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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사람의 아들

한국영화리뷰

by 내이름은★박재환 2008. 3. 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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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d by 박재환 2007-6-1] [밀양]은 소설가 출신의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 [벌레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것이다.

  소설가 이청준은 문학가로서도 톱클래스 작가일뿐더러 한국 영화판에서도 꽤 대접받는 작가이다. 오래 전 [이어도]가 있었고 최근엔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이 바로 그가 쓴 소설이 바탕이다. 원작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았기 때문인지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든 느낌은 이 영화는 ‘문학적인 영화’임에 분명한데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빌려 온 남의 옷에 그럴싸한 장식을 단 것 같은 부조화, 비록 화려한 옷의 어떤 비밀을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뿌린 흙탕물 자국을 바라다보는 것 같은 불편함들. 도서관에서 이청준 원작 소설을 찾기 시작했다. 원작은 지난 1985년 계간지 <<외국문학>>에 처음 발표된 뒤 이후 그의 소설 선에 포함되었다. 궁금한 마음에 소설을 한달음에 읽었다.

  영화에서 ‘밀양’은 이창동 감독이나 송강호에겐 고향 같은 느낌의 마을로 받아들여진다. 특히나 송강호의 사투리까지 생각한다면 홈그라운드에서 찍은 셈이다. 개봉 전부터 ‘밀양’은 한자 ‘密陽’이나 영문 ‘Secret Sunshine’이 강조되면서 어떤 비밀스런 소도시로 홍보되었다. 그 영향인지 영화 시작되면서 작은 착각에 빠졌다. 현 정권 출범의 공신이자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이창동 감독이 정치외도를 끝내고 복귀한 작품이라는 선입견에, 송강호가 영화 초반부 밀양에 갓 도착한 전도연에게 밀양이라는 곳을 소개하면서 이런 대사를 던진다. “뭐. 여기는 한나라당 도시이고......” 남들은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지...”라는 상투적인 대사에 초점을 맞출 때 난 이상한 생각을 한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밀양에서 ‘밀양’이라는 제목으로 뭔가 비밀스런 신작을 찍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 때 하필이면 이 동네에서 꽤나 추잡스런 뉴스가 터져 나왔었다. 10대 집단 성폭행 이런 내용이었는데 한동안 인터넷 댓글에서는 이 동네 국회의원 이름까지 거론되며 꽤나 허무맹랑한 소문이 나돌았다. 어쨌든 ‘보수꼴통’ 마을의 집단히스테리를 다룬 휴먼드라마쯤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한 것이다. 감독보다 평자가 더 정치적인 경우이리라.

  결국 ‘밀양’은 비밀스런 소도시가 아니라 특징 없는, 대한민국의 소도시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 이야기의 충격적 재연 드라마로 완성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전도연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굳이 밀양까지 흘러올 뚜렷한 이유는 없다. 차라리 익명의 보호를 받으려면 서울 주변부의 한 도시의 연립주택의 작은 반지하 방이 더 리얼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웅변학원에 보낸 아들이 유괴되고 시체로 발견되면서 전도연의 시련은 시작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절망이며 인간의 신에 대한 저주가 시작된다. 그런 구조가 이 영화의 기둥인 셈이다.

  오래 전 줄거리만 보았던 미국 소설이 한 편 떠오른다. 미국에서 실제 벌어진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한 평화로운 마을. 초등학교 통학버스. 아이들은 자기 자리에 가만 앉아있질 못하고 장난치고 떠들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조잘대고 있었을 것이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산들바람이 버스 차장을 부드럽게 어루만질 때 운전사는 언제나처럼 조심스럽게,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핸들을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앞으로 뭔가가 튀어나왔고 운전사는 급하게 핸들을 돌리지만 차는 전복되고 많은 학생들이 죽거나 다친다. 평화롭던 미국의 한 전형적인 소도시에 비극은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것이다. 갑작스레 사랑하는 아들, 딸을 잃은 부모들은 절망에 빠지고 사람을 미워하고 신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운전사는 자신의 과오라기보다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만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슬픔에 겨운 마을 사람은 결국 희생양을 뒤지게 되고 원한의 해결책을 찾기 시작한다. 도로 표지판이 잘못되었든, 차량 점검이 문제였든 무언가 납득할만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사고의 원인을 찾다 결국 운전사를 법정에 세운다. 심적 괴로움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운전사는 그런 과정을 분연히 받아들이고 결국 법정에서 ‘살아남은 자’에 대한 판결이 주어지는 것이다. 불가항력적, 혹은 예상 밖의 사태에 대해 어떤 이성적인 판단이 부여되고. 동질감의 사람들이 이런 절차적 과정을 통해 위안과 안식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 [밀양]에서 아들을 잃은 어미는 그 어떠한 이성적 선택이나 법률적 구제, 종교적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선택을 받거나, 선택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혹은 용서를 하거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들이 유괴될 때 자신은 그 시간에 노래방에 있었다. 화장터 씬에서 보여주듯 시댁의 가시 돋친 힐난을 통해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줄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돈 없음을 숨기기 위해 떠벌린 거짓말의 대가는 혹독하고 치명적인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사건은 신속하게 해결된다. 범인은 잡히고 감옥에 가고 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전도연은 약사의 권유에 따라 교회를 가게 되고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자신은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졌지만 신의 가호로 평안을 얻고 유괴범을 용서할 만큼 평정심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영화와 소설에서는 여기서 조금의 차이지만 큰 차이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은 신심을 얻었고, 평안심을 갖게 되었고 아들을 죽인 잔인한 유괴범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 줄 충분한 마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아마도 감옥 속 그 범인과의 어떤 대화를 통해 죄와 벌, 그리고 구원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자로 여겼던 사람에게서 오히려 용서를 구하리라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을 때 아들 잃은 여인네가 받았을 충격은 가히 짐작이 간다. 소설의 힘이 영상의 힘보다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가 가끔 있는데 이게 그런 경우 같다. 비록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 출신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난관을 겪은 ‘사람의 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가장 인간적이리라.

  이창동 감독은 밀양의 ‘밀’을 ‘비밀’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밀양에서는 그것보단 ‘빽빽한 볕’으로 이해되고 있단다. 소설가 이청준이나 이창동 감독은 이 작품이 광주의 아픔과 그 용서 차원에서 구상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용서와 구원의 주체’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과 신이 서로의 영역에서 가지는 커다란 결정권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끔찍한 문제제기라 아니할 수 없다. (박재환  200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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