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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고] 춤추는 매트릭스 (김태균 감독 Volcano High 2001)

한국영화리뷰

by 내이름은★박재환 2019. 8. 2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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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환 2002/10/7) <화산고>의 감독 김태균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보면 흥미롭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남자는 괴로워>의 제작담당으로 영화 일을 시작하여 <닥터 K><억수탕>의 조감독을 거쳐 <박봉곤 가출사건>, <키스할까요>를 감독했단다. 그리고 지난 연말 온갖 우려와 기대 속에 <화산고>를 개봉시켰다. 다른 영화는 다 놔두고 <박봉곤 가출사건>은 참 희한한 영화였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영화였지만 형식의 특이함, 주제의 찬란함 등 여러 면에서 독창성이 느껴지는 신선한 한국영화였다. 그런 그가 <화산고>에서 맘 먹고 돈을 펑펑 써가며 또 다른 '신선한' 한국영화 한 편을 건져내었다.

 

남들은 '화산고'의 어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화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촌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외가댁이 있는 경남 서생이란 곳에 '화산'이란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기장-월래-좌천-일광'하는 지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혹시 '화산'이란 지명도 들어보았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김태균 감독은 시간적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에 속, 가상의 공간 `화산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무협극을 펼친다. 완전히 득도한 교장 선생님부터 짱이 되고 싶어 안달인 고등학생까지 무척 손에 쥐고 싶어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절대무술의 비기가 쓰여진 <사비망록>이라는 책자이다. 물론 이 책이 흘러오기까지의 과정을 잠깐 소개해준다. '전교사화'라는 것이 있었고, 교장이 그걸 손에 쥐었고, 교감은 호시탐탐 그걸 노리고..... 유도부, 역도부, 검도부 등등 화산고의 제 파벌들의 우두머리가 화산고의 최고수가 되기를 원함과 동시에 이 책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다.

 

기존의 학원물-특히, 학원물의 탈을 쓴 조폭물과 비교하자면 이 영화는 확실히 한 수 위다. 아니면 이미 그런 천편일률적 갈등관계와 한국적 교화단계를 뛰어넘었다. 기존의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는 금전적 관계(등록금-봉급교사)를 얼마나 희화화시키느냐가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여기선 그런 교육-피교육자의 관계는 무림의 '상수-하수'의 대결구도의 쉬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가공할 무협실력을 가진 학생들과 이에 맞서는 불쌍한 선생들... 그런 선생들은 '자유방임파''주입암기파'라는 특기로 나뉜다나.. 적어도 그 발칙한 상상력은 평가해줄만한 영화 아니겠는가.

 

이런 혼란의 강호에 홀연히 나타난 주인공은 '김경수'라는 전혀 개성 없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다. 지난 추석 때 고향에 내려갔다가 조카가 읽는 만화책 사이에서 <화산고>만화를 보았다. 영화개봉 전에 영화홍보를 겸해 만든 이른바 '프리스토리'가 담긴 만화였다. 그것에 따르면 교장이 절대권력을 어떻게 얻었고, 교감은 어떻게 그 꼴이 되었는지, 그리고 '선생 5인방'이 어떻게 화산고 학교에 투입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김경수란 놈이 어떤 놈인지 설명되어 있다. 김경수는 벼락 맞고 절대파워를 가진 좀 '띨띨한' 놈으로 묘사된다. 그 만화책을 먼저 봐서인지, 영화가 웬걸 재미있다. (아마, 그래서 <해리포터><반지의 제왕> 책 읽은 사람이 영화를 쉽게 이해하나 보다.)

 

'순제작비 48억 원, 162회 촬영'이라는 수치가 증명해 주듯이 이 영화는 블록버스트급 영화이다. 이런 영화에는 으레 따라다니는 '화려한 볼거리, 빈약한 내러티브'라고 일부는 평하고 있지만, 한국영화에 있어 <화산고>는 확실히 멋진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전작 <박봉곤 가출사건>만큼이나 소수에게 열광받을 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쉽게 잡아낼 수 없는 특별한 매력이 결국은 한국영화의 자양분이 되는 요소인 것이다. <화산고>는 무협지와 만화의 황당무계함과 돌발적 상황전개로 가득하다. 주성치식 영화스타일로 쉽게 평가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수법은 한국영화의 거장 혹은 신예들이 종종 써먹었다. (<넘버 3>에서도, <기막힌 사내들>에서도..)

 

무협소설의 양식은 주요캐릭터의 면면에서 드러난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결코 나서기 싫어하는 주인공, 절대고수 밑에서 아양을 떨며 기회를 노리는 2인자, 또 하나의 절대고수는 모함에 빠져 옥고를 치른다. 무협물에는 적당한 무술실력을 가진 여자도 나온다. 이 영화는 무협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특성을 모두 소화해내고 있고, 영화에서 그것을 충분히 극화시킨 셈이다.

 

장량과 김경수의 대결구도와 화해구도 등은 이 영화가 호락호락 날려버릴 영화가 아님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무협물의 정석에서 조금 벗어나서 일본망가의 장난스런, 진지하지 못한, 우스꽝스런 남자 주인공이 영화의 깊이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들고 만다. 김경수는 유채이에 반하고, 유채이는 김경수에게 '능력을 보여주세요'라고 그런다. 여자 캐릭터가 특성을 살리지 못한 반면, 남자 연기자들은 주연, 조연을 가릴 것 없이 확실히 '맹랑무협영화에 걸맞은 연기를 보여준 셈이다.

 

이 영화는 일단 <매트릭스>에서 보아왔던 화려한 액션씬을 우리 영화에서도 만끽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이 즐겁다. 적당히 오락물로서의 재미를 갖는 홍콩식 무협물의 내용을 헐리우드식 CG로 현실화시킨 괜찮은 영화이다.

 

, 이 영화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구의 경우 '엑스칼리버'를 가진 자, '절대반지'를 손가락에 낀 자가 천하를 얻게 되고, 동양에서는 <사비망록>,<규화보전>,<비천신기> 같은 옛날 책나부랭이를 입수하여 그것을 읽고, 습득해야 천하의 고수가 된다. 동양쪽이 훨씬 학구적이랄까. 뭐 그렇다. <화산고><매트릭스>의 탈을 쓴 헐리우드 블록버스트가 아니라 '동양적 맥'을 이은 한국식 판타지라는 것은 이 점에서 보아도 명백하다.--; (박재환 200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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