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2000.1.29.) 영화가 웬만큼 웃겨야지. 배를 잡고 깔깔대더니 아예 허리를 부여잡고 뒹굴기 시작할 지경이다. 웬만한 코미디 영화에는 도대체 참을 줄 모르는 평자는 이 영화를 보노라가 급살할 뻔했다. 굉장히 웃긴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마, 20년 전 <브루스 브러더스> 이후 이런 이런 통쾌무비를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인 듯. 그럼, 웃을 준비하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극장 로비에서 송강호를 보았다. 여전히 스타답지 않은 헤어스타일에, 전혀 멋없는 모습으로 관객의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이 아저씨.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올까. <쉬리>에서는 PPL로 치장하는 바람에 무척이나 어설프게 보인 에이전트였었는데 관객들은 여전히 그에게서 불사파 두목의 '초라한'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그럼 관객의 배신을 '때리는지 안 때리는지' 한번 보자. 자리에 앉았다.
감독 김지운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 되세요"라고 인사했다. 이어 송강호에게 넘어간 마이크가 부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스피커가 찢어질듯 했다. (서울 시내 모 극장의 열악한 스피커 --;) 그래서 송강호는 본의 아니게 맨 소리로 "재미있게 보세요."라고 했다. 그럼 진짜 재미있게 보자.
영화는 한 남자의 재미있는 모험담을 다룬다. 매일같이 지각하는 은행원이 있다. 그런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직장상사는 송영창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칼 맞아 죽고, 그 전해 만들어진 <정사>에서는 바람난 마누라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그 배우. 이 영화에서는 지각대장 송강호를 맨날 구박주고, 잔소리하고, 스트레스를 팍팍 준다. 게다가 화장실까지 따라와서는 송강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준다.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송강호를 화장실 코너로 몰아넣어서는 목을 꽉 낚아챈다. 스포츠學에서는 이것을 '헤드락'이라고 하고, 우리는 이것을 직장생활에서 만연하는, '직위를 이용한 엽기적 고통주기'라고 부를 만하다.
이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상의 따분함, 혹은 직장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어떤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찾아낸 것은 ‘쉘 위 댄스’류의 춤바람이 아니고 건전한 스포츠이다. 그가 택한 스포츠는 태권도도, 볼링도, 골프도 아니다. 뜻밖에 레슬링이다. 그가 레슬링을 택한 것은 결코 ‘그냥’은 아니다. 직장상사의 엽기적 헤드락을 빠져나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만원 지하철에 오징어가 되어 출퇴근하고 근무성적은 바닥이고, 직장상사는 지랄이고, 게다가 게다가 애인도 없는 이 남자가 이런 일상의 초라함과 일상의 비참함, 간단히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날 방도는 없을까? 김지운 감독은 정말 색다른 생각을 해 낸다. 바로 '레슬링계 입문‘. 그것도 어릴 때의 우상이었던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를 뒤집어쓴다. 세상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링 위에서 합법적인 반칙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다. 우와 신난다.
이제 초라한 샐러리맨 김대호는 울긋불긋한 마스크를 뒤집어쓴 위대한 레슬러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가 되는 것이다.
감독은 직장생활의 애환과 링 위의 잔인함을 차례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내 링 위나 사무실 안이나, 하다못해 10대 양아치가 판을 치는 사회의 뒷골목이나 똑같이 소심한 현대인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정글'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깨우치게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철학을 만들어내고, 적자생존의 법칙을 깨닫는다. 출근 후 하루 종일, 어쩜 일과 후 회식자리에서까지 상사의 기분을 맞춰주고,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비결을 깨우친다는 것이다. 왜냐? 그렇게만 하면 적어도 월급은 나오니까. 링 위에선? 이건 금메달 따는 올림픽 레슬링이 아니다. 각본대로 때리고 맞아주고, 쇼하면 된다.
하지만, 일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할까? 각본대로 가야할 레슬링 시합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진짜 혈투가 펼쳐진다. 이것은 김지운 감독의 잔혹코믹극이라는 명찰이 붙었던 데뷔작 <조용한 가족>에서 모자랐던 아이러니의 극한치를 보게 된다.
피터 잭슨의 <데드 얼라이브>에서 팔다리가 뚝뚝 떨어져나가고 피가 태평양같이 쏟아지는 화면에서 관객들은 뒤집어지게 웃는다. 이런 잔인한 관객들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런 불합리한 경우가 이 <반칙왕>에서도 재현된다. 링 위에선 막 데뷔한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가 쩔쩔매고 있다. 그가 각본대로 가짜 포크를 들고 상대를 열심히 '내리 찍어야'한다. 준비해둔 포크가 --- 맙소사--- 진짜 포크와 바뀐 줄도 모르고... 상대의 머리에서 피가 퐁- 퐁- 쏟아진다. 관객들은 깔깔거리고 난리가 난다. 오 잔인한 한국의 관객들이여.
나도 소싯적에는 프로레슬링을 즐겨보았었다. 아니 나 어릴 적에는 프로야구도, 국회의원낙천운동 같은 것도 없었으니 자연스레 볼거리는 프로레슬링 뿐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김일이니, 여건부, 이노끼, 천규덕, 역도산..같은 이름에 열광하였고, 방안에 이불 깔아놓고 형이랑, 친구랑 태그매치를 펼치곤 했다. 요즘 아이들이 '스타크', '엑스타시', '오르가즘'이란 단어를 자연스레 쓰듯이 그 당시 아이들은 '코브라 트위스트', '헤드락', '백 드롭' 이런 말을 자연스레 사용했으리라.
영화는 웃다가 끝나버린 <주유소습격사건>하고는 달리 확실한 주제를 던져준다. 그것은 관객이 알아서 찾을 일이니, 어쭙잖은 이야기는 생략한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관객들은 분주히 자기 앞에 떨어진 배꼽을 줍느라 정신이 없다. 윽... 으하하.
송강호라는 배우가 성실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연기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고, 김지운 감독도 <조용한 가족>에서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대호의 친구인 최두식 같은 한국인만 있다면 대한민국은 참 좋은 나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박재환 200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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