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별에 임하는 현빈과 임수정의 자세..

2011. 2. 24. 17:32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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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막을 내린 6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하게 경쟁부문에 올랐던 영화가 바로 이윤기 감독(소설가 이윤기와 동명이인이다)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이다. 베를린영화제처럼 경쟁부문을 도입하고 있는 국제영화제들은 월드컵 축구와는 방식이 다르다. 열정적 팬들에 의한 추천작 상영이나 인기작 상영이 아니다. 그냥 그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한 해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괜찮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작품을 추리고 추려 경쟁부문에 올려놓는 것이다. 특정 영화제가 수준이 높다거나 그 해 ‘수상작’에 대해 공감을 얻으려면 해당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거의 목숨 걸고 괜찮은 작품들을 ‘다른 영화제보다 먼저’ 수급해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상결과는 보통 독단적이다! 문제는 그들이 완성작을 다 보고 고르는 것이 아니라 기획단계에서, 촬영 중간단계에서, 혹은 편집 단계의 ‘덜’ 완성된 영화만을 보고 영화제 후보작을 선정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졸작 만들 때가 있고,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더라도 결과물은 실망스런 경우가 있는 게 영화라는 예술이다. 왕가위같이 죽어라하고 데드라인을 못 맞추는 감독도 있다. 이윤기 감독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어떻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16편 가운데 아시아영화로선 유일하게 포함될 수 있었을까. <시크릿 가든> 때문에?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임수정 때문에? 아마도 프로그래머는 이윤기 감독의 전작 <여자, 정혜>나 <멋진 하루>를 충분히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사실 두 출연배우도 괜찮고 시나리오도 흥미로우니 말이다.

갈라서기 직전의 커플, 리얼리? 

 **영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바랍니다**

서울의 도로에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남자(남편, 현빈)가 여자(아내, 임수정)를 공항으로 바래다주고 있다. 남자는 줄곧 조곤조곤 아내에게 말을 건다. 남편은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이, 배려심 가득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살갑게 아내의 출국 길을 동행하고 있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내심 불편하고 불안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이 아내, 지금 곧 남편에게 헤어질 것을 통보할 작정이다. 그리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아내는 2층 작업실에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정말 헤어지기로 작심한 것이다. 이삿짐을 다 챙기고 나면 또 다른 남자가 그녀를 데려갈 것이다. 남편은 1층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드립퍼로 정성껏) 커피를 끓이며 아내의 갈 길을 지켜본다. 두 사람의 마지막 저녁을 위해 식당도 예약해 두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는 두 사람의 저녁 계획을 망쳐놓는다. 아니면, 정말 헤어지기 싫어 무엇인가 조그마한 변명거리라도 찾고 있는 이들 ‘남과 여’에게는 또 다른 작용을 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여전히 조곤조곤 속삭이고,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고 먼저 “괜찮아”라고 말해버리는 남편과, 무슨 이유로 헤어지는지 백 가지 예상과 짐작은 가능한 아내. 이 어정쩡한 동거상태의 균형을 깨는 것은 갑자기 나타난 고양이 한 마리이다. 남편과 아내는 고양이와, 잇달아 들어온 고양이의 주인(옆집 이웃) 부부 때문에 이별의 시간은 하루가 더 늦춰진다. 비가 그치면, 고양이가 돌아가면.. 이 위기의 커플은 정말 갈라설까?

