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손’ 리뷰 앞부분은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2002)와 관련된 한국 영화심의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삭제합니다)
..... 이런 영화판의 소란을 뒤로하고 아주 재미있는 우리영화 한 편을 보았다. 1954년 세밑에 개봉된 흑백영화 <운명의 손>이란 작품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수선하던 시절에 개봉된 <운명이 손>이 아직도 '한국영화사'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바로 이 영화에서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남녀 주인공의 키스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란다. 당시, 성인 남녀주인공의 2초짜리 키스 씬은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국산영화 애정 신의 코페르니쿠스 적인 전환이었다. 당시만 해도 '남녀7세 부동석'이니 '부부유별'이니 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사회가 변혁되고 더욱이 미군의 대거 참전으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유분방한 미국식 애정관 등 미국의 양키 문화가 만연되어 기존의 성도덕에서 일탈하는 과도기였던 것이다. 그런 시대의 흐름을 한형모 감독은 극중 남녀 주인공의 키스신을 통해 직설적으로 표현, 큰 반응을 일으켰다. (<<이야기한국영화사>> 김화 지음/하서출판사 198쪽~)
과연 어느 정도농도의 키스였기에 영화사 책에서 저렇게 서술되었을까. 또 다른 한국영화사 책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1954년에 발표된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은 간첩들과 액션을 벌이는 통속극이었는데, 이 영화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키스신(키스신이라고 해도 입술을 살짝 밀착시키는 정도였지만)을 보여 주어 관객을 놀라게 했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유부녀였는데 이 영화를 본 남편이 감독을 고소한다고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영화100년 호현찬97쪽>>
영화를 보기 전에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에 나와 있는 시놉시스만이 내가 아는 유일한 정보였다.
간첩단 두목 선태의 정부인 캬바레 마담 인자는 손님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선태에게 제공한다. 방첩장교인 이향이 그들을 미행하며 수사하다가 그들에게 납치되어 호된 린치를 당하고는 산 속에 있는 아지트에 감금되는데, 이향을 은근히 좋아하고 있는 인자가 그의 탈출을 도움으로써 탈출한 이향은 곧 방첩대 병력을 동원, 놈들을 일망타진한다.
그런데 실제 영화를 보면 마치 우리나라 AV비디오 커버에 적힌 내용과 실제 영화만큼이나 다소 차이가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여자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담배를 피우면 깊은 생각에 잠긴다. 이 여자의 옷차림은 꽤나 고급스러워 마치 유한계급 같다. 혼자 살며, 담배를 피우며, 도도하다! (이 영화는 1954년에 개봉되었다) 깊은 생각에 잠겼던 여자는 마치 악상이라도 떠오른 작곡가처럼 오선지를 꺼내어 악보를 써 내려간다. 이때 그 집 문 밖에 한 남자의 다리만 보여준다. 그러더니 이내 파이프를 든 남자의 한쪽 손만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누굴까? 이때 또 다른 남자가 도둑으로 몰려 경찰에게 붙잡힌다. 여자는 이 남자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서는 먹을 것, 마실 것을 준다. 남자는 막노동 일을 하는 사람. 여자는 이 남자에게 계속 호의를 베푼다. 왜? 전혀 다른 계급간의 사랑놀이?
그런데, 영화가 계속되면서 이 여자의 정체가 드러난다. '마가렛'이라는 예명으로 불리는 '정애'는 스파이(간첩)였고 파이프를 든 사람은 바로 일당의 두목. 여자는 악보(콩나물 대가리)를 암호문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남자를 끌어들인 것은 미군의 배치를 파악하는데 활용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정애는 이 막노동 일꾼 영철을 자기의 침대에서 재운 뒤 그의 지갑을 훔쳐본다. 아니! 이 볼품없는 남자의 지갑에서 어떤 신분증을 보게 되고 화들짝 놀란다. 알고 보니 남자는 육군'방첩부대'(간첩 잡는 부대) 신영철 대위였다.
정애는 고뇌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공작행위를 위해 끌어들인 남자에게서 적으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데, '파이프 맨'은 새로운 지령을 내린다. 신영철 대위를 산으로 유인하여 제거하라고. 산 속 어두운 동굴에서 방첩대 신영철과 간첩 일당이 대결하게 된다. 정애는 총을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한바탕 엎치락뒤치락 싸우더니 신영철 대위는 '파이프 맨'을 죽이고, 쓰러져 있는 정애에게 다가간다. 정애는 자기를 사랑했노라 말하고, 신영철 대위는 "공작과 파괴를 일삼는 무리, 인간성이 말살된 당신 같은 사람을 저주한다"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는 그래도 사랑했던 사람이라 주저주저한다. 그리고는 둘은 키스한다. (2초) 그리고 남자는 총을 꺼내든다. 그리고 카메라는 동굴 밖을 보여주면서 한 방의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신영철 대위는 동굴 밖으로 걸어나오며 영화는 <끝>.
1954년 시대상황이 말해주듯 반공물에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아주 흥미롭다. 파이프 들고 있는 사람의 정체를 마지막에 밝혀준다든지, 정애와 영철의 미스터리한 정체를 중간에 가서야 눈치 채게 한다는 것 등 많은 부분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물론, 이 영화는 1954년 한국영화란 점을 염두에 두고 감상해야한다. 녹음상태가 참기 힘들 정도이다. 박시춘 작곡의 영화음악이 갑자기 귀를 찢을 듯하더니, 곧바로 대사가 너무 낮아 볼륨을 최대로 올려야하는 등 영화 따라잡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감독을 고발하려고 했던 여배우의 남편 이야기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나중에 EBS의 <한국영화걸작선> 시간에 이 영화가 방영된다면 그때에 김홍준 교수가 관계자의 증언을 들려줄지 모른다.
어쨌든 남자, 여자가 키스를 한 것을 두고 호들갑을 떨었던 대한민국에서 이제 ‘죽어도 좋아’를 두고 시대감각을 테스트하게 생겼다. (박재환 2002/8/30)
운명의 손 (1954) 감독: 한형모 출연: 이향, 윤인자, 주선태 한국개봉: 195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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