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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무대 위의 호랑이, 구명보트에 올라타다 (Live on Stage)

'음식남녀',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등으로 유명한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는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소설이 원작이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경영하던 가족이 경영난에 힘들어하다가 결국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기로 하고 일본화물선에 오른다. 그 배는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고, 열일곱 살 주인공 소년 ‘파이’만이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오른다. 그런데 화물선에 실렸던 '동물'들도 잇달아 구명보트에 올라탄다.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골호랑이까지. 소년은 227일 동안 태평양 망망대해를 떠도는 작은 보트에서 사나운 호랑이와 동거를 하게 된다. 그것은 '소년이 전하는' 이야기다. 과연 그 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얀 마텔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이안 감독의 환상적 영화로 오래 기억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무대극으로 만들어졌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일련의 워크샵을 거쳐 2019년 영국에서 초연 되었고, 브로드웨이를 거쳐 마침내 서울 'GS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뮤지컬’이 아니라 배우와 퍼펫(동물인형)이 함께 뒹구는 특별한 ‘연극’(PLAY)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 동남부 폰디첼리의 ‘피신 몰리토르 파텔’은 친구들에게 ‘파이’(Pi)라 불리는 소년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물원은 경영난에 시달리고 정치적 혼란이 잇따르자 동물원을 처분하고 가족이 모두 이민을 가게 된다. 몇몇 처분하지 못한 동물들도 함께. 하지만 곧 폭풍우를 만나고 소년과 동물이 겨우 구명보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리처드 파커’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벵골호랑이도.   이야기는 227일 동안 태평양을 떠돌다 구조되어 병원에 실려 온 ‘파이’에게 선박회사 조사관이 화물선의 침몰 상황에 대해 캐묻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17살 ‘파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물도, 음...

[조씨고아,복수의 씨앗]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짧다 (The Orphan of Zhao, 고선웅 연출,2025)

 고선웅이 각색과 연출을 맡은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최근 다시 무대에 올랐다. ‘조씨고아’는 2015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처음 선을 보인 뒤 꾸준히 무대에 올랐고 이번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10주년 공연을 맞이한 것이다. 캐릭터와 스토리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드라마틱한 전개로 오랫동안 공연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답게 이번 공연도 연일 매진을 자랑했다.   ‘조씨고아’는 중국 원(元)나라의 기군상(纪君祥)이 쓴 희곡 <조씨고아>의 이야기를 판본으로 한 작품이다. 작가는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의 춘추시대, 진(晉)나라 때 일이다. 진의 영공(靈公)은 문신 조순과 무신 도안고의 보좌를 받으면 집권하고 있었다. 횡포한 도안고가 야심을 드러내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춘추’시대라 하면, 주(周)의 왕이 형식적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가운데 제후국의 공(公)들이 자기들의 영역을 책임지던 시절이었다. 그리곤 그들이 마구 싸우던 ‘전국’시대를 거쳐 결국 시황제가 중원을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야심가 도안고는 충신 조순이 역모를 꾸민다고 상소하고 이를 빌미로 조씨 집안의 ‘9족’을 멸한다. 9족이 어디까지인지는 복잡한데 친가-외가-처가에 걸쳐 거의 모든 피붙이를 도륙하는 것이다. 여하튼 도안고는 조순 집안과 관계되는 300명을 다 죽인다. 그런데, 드라마틱하게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도안고의 명을 받은 한궐 장군이 조씨 집안을 완전도륙내지만, 조순의 아들(조삭)의 처(姬)가 낳은 갓난아기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조씨 집안을 드나들던 의원 정영이 그 갓난아기를 책임지게된 것이다. 정영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 속에 아이를 가까스로 빼돌린다. 하지만 도안고는 전국의 갓난아기를 다 죽이라고 명한 상태이다. 정영에게도 갓 낳은 아이가 있었다. 이제 정영은 조씨 집안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갓난아이를 살리기 위...

[한란] 소녀가 온다 - 제주 4.3의 비극 (Hallan,하명미 감독,2025)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광복을 맞은 한반도는 진정한 통일을 맞지 못한다. 남과 북이 갈라지고 제주도가 혼란에 휩싸인다. ‘데모크라시’와 ‘이데올로기’의 깊은 뜻을 모른 채 희생의 탑을 쌓기 시작하는 것이다. 1948년의 격전장은 제주도였다.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되어있다. 과연 그해 그 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명미 감독은 그 때의 비극을 극화한다. 영화 <한란>은 어느 날 갑자기 이데올로기 싸움터에 내몰린 제주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바람 많은 제주 해안마을의 돌담집이 보이고 축사의 돼지를 바라보고 있는 여섯 살 소녀 해성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산으로 올라가서 소식이 끊겼다. 엄마 아진은 어린 딸을 할머니 손에 맡기고 마을 사람과 함께 산으로 향한다. 엄마가 산으로 떠나고 얼마 뒤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한다. 노인네고 어린애고 모두. 그런데 어린 해성이 새벽이슬에 깨어난다. 살아남은 것이다. 이제 어린 아이는 아빠가 숨었다는, 엄마가 올라간 그 산길을 따라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제주도의 산과 오름에 숨어든 ‘빨갱이 세력’과 빨갱이로 몰려 죽는 게 두려운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의 엄마와 어린 딸의 운명이 엇갈리기 시작한다. 곳곳에서는 군인이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 아진은 어린 딸 해성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제주 4.3사건은 문학계와 대중문화에서 조심스레, 꾸준히, 치열하게 다뤄졌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의 ‘화산도’,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등. 여기 그 추념의 목록에 <한란>이 추가된 것이다. ‘제주 4.3’을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우리...

