸며 총을 뽑는다. 피터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먼저 총을 쏘면 어쩌나 싶어 불안해하며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 '먼저' 쏜다. 사내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다. 율 브린너가 연기하는 총잡이는 이 테마파크의 로봇이다. 중앙통제소에서는 수많은 모니터를 통해 모든 로봇을 통제하고 있다. 그들 관제소 요원들은 관광객들이 적당히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로봇인 것이다. 총잡이도, 여자도, 보안관도...
그런데, 이 테마파크에 문제가 생긴다. 어느 날 갑자기 이들 로봇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로봇은 사람(관광객)을 마구 죽이기 시작한다. 로봇의 반란으로 중앙관제소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가 없다. 피터는 말을 타고 도망가지만 건슬링어는 끝까지 쫓아온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은 그의 전문지식에 대중적 상상력, 그리고 그 만의 창의적 오락성이 적절히 배합되어있다. <쥬라기공원>처럼 들로스는 하나의 금지된 유원지이다. 인간들은 이곳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발산할 수 있다. 섹스와 살인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로마-중세-서부시대라는 세 개의 테마파크가 만들어진 이유도 이들 시대가 상징하는 인류문명의 향락적 특성을 활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언제나 인류가 완벽한 통제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과학의 진보 경연장에서 엉망진창의 상황을 연출하여 가장 원시적인 생존게임을 펼치고는 마침내 참담한 현실에 할 말을 잃고 작품을 끝낸다. <쥬라기 공원>1편에서 공룡 목장의 미래에 대해 시니컬한 결과를 예상했던 말콜 박사의 이론은 이른바 '혼돈이론'이란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그와 유사한 과학정복의 결론을 보여준다. 인간이 제 아무리 잘 나서 뛰어난 과학기술로 피조물을 만들어내더라도, 그것을 통제하는 인간의 권능은 언제나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머무르고, 그 때문에 새로운 질서에 대한 통제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통제가능한 인간의 권한이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SF 영화의 걸작. 완벽하게 잘 만든 영화라기보다는 깔끔하게 잘 만든 영화라는 게 맞을 듯.
이 영화에서 무감각한 로봇 총잡이 역은 대머리 스타 율 브린너가 맡았다. 많은 서부영화에 출연했던 그이지만, 이젠 <왕과 나>의 그 배우로만 인식된다. 추억의 스타임에 분명하다.
<웨스트월드>는 오래 전 TV에서 몇 차례 방영했었다. 나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주말에 본 이 영화로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이색지대>라는 타이틀로 비디오로 출시되었는데 아주 찾아보기 힘든 귀한 비디오이다. (박재환 2002/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