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방동네 사람들] 질박한 사람, 진실된 영화 (배창호 감독 People in the Slum 1982)

2008. 2. 24. 17:22한국영화리뷰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신문에 난 영화광고를 스크랩하는 것이 취미였다.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이 <꼬방동네 사람들>의 신문광고이다. ‘일간스포츠’에 전면광고가 났었는데, 요즘이야 칼라로 2면 광고까지 나는 시대이지만, 당시에는 영화 전면광고가 극히 이례적이었다. 시커먼 잉크가 여전히 묻어나는 그 영화광고. 그 영화는 사실 굉장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푸른극장’이란 곳의 개관기념작이었을 것이다. (나야 당시 부산 살던 아이라서 그게 얼마나 크고, 어떤 정도의 극장인지는 몰랐다. 아마 이 극장은 폐관되었든지 아니면, 연흥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다.) 다른 것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노란 우산을 썼던 김보연이 무척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이 영화 감독은 배창호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호기로운 명성을 들을 만큼 각광받던 감독이었다. 나도 그 시절부터 거의 배 감독과 궤적을 같이하며 영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니 말이다. 이 영화하고 같이 공개된(‘개봉된’하고는 또 다르다. 당시 한국영화정책은 아주 특별했다. 이른바 좋은 영화 ‘문예영화’를 하나 만들면 외화수입권이 하나 주어졌었다. 그래서 많은 영화사가 영화팬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관련 문공부당국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배창호가 만든 그런 영화가 바로 <철인들>이란 영화였다. 배창호는 종합상사 들어가서 외국에 나가 물건 팔던 수출역군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영화한답시고 회사 때려치우고, 충무로에 들어와서는 이장호 감독 밑으로 들어갔다. 배창호는 그 후 좋은 작품을 정말 줄줄이 만들어내었다. 난 미성년자 관람불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절까지는 그의 모든 작품을 극장에서 다 보았을 만큼 열성 팬이었다. 특히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은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한국영화이다. <우리 기쁜 젊은 날>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안녕하세요 하느님>까지. 

<꼬방동네 사람들>은 배창호 감독의 멋진 데뷔작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한국영화 말할 때 꼭 들어가는 좋은 작품이다. 그것도 딱 한번 옛날 보고 느낀 감정으로 그랬으니 말이다. 그리고10여 년 만에 비디오로 이 작품을 다시 보고 감격에 벅차서 글을 쓴다. 

이 영화는 1982년, 전두환 시절에 그저 그런 영화들만이 쏟아져 나올 때 크리스탈처럼 반짝이는 신인감독의 역작이다. 배경은 달동네이다. 아침이면 공중’변소’앞에 길게 줄을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마을 빨래터에서는 ‘빤스’ 하나 갖고 “훔쳤지 이 년아” 하고 싸우는 동네이다. 이런 마을을 배경으로 억척스레 살아가는 김보연 아줌마와 그 주변 사람의 살냄새 풍기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문학적으로 실감나는 것은 이동철의 원작이 워낙 리얼해서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아웅다웅 싸우면서, 어렵게 살아가는 마을에 젊은 아낙네가 하나 있다. 무슨 이유인지 검은 장갑을 한쪽 손에 끼고 살아가는 김보연이다. 그녀에게는 말썽만 피우는 어린 아들이 있었고, 태섭(김희라)이란 남편이 있다. 태섭은 방안에 처박혀 경찰을 피하는 신세이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공소시효가 끝나도록 쥐 죽은 듯 숨어지내는 것이다. 달력을 보며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제 두 달 남았다. 이제 한 달 남았다…”식으로. 그런데 어느 날 김보연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택시운전기사 주석(안성기)이다. 주석은 바로 김보연의 전 남편. 김보연의 기억은 플래시백으로 펼쳐진다. 지하철에서 깔깔대고 명랑했던 경상도 아가씨 김보연이 샤프하게 생긴 안성기와 눈이 마주친다. 둘은 이내 친해지고, 사귀게 되는 것이다. 안성기의 직업은 소매치기였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르고 김보연은 결혼하고 둘은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안성기가 결국 잡혀서 감옥 가고, 출옥하고, 이제 새 생활을 할 것이라 맹세했지만, 또 다시 감옥 가게 되고(그것은 그의 아들의 돌잔치 날이었다. 선물을 잔뜩 사들고 탄 버스에 소매치기 사고가 일어났고, 안성기는 전과자라는 이유 때문에 범인으로 몰린다!) 이런저런 일이 벌어지자 결국 감옥 면회소에서 둘은 헤어지자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김보연은 김희라와 살면서 안성기의 아들을 어렵게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제 김보연-안성기-김희라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보름 후 라는 공소시효까지 겹쳐 거리두기와 다가서기를 거듭한다. 그것은 김보연과 안성기의 부부감정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양육권’을 둘러싼 접근인 것이다. 안성기는 아이를 데려가고 싶어 하고, 김보연은 지금도 삐뚤어지게 자라는 아들을 전과자에게 넘겨주기는 죽어도 싫은 것이다. 여기에 김희라는 그런 전 남편의 아들 놈이 꼴도 보기 싫지만, 김보연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삼각관계를 충분히 납득할 만큼 감성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주변사람들. 달동네(사실은 달동네 아님!)의 가난한 이웃주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요인물은 공옥진 할머니,  빈민구제의 열정을 가진 달동네 목사(송재호).  

 안성기가 김보연과 철없던 시절의 연애 모습은 다시 보아도 상큼하다. 키스할 때 안성기의 입술이 점점 김보연에게 다가간다. 김보연은 무척 수줍어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노란 우산으로 카메라 앞을 가린다. 관객은 그 장면에서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담벼락 사이로 안성기가 김보연을 애무하는 장면인데 이 영화 통틀어 나오는 유일한 ‘그런’ 장면이다. 김보연의 스타킹 신은 허벅지가 잠깐 나오는데 내가 이런 디테일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일간스포츠에 난 광고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선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유일하게 진한 장면이 광고사진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문광고보고 주말에 극장가서 볼 영화를 고르는 당시 한국영화팬들의 수준인지, 당시 영화광고의 비참한 현실인지 여하튼 그렇다. 

배우들의 연기도 정말 감탄할 만하다. 김보연, 안성기의 연기도 열연이지만, 김희라의 투박하고 ‘싸나이’다운 연기가 거칠지만 멋있다. 젊은 시절의 말론 브란도 같았다. 안성기는 택시드라이브의 로버트 드니로 같았다. 의상도, 직업도. 처녀시절 김보연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둘이 처음 마주치는 게 지하철인데 당시(82년)에는 부산에 지하철이 없었다. 안성기가 감옥 처음 갔다오고 나서 열심히 일할 때 자갈치시장과 영도다리 부근이 화면에 나타난다.

이 영화는 과거는 어렵고, 현재도 어려울 것이지만, 언젠가는 밝은 희망을 가져다주는 어떤 약속을 해주는 영화였다. 좋은 시나리오, 정말 멋진 연기, 반짝이는 연출.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의 문제점을 모두 극복한 작품이다. 그것도 데뷔작에서 말이다. (박재환 1999/8/6)

감독: 배창호 주연: 김보연, 안성기, 김희라, 김형자 개봉: 198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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