[위키드 포 굿] 125년 동안 오해 받은 서쪽마녀의 진실 (Wicked: For Good, 존 추 감독,2025)

 작년 11월 개봉되어 228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던 할리우드 뮤지컬영화 <위키드>의 속편 <위키드 포 굿>이 드디어 개봉되었다. 영화 <위키드>는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동명의 베스트셀러와 브로드웨이를 석권한 뮤지컬을 바탕으로 존 추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물론 맥과이어의 소설은 훨씬 오래 전 L.프랭크 바움의 아동문학 <오즈의 마법사>를 정치사회학적으로 비튼 패러디 소설이다. 그러니 쥬디 갤런드의 어린이날 특선영화는 결코 아닌 셈이다. 뮤지컬의 백미였던 ‘Defying Gravity’(중력을 벗어나)와 함께 스크린 밖으로 날아가 버린 엘파바가 속편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 ‘편견과 박해’로 가득한 세상에 복수의 비질을 할지 기대가 크다. 물론, 결론은 다 알지만 말이다.  <위키드>에서 출생의 비밀을 가진 초록이 엘파바(신시아 에리보)는 에메랄드 시티의 시즈대학교에서 타고난 인사 ‘갈’린다(아리아나 그란데)와 운명적인 룸메이트가 된다. 마법을 할 줄 아는 엘파바와 마법을 하고 싶은 갈린다. 인기가 너무 없는 엘파바와 인기가 너무 많은 갈린다는 우여곡절 끝에 우정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하지만 에메랄드 시티는 의뭉스러운 마법사가 지배하고 있고, 쉬즈 대학은 마담 모리블의 권위로 온 세상이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던 동물들이 내몰리며 엘파바는 편견과 차별에 맞서 분연히 빗자루를 타고, 중력을 거스르며 에메랄드를 벗어난다. 그리고, <위키드 포 굿>에서 그 빗자루를 타고 다시 에메랄드시티로 돌아와서 노란색 벽돌 길을 헤집으며 마법사와 모리블과 우매한 오즈의 시민과 격한 투쟁을 펼치게 된다. 착한 글린다는 우정과 권력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피예로와의 삼각관계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L. 프랭크 바움의 아동소설 <오즈의 마법사>(원제:The Wonderful Wizard of Oz)는 1900년 처음 ...

[국보] 무대 위의 두 사람 (国宝,Kokuhō 이상일 감독,2025)

우리나라의 ‘인간문화재’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 일본에는 '인간국보‘(人間国宝)가 있다. ‘가부키’계의 인간국보의 세계를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19일 개봉하는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이다. 영화 <국보>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이상일 감독은 <악인>, <분노>에 이어 세 번째로 요시다 슈이치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부키’에 대한 짧은 소개 자막이 나온다. 17세기 처음 등장한 가부키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풍속적인 이유로 여성의 출연을 금지했단다. 그 때문에 ‘온나가타’(女形)라는 여성을 연기하는 남성연기자가 등장한다. 우선은 ‘가부키’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알아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경극과 판소리처럼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일생을 걸고 ‘생과 사’를 노래하는 것이니 말이다.  1964년 일본 나가사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야쿠자 보스 타치바나의 저택에서 새해맞이 술자리가 펼쳐지고 있다. 손님이 북적대며 덕담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유명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가 찾아오며 일순 술렁거린다. 손님들의 여흥을 위해 타치바나의 어린 아들 키쿠오가 가부키 분장을 하고는 짧은 공연을 펼친다. 한지로가 ‘온나가타’로 분한 키쿠오의 실력에 놀라는 것도 잠시. 야쿠자 무리들이 난입하며 신년 축하연자리는 엉망이 된다. 아버지를 비극적으로 잃은 키쿠오는 이제 한지로의 집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가부키를 배우기 시작한다. 가부키의 길은 야쿠자의 길만큼 험난하다.  <국보>를 보면서 한국의 관객들은 가부키에 입문하게 된다. 노래와 연기를 잘한다고 가부키 배우가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가부키는 가문에서만 승계되는 비기(祕技)이다. 키쿠오는 곧바로 한자이의 아들 슌스케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동년배인 키쿠오와 슌스케는 함께 가부키를 배우지만 그들의 미래는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다. 야쿠자의 아들이 ...

[프레데터:죽음의 땅]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플래닛 (Dan Trachtenberg, Predator: Badlands)

 ‘프레데터’는 할리우드에서의 특이한 프랜차이즈 상품이다. 굉장한 우주 SAGA나 근사한 퓨쳐 스토리가 아닌 B급 정서의 크리처 장르물이다. 출발은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중앙아메리카 정글에서 외계생물체(프레데터=포식자)와 사투를 펼치는 평범한 액션물이었다. 이후 몇 편의 속편이 만들어졌고, ‘에일리언’과 크로스오버 작품까지 나온다. 그러더니 폭스사가 디즈니에 인수되면서 이야기는 빅뱅 급으로 확장된다.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공개된 <프레이>(22)와 애니메이션 <프레데터: 킬러 오브 킬러스>의 댄 트라첸버그 감독이 각 잡고 신작을 완성했다. 진화한 ‘프레데터 세상’은 흉측하게 생긴 그들이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 먼 우주에서 지구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최강의 생물체를 발견하여 죽이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가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게임의 법칙은 이렇게 심플하다.   <프레데터:죽음의 땅>은 프레데터의 행성, 야우차 프라임( Yautja Prime)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오직 강한 자만이 선택되고, 살아남는다. 형 콰이와 달리 동생 덱은 덩치도 작고, 싸움의 기술도 떨어진다. 아버지는 덱을 처치하라고 하지만 형은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자신이 희생되면서도 동생을 탈출시킨다. 그렇게 덱이 우주선에 실려 날아간 곳은 (지구가 아니라) ‘겐나’ 행성이다. 이곳에는 ‘칼리스크’라는 최상위 포식자가 있다. 덱은 칼리스크를 포획하여 야우차로 돌아가서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겐나 행성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한 생물체들이 넘쳐난다. 덱은 이 위험한 행성에서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티아’를 만나게 된다. 티아는 ‘웨이랜드-유타니 기업’의 행성탐사팀 소속 합성인조인간(synthetic)이다. 이제 덱과 티아는 함께 힘을 합쳐 칼리스크와 맞서고, 웨이랜드-유타니와 사투를 펼쳐야한다.   <프레데터:죽음의 땅>의 댄 트라첸버...

