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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그 섬에는 악어가 산다 (김기덕 감독 The Isle, 2000)

한국영화리뷰

by 내이름은★박재환 2019. 8. 2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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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환 2000.4.6) 올해 개봉된 영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김기덕 감독의 네 번째 영화 <섬>을 들고 싶다. 이 영화는 몇 개의 장르 관습과 한없는 열정에만 사로잡힌 채 만들어지는 많은 한국 영화들 중에서 가장 치열한 작가 정신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만들며 희열을 느낄 수 있고, 관객이 그 영화를 보고 나서는 감독의 의도에 공감하든 아니면 반발하든 하나의 느낌을 명확히 가질 수 있는 영화가 흔치 않은 요즘, 이 영화는 정말 기이할 정도의 매력을 가진다. 첫 시사회에서부터 흘러나온 찬사와 놀라움은 이제 점점 더 층을 넓혀간다.

김기덕 감독은 이미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으로 한국 영화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영화감독이다. 서른이 넘어서야 영화라는 매체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는 첫 영화 <악어>의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자를 찾아 나서야 했고, 다 만들어진 필름을 들고는 극장 주인을 찾아 나서야 했다. 물론 그 영화는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했었다. 두 번째 작품 <야생동물 보호구역> 또한 마찬가지 신세였다. 그래도 그는 기어이 세 번째 작품 <파란대문>으로 그의 강인한 자생력을 보여주었다. 이미 그는 왕가위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내영화감독들 중에는 보기 드문 마니아급 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의 새 작품 <섬>은 여전히 김기덕의 냄새와 김기덕의 끈기가 내보이는 비릿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전작들처럼 주류사회와는 동떨어진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삶의 치열함을 다룬다. 호수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리적 배경은 사회와의 격리를 의미한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남자와 여자의 엽기적인 행위는 생존의 문제와 애정의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여자는 김기덕 영화에서 언제나 나오는 배설의 대상으로서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한 ‘창녀’라는 이미지는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놀라운 배우 ‘서정’의 헌신적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캐릭터의 생명을 살려내었다. 섬 낚시터의 남정네와 섹스를 하는 것은 그녀에겐 돈을 벌고자 하는 목적 이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목적은 알 수 없음이 정답이다. 감독이 친절하게 보여줄 리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섬으로 떠내려 온 또 하나의 악어인 현식(김유석)에게는 잊지 못할 과거가 있다. 그것은 <우나기>를 본 사람이면, 그리고 사랑의 파멸을 느꼈을 남자라면 그 어떠한 엽기적 결말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아주 짧은 플래시백으로 처리된 현식의 과거에서 김기덕 감독이 말한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의 광기’를 짐작하게 한다. 어쨌든, 섬 낚시터의 창녀 희진은 운명적으로 현식을 보게 된다. 둘의 관계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일 수 있는 모순적 성질을 갖는다. 특별한 동정심의 발로 말고는 그 어떠한 특별한 계기도 없이 둘의 섹스로 이어진다. 물론 그 첫 번째 섹스에 이르는 엽기성은 관객의 심기를 흐려놓기에 족하다. 희진의 오두막에 늘 있던 개는 현식을 바라보는 희진의 시선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티켓 다방 아가씨의 등장을 즈음하여 개를 대하는 희진의 난폭함에 이르러서야 현식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서정’만큼 눈에 띄는 연기를 한 티켓 다방 아가씨 ‘박성희’는 절망에 놓인 현식의 현재의 우유부단함을 자극한다. 삶에 대한 자포자기는 갑자기 끼어 든 박성희에 의해 지체될 뿐이다. 운명이란 것은 언제나 일직선의 과정을 거친다. 현식에 대한 비틀린 소유욕의 희진은 차례로 침입자를 죽이고, 둘은 점점 파멸로 다가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몇 장면은 <베티 블루> 버금가는 사랑의 광기를 보여준다. 개구리를 잡아 살을 찢어 현식의 새장에 넣어주는 희진이나, 그 유명한 낚싯바늘의 등장은 관객에게 애정의 지독함을 여과 없이 보여줄 뿐이다.

이 영화를 프로이드가 봤다면 분명 섬과 호수, 여자와 낚싯바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릴 것이다. 바다는 여자의 자궁, 특히 어머니의 자궁이며 낚시를 하는 행위는 자궁으로의 귀환, 혹은 자연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지 않았는가. 하지만 현식은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섬 속 호수에 숨어들었었다. 그곳은 비록 안개 낀 밀폐된 공간이지만 언제라도 뭍으로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극단적 상황에서도 여자를 두고 달아나려 했던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실제의 남자는 열정을 소화시킬 이성이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격리된 곳에서 펼쳐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주는 만큼 비극적 영상을 제공해준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의 처리에 대해 관객의 편안한 수용을 원했지만, 그의 마지막 선택은 바로 여자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서야 평안한 안식을 찾는 남자의 속성을 표현할 것이리라. (박재환 20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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