원작, 돌아올 수 없는 고양이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노우에 아레노의 <돌아올 수 없는 고양이>가 원작이다. 이 작품은 에쿠니 가오리 등 일곱 명의 일본작가가 사랑, 이별에 대해 쓴 연작집 <일곱 빛깔 사랑>에 포함된 단편이다. 이노우에의 원작은 영화와 같은 설정을 다루고 있다. 한적한 동네의 특별한 집에 살고 있는 인형제작자 남편과 프리랜스 작가 아내가 갑작스레 맞이하는 이별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예상 못한 아내의 통보, 그리고 예상 못한 남편의 무덤덤함까지. 뚜렷한 이별의 이유나 명확한 거절도 없는 어색함들. 흔히 예상하는 로맨스나 부부 파경담에 끼어드는 절박함이 완전히 탈색된 상황이다.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라면 소설 속 부부는 이전에 고양이를 키웠다는 것. (영화에서도 고양이에게 먹이(캔)를 주는 장면이 있다. 아마도 남아있는 단서?) 남편이 TV를 통해 축구를 보거나 아내가 아끼는 커피잔을 챙겨주거나, 아내가 파스타 책을 소중히 기억하는 것 등은 동일하다. 아, 소설에선 아내가 요리를 더 잘한다!

현빈과 임수정, 반짝반짝 빛나는 연기

드라마 <시크릿 가든>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빈은 최근 영화 <만추>로 영화팬을 찾았다. 온 국민이 기특해하는 해병대 입대를 앞두고 또 다른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그의 연기 인생에 큰 획을 그은 셈이다. <만추>처럼 이 영화에서도 그는 여전히 연기 잘하는 남자임을 보여준다. 특히나 ‘섬세한 남성연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듯하다. 너무나 조곤조곤 거려서 마초기질이 아니더라도 남자관객이 보기엔 짜증이 다 날 정도이다. 아내의 이별, 혹은 그 전에 아내의 외도(?)까지 다 짐작하면서도 “나 화난 거 아냐. 괜찮아..”라고 먼저 말해버리는 남편에게 아내는 뭐라고 화를 낼 수가 없다. 아마도 아내는 그런 남편을 한때는 좋게 보았을 것이고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려고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그럴 것이다. 게다가 비까지 쏟아지니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현빈만큼, 막막한 상황에 처한 아내 연기를 임수정은 반짝반짝 빛나도록 연기한다. 이윤기 감독은 아주 적막한 이 영화를 두 사람의 어쩔 줄 모르는 상황만으로 가득 채운다. 그런데 영화초반 도로 위 자동차 안에서의 커플의 대화는 조금 작위적이다. 조용한 이들 커플은 비록 조용하게 이야기하지만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거의 단절 없는 대화를 이어간다. 실제 사귀는 연인이 아니라면, 일상의 부부, 그것도 헤어질 찰나의 부부가 저리도 수다를 떨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사소한 것이 이끄는 거대한 망각

영화에서 비가 그치면 여자는 집을 나갈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지 비 때문에, 고양이 때문에 잠시 망설이고 하루의 어색한 동거가 이어졌지만 말이다. 그들 부부에겐(적어도 아내에겐)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무언가가, 누군가가 자신들을 붙잡아주고 다잡아주기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조금 다르지만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단편소설이 하나 생각난다. 어느 노(老) 부부에게 하나뿐인 아들의 전사통보서가 날아온다. 망연자실하는 노부부. 아마도 늦게 얻어 기쁨이 두 배였던 그들은 비통함에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하얀 편지지를 꺼내어 무언가 글을 쓰려고 한다. 잉크병을 열고 펜에 잉크를 적신다. 그런데 방안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서 윙윙 거리다 잉크병 모서리에 앉았다가 그만 빠져버린다. 파리는 잉크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 할아버지는 글을 쓰다말고 물끄러미 파리의 모습을 지켜본다. 파리는 몇 번씩 기어 올라오다 도로 빠진다. 그러기를 몇 분. 마침내 날개를 털더니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할아버지는 멀어지는 파리를 담담히 지켜본다는 내용이다. 다 읽고 나서도 멍해졌다. 아마도 아무리 거대한 슬픔이라도 잠시, 어떤 사소한 일에 빠지게 되면 엄청난 고통도 망각하게 된다는 말일 게다. 이 영화에선 그게 비가 아니라 고양이인 셈이다. 변명거리로 치부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박재환, 20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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