[난징사진관] 역사교육,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Dead To Rights, 南京照相舘, 신오 감독,2025)

중국 장쑤(江蘇)성 성도인 난징(南京)은 중국의 역사도시이다. 기원전에는 ‘오월동주’나 ‘와신상담’이라는 사자성어를 남겼고, 주원장이 명(明)을 세운 곳이며, 청나라가 서구열강으로 수모를 당하더니 아편전쟁의 결과 치욕적 조약을 맺은 곳이다. 태평천국의 홍수전이 반란의 깃발을 휘두른 곳이며,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끝까지 수호하려한 정치적 수도이다. 이곳은 중일전쟁 당시 최악의 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바로 '남경대학살'의 현장이다. 1937년 중일전쟁  일본군이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인 이곳을 점령하고, 난징과 그 주변으로 피신한 중국군 패잔병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약 6주간 중국인을 대규모로 학살한 사건이다. 바로 그 때의 이야기가 최근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난징사진관>이다. 그 때의 흐릿한 흑백사진들이 커다란 스크린으로 인화된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 6사단 군인들이 마침내 난징의 성벽을 뚫고 시내로 진입한다. 일본군은 이때부터 인류사상 가장 잔혹한 대학살극을 펼치기 시작한다. 우편배달부 류창은 시내를 빠져나갈 기회를 놓치고 만다. 집배원 유니폼을 입은 그는 일본군의 사살 대상이 된다. 허겁지겁 도망 다니다가 일본군 사이에 뛰어든다. 즉결처분 받기 직전, 그의 가방에서 쏟아진 우편물 중 사진관으로 배달되는 문건이 있었다. 일본군 사진병 이토 히데오는 그를 사진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고는 그에게 사진인화 작업을 맡기게 된다. 류창은 자신이 시내 ‘길상사진관’의 수습일꾼이라고 속이고는 사지에서 생을 도모하게 된다. 그 사진관 지하 비밀공간에는 사진관의 가족이 숨어있다. 이제 류창은 속성으로 사진인화 기술을 배우고 사진병이 건네주는 필름들을 인화하기 시작한다.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액에 담가  정지액을 넣고, 정착시킨 후 인화지에 현상시킨다. 그리고 드러나는 끔찍한 모습들. 살인, 광기, 학살의 순간들이다. 사진관 지하에 숨어있는 민간인, 살기 위해 일본군 밑에서 통역을 하고 부역하는 사람들, 그리고 몰래 숨어든...

[8번 출구] 라벨의 볼레로가 울려 퍼지는 기묘한 지하철.(카와무라 겐키 감독, Exit 8)

   똑같은 하루이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오늘도 선 채로 일터로 향한다. 모바일 쇼츠영상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이어폰으로 세상과 단절된 채로. 지하철에 어떤 사람들이 탔고, 지금 저 임산부석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이 없다. 지하철에 내려서 인파에 떠밀려 계단을 오른다. 전화가 온다. 일방적인 통보이다. 인파 속에서 주춤한다. 이쪽 방향인가 저쪽 방향인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한다. 어디가 잘못 되었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지하철을 잘못 탄 것인가, 6호선이 아닌가? 삼각지역을 통과했는가? 이어폰 때문에, 쇼츠 영상 때문에, 지하철에서 임산부석에 앉은 저 남자를 놓친 것인가. 다시 돌아간다. 이번엔 디지털미디어시티역이다. 그런데 6호선인가, 경의중앙선인가, 공항철도인가. 이 남자는 오늘도 헤맨다. 지난 달 개봉된 일본영화 <8번출구>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역사 안에서 무한루프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무슨 생각에 빠져, 어떤 사연으로 헤매는 것일까. 안내표지판을 보라. ‘8번출구’를 찾아야한다.   지난 달 개봉된 카와무라 겐키 감독의 일본영화 <8번출구>는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다. 게임은 리얼하면서도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리미널(liminal) 스페이스 게임이다. 일상에 익숙한 지하철 지하보도를 끝없이 걸어간다. 벽에 붙은 포스터, 안내표지판, 조명,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봐야한다. ‘다른 모습’이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니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야한다.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이다. 이 제한된 공간에서, 구분하기 힘든 배경에서, 몇 안 되는 등장인물로 영화를 만든다고? 탈출이 목표인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캐릭터의 고뇌와 일본인의 집단의식을 녹여낸다고? 영화 <8번출구>는 그 어려운 미션을 하는 작품이다. 관객은 라벨의 ‘볼레로’ 음악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다른 승객을 무시하고, 자신이 내...

[부고니아] 이들은 과연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Bugonia, 2025)

잠시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잊어보자. 개봉 당시 ‘7만 명’ 정도가 극장에서 봤다는 그 영화 말이다. 개봉 당시나 그 이후 이 영화는 호불호가 갈렸고 여러 차례 재조명과 재평가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 마침내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되었다. 그리스 출신의 작가주의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할리우드의 반짝이는 선구안의 명배우 엠마 스톤을 통해. CJ도 못 지킨 지구와 흥행 전선을 이들이 지켜낼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미국 어느 동네. 사촌지간인 테디(제시 플레먼스)와 돈(에이단 델비스)은  양봉을 하고 있지만 사는 게 팍팍하다. 꿀벌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똑똑한 테디는 자폐증세가 있는 돈에게 이런 현상에 대해 사회과학적이며 범우주적인 설명을 해준다. 거대 바이오기업의 환경파괴로 인한 ‘군집붕괴현상’에는 일반인은 결코 캐치 못할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외계인들이 지구인에게 생체실험을 하고 있으며, 곧 그들의 모선이 지구를 침공할 것이란다. 테디는 이 지구적 위기에 맞서 바이오기업의 CEO인 미셀(엠마 스톤)을 납치한다. 테디는 미셀이 지구침공의 전초기지에 지구인의 탈을 선 채 암약 중인 안드로메다 항성의 외계인이라고 굳게 믿는다. 미치광이에 얼치기 지구방위전사에게 납치된 미셀은 이제 두 손, 두 발이 꽁꽁 묶인 채 이들을 상대로 논리적, 이성적, 과학적 설득과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쳐야한다. 살기 위해, 혹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우선 제목으로 쓰인 ‘부고니아’는 낯설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고, ‘황소’(boûs)와 ‘자손’(gonḗ)이 합쳐진 말이란다. 위키피디아 설명에 따르자며 고대부터 지중해 지역에서는 ‘벌’의 생성에 대해 어떤 믿음이 있었단다. 소의 사체에서 벌이 생겨난다는 믿음이다. 마치 똥에서 파리가 생기듯이. 물론, 비과학적인 생물학 탐구이다. 그리스 출신의 란티모스 감독은 ‘양봉업자’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기가 막힌 영화제목을 탄생시킨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를 모른다면 이...

[타타르인의 사막] 군인은 요새에서 죽는다 (발레리오 추를리니 감독, The Desert of the Tartars, 1976)

지난 주, 정말 아주 적은 극장에서 제한적으로 개봉된 영화가 한 편 있다. 1976년 이탈리아 영화 <타타르인의 사막>이란 작품이다. 감독은 발레리오 추를리니. 영화 제목도 감독 이름도 처음 들어볼 만큼 낯선 작품이다. 50년이나 된 작품이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이라는 아름다운 기술적 성과로 지금,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디노 부차티라는 이탈리아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 작품이다. 소설은 1940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1940년의 이탈리아를 상상해 보라. 무솔리니의 파시즘 광기가 이태리 반도를 휩쓸 때이다. 아마 소설과 영화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때 작가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는지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영화는 148분으로 꽤 길다. 이탈리아 말이 나오지만, 영화 속 배경은 이탈리아가 아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 왕이 통치하는 나라이다. 이야기는 1907년 시점에서 시작된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조반니 바티스타 드로고(자크 패랭)는 첫 부임지로 떠나고 있다. 엄마의 포옹, 연인의 키스, 그리고 절친의 배웅을 받으며 말을 타고 사흘을 달려간다. 유럽풍 중세도시를 벗어나 그가 도착한 곳은 황량한 사막이다. 저 멀리 요새가 보인다. 그는 국경에 위치한 바스티아니 요새에 신임장교로 파견된 것이다. 그를 맞이하는 제국장교들은 격식을 차려 그를 맞이한다. 드로고는 이곳에서 이제 국가와 민족, 국왕의 영광을 위해 군 복무에 임한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바스티아니 요새는 그에게 엄청난 중압감을 안겨준다. 요새에서 내려다보는 사막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령관과 선임 장교들이 들려주는 요새의 임무는 오리무중 그 자체이다. 오래 전 저 사막 너머 타타르족이 쳐들어왔었다고. 또 언제 침입할지 모를 그들을 막기 위해 이곳에 요새가 세워졌다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적의 침공은 없다. 장교들은 격식을 차려 상황을 지켜보고, 군사들은 훈련을 거듭한다. 소위가 중위가 되고, 중위가 대위가 되고, ...

[퍼스트 라이드’ 어쩌면 새드 엔딩 “우리 다음에 태국 여행가자” (남대중 감독, The First Ride, 2025)

 강하늘 정소민의 ‘사랑과 이혼’ 전쟁을 코믹하게 그린 <30일>로 예상 밖의 흥행성공을 거둔 남대중 감독이 다시 한 번 예상 밖의 흥행공식으로 신작을 내놓았다. 강하늘, 김영광, 차은우, 강영석, 한선화가 코미디연기 각축전을 펼치는 <퍼스트 라이드>이다.   <퍼스트 라이드>는 그 시절 그 교실에 항상 꼭 있는 네 친구들의 잔혹하리만큼 아름다운 우정극이다. 물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요, 멀리서 보면 비극인 그런 드라마이다. 공부 잘하는 태정(강하늘), 뮤지션을 꿈꾸는 연민(차은우), 운동선수의 꿈을 포기한 도진(김영광), 그리고 종교적 자유를 만끽하는 금복(강영석)이다. 이 넷이 함께 어울리면 무서울 게, 꿀릴 게 전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을 앞두고 이들은 특별한 여행계획을 세운다. 태국 송크란 축제의 명DJ쇼를 직관하는 것이 꿈인 연민을 위하여 생애 처음으로 넷이서 해외여행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네 청춘의 꿈은 잠시 접어야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훌쩍 흐른 뒤, 도진은 친구들을 다시 불러 모아 그 때 못 이룬 태국여행에 나선다. 꿈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꿈이 된다. 악몽! 이 작품은 이병헌 감독의 <스물>을 따라가는 줄 알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남대중 감독 특유의 스타일임을 알게 된다. 학생시절의 치기와 청춘의 열정, 그리고 자연스레 나이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달라붙은 삶의 무게가 처연하게 삐져나오는 작품이다. 학생시절은 꿈이 많거나, 미래가 불안하거나, 현실이 만만하다. 그래서 용기백배 직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절은 짧고, 추억은 아름다울지 모르나 가슴 한편에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각자 세월의 풍파를 잘 이겨내고, 사회로 나갔지만 아직 알을 깨지 못한 친구가 있음을 안다. 이제 그 알을 깨기 위한, 삶을 지속하기 위한 ‘바보 짓’이 시작되는 것이다.  <퍼스트 라이드>에서는 고등학생 시절이나 20년의 세월...

[세계의 주인] 사과는 강요하는 게 아냐, 이 영화가 좋다는 것도.. (윤가은 감독, The World of Love, 2025)

 영화 ‘세계의 주인’은 열여덟 여고생 ‘이주인’의 삶을 따라가는 영화이다. 지구, 대한민국, 그리고 어느 도시의 한 고등학교와 집을 오가는 특별할 것 없는 주인의 세상이다. 정말 특별할 것이 ‘1’도 없는 세상이지만, 영화가 끝나갈 무렵이면 이 세상의, 이 세계의 주인이 누구란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된다. 폭발력 만랩의 영화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남녀공학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과 여학생의 키스 장면을 보여준다. 마치 입술을 뜯어먹기라도 하듯이 열정적이다. 하지만 이내 여학생이 “여기서 그만!”한다. ‘이주인’이다. 이주인(서수빈)은 그렇게 연애도 열심이지만, 선을 지키는 것 같다. 그래서 남친이 자주 바뀐다. 주인의 학교생활은 명랑, 쾌활, 활발, 엉뚱 그 자체이다. 진학상담을 하는 담임 선생님(이상희)이 건네는 사과를 보더니 갑자기 중증 알레르기 환자처럼 숨을 몰아쉬며 사람을 놀래더니 천연덕스럽게 “이제부터 사과를 좋아해볼까요?”란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인의 가족.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학교에서처럼 행복이 넘쳐난다. 엄마와는 스스럼없이 남친 문제를 이야기하고, 어린 동생은 수가 훤히 보이는 마술 연습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주인의 텐션이 이상하게 높다. 뭔가 불안정하고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것 같다. 엄마 문제일 수도 있고, 동생 문제일 수도 있고, 아빠 문제일 수도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폭발한다. 흔한 모범생 반장이 서명을 해달란다. 몇 년 전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아동 성폭력범이 출소해서 돌아온다고. 반대서명을 받고 있단다. 그런데 언제나 모든 일에 열심이던 주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관심 없어!”라고. 이내 목소리가 커진다. 반장은 “이건 우리의 문제야, 너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그러면서 이제 꽁꽁 닫아두었던, 주인의 어두운 세계가 쏟아진다. 관객은 그제야 주인의 말과 행동과, 종잡을 수 없었던 발랄함을 이해하게 된다. 아.주.충.격.적.으.로. ● “아프냐?” ...

[스포일리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세형 감독, Planet Spoilia, 2025) [MSFF 리뷰]

  제21회 미쟝센단편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모두 65편의 반짝이는 단편이 상영되었다. 이세형 감독의 <스포일리아>는 [기담]섹션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스포일리아’를 스포일러한다. 진리가 궁금하면 귀를 막을 지어라! 이세형 감독의 <스포일리아>는 클레이애니메이션과 실사를 결합한 29분 길이의 단편영화이다. 미쟝센 출품 독립단편영화이니 할리우드 스타일의 블록버스터를 기대하진 말아라. 심형래나 백승기, 에드 우드를 생각해야한다. 망망대해 같은 대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이 있다. 그 우주선 안은 황당할 정도로 엉성하고, 조잡하고, 올드하다. 두 우주인 ‘김’과 ‘박’은 그 우주선을 타고 무려 500년 동안 정처 없이 우주를 탐사하고 있단다. 워프 항법이나 동면장치, AI 로봇 같은 것은 없다. 어느 날 그들 눈앞에 커다란 행성이 나타난다. 착륙하고 나니 놀라운 화면이 펼쳐진다. 화성처럼 붉은 행성. 마치 사람의 ‘창자’ 같기도 하다. ‘뇌’란다. 뇌행성에 착륙한 ‘김’과 ‘박’, 두 우주인은 자신의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 외계인과 마주친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이유는? 뇌행성의 붉은 돌기를 하나 밟자, 그 돌기는 ‘입술’ 형태로 진화(변)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입술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 우주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광활한 우주공간에 다른 존재가 없을까?’, ‘왜 공산주의는 망하고, 자본주의는 탐욕적일까?’, ‘왜 트럼프는 저럴까?’(이 질문은 없다!) 식으로. 무려 500년 동안 좁은 우주선 안에서 수도 없이 나눈 대화, 여러 번 했던 생각,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다. 여러 번 질문하고, 토론하고, 추론하고, 반박하며, 애타게 답을 찾았을 그 두 우주인에게 ‘선지자’가 나타난 것이다. ‘우주창조의 순간부터 모든 것을 듣고, 보고, 생각하고, 추론한 우주의 모든 비밀’. 지구인은 외계의 선지자에게서 명쾌한 답을 기꺼이 들을까? 그 별의 이름은 ‘스포일리아’이다. 답을 알려주는 행성이다. 궁금증 대마왕 인간에게...

[굿뉴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말해 봐! (넷플릭스, 변성현 감독, Good News,2025)

이 영화가 조금 일찍 공개되었다면, 아마 내년 봄 열릴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부문) 한국대표로 ‘어쩔수가없다’와 각축을 펼쳤을 것 같다. ‘굿뉴스’에는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옹골차게 들어차있다. ‘불한당’으로 언젠간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변성현 감독이 마침내 ‘굿뉴스’에서 폭발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지난 17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굿뉴스>는 실제 발생한 사건을 모티브로 극화한 것이다. 프랑스를 휩쓴 68학생운동은 일본에 적군파를 탄생시켰고,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는 일단의 몽상가들은 직접 행동에 나선다. 1970년 3월 31일,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신좌파 일당은 여객기(JAL 요도호)를 하이재킹한다. 그들은 조종석으로 달려가서는 다짜고짜 평양으로 날아갈 것을 명령한다. ‘북조선’이 그들의 혁명의 전진기지로 삼기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비행기는 (일본)국내선이었고, 당시 북한과는 수교는 고사하고 북한으로 가는 비행길도 모른다. (관제를 해야 하는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게다가 그 사이에는 ‘한국’이라는 절대변수가 있었다. 변성현 감독은 이 난해하고도 난감한 국제적 난기류를 어떻게 헤쳐 나갈까. 흥미진진하다. 한반도로 기수를 돌린 비행기. 그들에겐 항로도 없고, 관제사의 지시도 없다. 이 긴박한 상황에 중앙정보부에서는 신박한 작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중정부장 박상현(설경구)의 장자방인 ‘아무개’(설경구)가 기상천외한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선은 실력 있는 공군 관제사 서고명 중위(홍경)로 하여금 비행기 무선통신을 인터셉트하여 기수를 휴전선 쪽으로 돌린다. 그들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이 비행기를 김포공항에 착륙시키는 것이다. 그곳이 평양공항이라고 속이고. 어떻게? 세상 속이는 것이 본업(!)인 트릭의 대가 ‘영화감독’(윤경호)을 데려와서 지상최대의 쇼를 연출하는 것이다. 평양공항이 된 김포공항에는 북한인민군과 한복차림의 인민으로 분장한 엑스트라가 대거 동원된다. 이제 비행기에 탄 납치범 일당들이 속아...

[엔터티’] '고독녀'가 곤욕을 치릅니다, '메타버스'에서~"(정휘빈 감독, Entity,2025) [MSFF리뷰]

  지난 주 4년 만에 다시 열린 미쟝센단편영화제(MSFF)에서는 모두 65편의 단편영화가 상영되었다. 미쟝센영화제는 한국의 대표적 장르영화를 따와서 출품작들의 섹션을 나눈다.  [품행제로], [질투는 나의 힘], [기담], [고양이를 부탁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식이다. ‘공포와 판타지’ 장르라면 [기담]에 묶인다. 정휘빈 감독의 신작 <엔터티>가 그러하다. 애니메이션이다. 정휘빈 감독은 <민서와 할아버지>(20), <도나 표류기>(22) 등의 작품으로 이쪽에서는 조금 알려진 감독이다. <엔터티>는 작년 BIFAN 상영을 포함하여 국내외 영화제를 통해 입소문을 탄 작품이다.   서태지 스타일의 젊은이들이 가득한 1990년대 풍의 전자오락실(아케이드) ‘오렌지센츄리’. 누군가 VIP공간으로 입장하는데 패스는 특별한 ‘시가’이다. 이곳은 메타버스 공간. 그리고 어느 ‘리앨리티’ 건물에서는 주인공 김영이 어수선한 자기만의 공간에서 전자기기 수리 일을 하고 있다. 건물 안팎으로 ‘안전깨비’드론이 돌아다니며 시큐리티를 담당하고 있다. 김영은 고객의 클레임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배송사고가 나고, 층간소음으로 집중할 수가 없다. 요망스러운 디지털기기는 오작동을 계속하고. 사이트에 접속했더니 [소셜포인트]가 부족하다는 알람이 뜬다. 불법적으로 충전을 시도해야하는데 쉽지가 않다. 층간소음은 계속되고 응징에 나섰다가 못 볼 것을 보고 만다. 이제부터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한다. 도망자의 시간이다.  정휘빈 감독은 이 작품에 대해 “친근한 말투와 멋진 외모로 감시와 통제를 포장하는 미래사회에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자유로웠던 90년대를 그리워하며 모두가 메타버스로 떠난 2050년의 적막한 서울, 안전한 사회시스템의 완성이 야기한 모순 한 가운데로 주인공을 던져 넣으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 했다.”고 밝혔다.   실제 <엔터티>에서 보여주는 미래상...

[갤로퍼] 갤로퍼를 모는 시골 파출소장의 마지막 추적극 (오한울 감독,Galloper,2024) [MSFF리뷰]

  미쟝센단편영화제’가 돌아왔다. 박찬욱, 봉준호의 뒤를 이을 야심을 가진 영화새싹들의 등용문인 미장센영화제는 코로나를 거치며 중단되었다가 4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올해에도 [고양이를 부탁해](사회적관점), [질투는 나의 힘](멜로로맨스), [품행제로](코미디), [기담](호러판타지), [인정사정 볼것없다](액션) 등 분류부터 취향이 확실한 섹션에서 모두 65편의 재기발랄한 작품이 상영되었다. 확실히 내일의 한국영화를 이끌어갈 잉어들이 펄떡거렸다.  오한울 감독의 [갤로퍼]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섹션에서 ‘고라니’(심운용 감독), ‘나쁜피’(송현범 감독), ‘아주 먼 곳’(오은영 감독)과 함께 묶여 '인정사정 볼 것없다'(2)에서 상영되었다. ‘갤로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자동차 모델이다. 현대(현대정공!)에서 1991년 세상에 첫선을 보인 갤로퍼는 쌍용의 코란도와 함께 4WD SUV로 이름을 떨쳤다. 이 차는 2003년 단종되었지만 지금도 아주 가끔 도로에서 만난다. 단편영화 [갤로퍼]는 그 차만큼 인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차를 타고 한 두어 시간 달리면 만나는 지방 소도시. 이 조용한 시골마을 파출소장(기주봉)의 마음은 싱숭생숭하다. 30년 몸담은 경찰 생활의 마지막 날이다. 자리도 정리하고, 수갑 등도 반납하고, 짐도 치우고, 마음도 비운다. 하지만 오랫동안 탄 차가 마음에 걸린다. 경찰 초년 시절부터 이 갤로퍼를 타고 도내 어디든지 달리며 범인을 잡았을 것이다. 폐차 처리를 하려고 업자를 불렀지만 그 차에 대한 예의가 없어 보인다. 속상해서 돌려보낸다. 파출소 사람과 작별인사를 하고, 덜덜거리는 갤로퍼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그의 차 앞으로 ‘레이’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따라잡으려 했지만 차가 멈춰 선다. 도내에 은행강도 사건이 계속 일어났기에 경찰의 촉이 살아난다. 차를 겨우 수습하고는 30년, 갤로퍼와 함께한 경찰 노하우를 활용, 사방팔방 시골길을 꿰차고 있는 그는 레이의 예상 도주로를 파악, ...

[포섭] “국정원입니다, 작전 중입니다. 협조바랍니다” (김건우 감독,The Cheat,2025 ) [MSFF리뷰]

   ‘미쟝센단편영화제’가 4년 만에 부활했다. 극장가는 어렵지만 영화인들은 계속 전진한다. 올해(21회)에는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모두 65편의 재기발랄한 단편들이 상영되었다.  김건우 감독의 [포섭]은 신유석 감독의 ‘건투’, 조바른 감독의 ‘층’과 함께 [인정사정 볼것없다](1)섹션에서 상영된 24분짜리 단편영화이다. 영화는 커피숍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설득-협박-포섭'의 현장드라마이다. 과연 어떻게 이 자를 속여,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긴장하라! 서울에 멀리 떨어진 지방의 대기업 공장에서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는 도영(이학주). 카페에서 곧 결혼할 예정인 연인을 기다리고 있다. 테이블에는 예식장 카탈로그가 놓여있다. 그런데 커피숍에 빈자리가 없어서라며 한 남자가 앞 의자에 앉는다. 자연스럽게. 그리고는 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같은 학교 법대 선배였고, 공무원이란다. 막힘없이 술술 캠퍼스 이야기, 회사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소리를 낮추며 중요한 이야기를 건넨다. “사실, 난 국정원 사람이고, 지금 산업스파이를 조사 중”이란다. 그러면서 사진 하나를 보여주며 ‘이 여자가 노조원인데, 너희 회사 기밀서류를 빼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도영은 놀란다. 곧 자신과 결혼할 여자였다. 이제 이 남자의 말을 믿어야할지, 이 여자와 헤어져야할지 머리가 복잡해진다.    "두 번 똑딱 누르면, 녹음이 됩니다~" 포섭 (김건우 감독) 이학주는 서울이 아니라 지방에서 몇 년째 근무하고 있는 순둥이 회사원을 연기한다. 너무나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 ‘국정원 요원’의 말이기에 믿지 않을 수가 없다. 회사 법무팀 관리직 사원으로서 ‘산업스파이’ 건은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이미 ‘국정원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자신의 뒷조사도 충분히 한 것 같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 법대를 나온, 법무팀 관리직 사원은 조마조마하다. ’국정원‘ 요원을 연기한 임호준 배우는 꽤 많은 단편영화, 독립영화에 출연했...

[마작] 臺灣人, 너와 나의 패를 모르겠다. 내일을 모르겠다 (양덕창 감독, Mahjong, 1996)

 후효현과 함께 대만의 거장급 영화감독 양덕창(楊德昌,양더창/에드워드 양)의 영화 <마작>(麻將,1996)이 다시 한 번 한국 극장에서 공개된다. 이미 영화제 등 몇 차례 기회를 통해 공개되었던 작품으로 이번에도 양덕창 회고전의 일환으로 극장(메가박스)에 내걸린다. <마작>은 <독립시대>, <하나 그리고 둘>과 함께 양덕창의 이른바 ‘신(新) 타이베이 3부작’으로 불린다. <마작>은 양 감독의 다른 작품이 그러하듯이 흔들리는, 위태로운, 방향감각을 상실한 섬나라 대만 사람들의 불안정한 삶의 이야기한다. 이번에는 하릴없이 인생을 낭비하는 젊은이들이 주인공들이다. 불한당이며, 한량이며, 꿈이 없는 존재들이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악동 4인방은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불린다. 금붕어(紅魚), 룬룬(綸綸), 치약(牙膏), 홍콩(香港)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대만의 한 갑부의 아들이 납치되었고, 거액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는 자막이 뜬다. <마작>은 그렇게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범죄에 빠져드는 이야기이다.   네 친구들은 ‘하드락’ 카페에서 프랑스 여자 ‘마르타’(Marthe)를 처음 보게 된다. 마르타는 남친 마커스를 찾아 대만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마커스 곁에게는 이미 딴 여자가 있다. 네 친구는 마르타를 집으로 데려온다. 속셈이 있다. 자기들의 노리갯감이자, 콜걸로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일당 중 유일하게 영어를 그럭저럭 하는 룬룬이 마르타를 불쌍하게 여긴다.  함께 어울려 다니며 못된 짓을 하는 네 친구에게는 각자 그럴듯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금붕어’의 아버지는 여자문제로 사업을 말아먹고는 사채 때문에 도망 다니는 실정이다. ‘홍콩’은 반반한 얼굴로 여자들을 유혹하여 일당의 노리개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치약’은 ‘작은 부처’라 속이며 풍수지리를 들먹이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그...

[트론:아레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29분 동안... (요아킴 뢰닝 감독, Tron: Ares,2025)

  진화하는 컴퓨터, 생각하는 프로그램을 다룬 영화 <트론:아레스>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1982년 미국에서 개봉된 <트론>의 세 번째 작품이다. 43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컴퓨터는 엄청나게 고사양이 되었고, 인공지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화했다. <트론:아레스>는 할리우드가 그리는 그런 놀라운 미래, 아니 현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트론:아레스>를 보기 전에 전작들을 잠깐 소개하면 이런 내용이다. 1982년에 나온 <트론>에서는 천재 프로그래머 케빈 플린이 등장한다. 엔콤이란 게임(비디오게임) 회사에서 ‘파라노이드’ 같은 엄청난 아케이드 게임을 개발했지만 사악한 에드 딜린저에게 빼앗기고 회사에서도 쫓겨난다. 플린은 딜린저의 표절을 밝혀내기 위해 회사 서버를 해킹하다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그 곳(그리드)에서 게임 캐릭터가 되어 맹활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2010년 나온 속편 <트론:레기시>에서는 게임 속으로 사라진 아버지 플린을 찾기 위해 그리드로 뛰어든 아들 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트론’의 전체적인 이야기의 배경은 현실 속 게임회사의 뛰어난 프로그래머가 자신들이 창조한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플레이어로 뛴다는 것이다. 어떻게? 영화 <플라이>에서 보여준 것처럼 하면 된다. 특수한 레이저를 쬐면 분해된다. 컴퓨터가 그 분자들을 재배열하면 공간 내 이동이 가능해진다. 그렇단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2017)와  '말레피센트2'(2019)를 감독했던 노르웨이 출신의 요아킴 뢴닝이 감독한 <트론:아레스>에서는 케빈 플린과 에드 딜린저의 손자뻘 세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분명 컴퓨터와 A.I.는 진화를 거듭했을 것이다. 문제는 관객의 기대를 얼마만큼 충족시켜주는 것이리라. A.I.가 진화하여 인간을 잡아먹든지, 아니면 인간보다 더 철학적인 존재로 복음을 전하든지. 눈 덮인 알래스카의 산꼭대기의 한 비밀...

[사람과 고기]’ 커피 말고 밥, 그리고 소고기뭇국 (양종현 감독, People and Meat,2025)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줍는 노인의 이야기.  고깃집에서 무전취식하는 세 노인의 이야기.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노인들의 말로.  지난 7일 개봉된 영화 <노인과 고기>의 주된 내용이다. 요즘 같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글로벌하게 어려운 시기에 누가 이런 영화를 굳이 돈 내고 볼 것인가. 어쩌면 자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는 이 서글픈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영화는 한 줄 줄거리 너머,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은 고기를 먹어야 산다”일지라도. 길을 걷다보면 나이 드신 어르신네, ‘노인네’가 힘겹게 리어카나 바퀴달린 바구니를 끌며 휴지, 폐지를 모으는 것을 볼 수 있다. 택배박스, 신문, 버린 책들. 이런 걸 모아 고물상에 가져가면 킬로그램 단위도 폐지 값을 받는다. 그야말로 푼돈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 땀과 노동력에 대한 가치, 신발 밑창 닳는 것에 대한 기회비용이 안타까울 것이다. 하지만 노인네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묵묵히 리어카를 끈다. 골목에서도, 언덕길에서도, 인도에서도, 차도에서도. 다른 사람, 운전자는 안중에도 없다. 단지 다른 누군가가 먼저 폐지를 주워가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한국이다.  우식(장용)과 형준(박근형)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항상 오는 그 길에 놓인 폐지를 누가 줍느냐로 말다툼을 하고 몸싸움을 한다. 그 싸움이 벌어지는 코앞에서 화진(예수정)은 좌판을 펼치고 채소를 팔고 있다. 이제 이 세 노인네가 푼돈을 벌고, 겨우 먹고사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달프다. 한국이다. 첫 만남에의 언짢은 추억은 뒤로 하고 이들은 곧 함께 어울리게 된다. 맨날 지나가는 길목, 보아온 처지이니. 형준의 오래된, 낡은, 하지만 괜찮은 집이 그들의 사랑방이 된다. 오랜만에 소고기뭇국을 먹으며 이들은 새로운 삶의 재미를 찾기 시작한다. 우식이 말을 꺼낸다. “우리 고기 먹은 지 오래된 것 같아. 고기 먹자!”고. 그들은 ...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핵 발사 > 요격 실패 > 다음은? (House of Dynamite 넷플릭스, 캐스린 비글로 감독)

  ★ 스포일러 주의: 영화내용이 상세히 소개됩니다 ★  1964년 미국에서는 두 편의 종말론적 핵 드라마가 공개되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미 공군전략사령관이 핵폭탄을 실은 B52를 발진시키면서 미소 강대국의 치킨 게임이 펼쳐진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페일 세이프>에서는 미확인물체가 미국 영공에 나타나고 핵전략폭격기를 출격시키면서 벌어지는 끔찍한 ‘눈에는 눈’ 비극이 그려진다. 이들 영화는 핵으로 무장한 새로운 전쟁의 확전 과정을 보여준다. 실수든, 오판이든, 장난이든, 착각이든 저쪽으로부터 핵 미사일이 날아온다는 빨간 등이 켜졌을 때 우리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하나. 여러 가지 기술적 안전장치가 있겠지만 이젠 ‘무선방해’나 ‘페이크 정보’까지 고려해야한다. 날아가는 미사일을 자폭시키기도, 전폭기의 회항을 명령하기도 어려운 상황일 경우 미국과 소련은 (그리고 중국, 북한까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모스크바가 날아가고, 평양이 사라져도 그들은 가만 있을까? (미국은? 한국은?) 대통령이 NSC를 소집하고 국회 의결을 거칠 시간적 여유가 없다. 10분이면 버섯구름이 피어오를 상황이다. 그 끔찍한 상상력을 2025년 다시 펼친다. 넷플릭스글로벌 OTT 서비스. 1997년 미국에서 시작됨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이다. 냉전시대 미소 양국은 궤멸적 핵미사일 레이스를 이어오다가 데탕트를 맞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또 다시 핵 전력이 기승을 부린다. 작금의 세계정세를 알려주는 간단히 자막이 흐른 뒤 평화로운 미국의 일상이 시작된다. 알래스카의 그릴리 기지의 미군들은 극동 지역에서 미상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발사된 것을 탐지한다. 처음에는 북한의 ‘일상적’ 미사일 발사실험으로 생각했지만 이내 곳곳의 탐지시설부터 위험 시그널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백악관 상황실의 올리비아 워커 대위도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미사일 궤적은 곧 밝혀진다. 18분 뒤에는 시카고로 떨어지는 것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