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2008. 2. 24. 07:57미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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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d by 박재환 1999-5-2]   음. 그렇게 볼려고 했던 영화 중의 하나인 <햄릿>이 지난 주말 EBS에서 방영되었다. 역시 EBS는 좋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피어나는 20대(물론 실제로는 10대 애들의 사랑이야기였지만...)의 이야기라면, 이 <햄릿>은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로 보아야할 것이다. 햄릿은 정말이지 브레인스톰의 최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 지하철에서 챨스 & 메리 램(세익스피어의 원작 극본을 18세기 램 남매가 읽기 쉬운 소설체로 바꾸었음)이 쓴 <세익스피어이야기>에서 <햄릿>편을 한번 더 읽어보았다. 사실 고전(古典)이란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더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것이 분명하다. 이 이야기는 (시대적 상황은 나도 잘 모르겠다만...) 덴마크 왕조가 영국을 지배할 당시의 이야기이다. 덴마크의 용감하고 덕망있던 왕이 죽고, 왕의 동생인 클라디우스가 왕위를 계승하였을뿐만 아니라, 왕비인 거르트루드까지 차지해버린다. 이에 부왕의 서거에 대해 슬퍼하던 왕자 햄릿은 더욱더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된다. 정숙해야할 '어머니=왕비'는 '아버지=선왕'이 죽은 지 두 달도 채 안되어 '숙부=선왕의 동생'과 결혼을 하다니.... 청춘의 한때-책에 파묻혀 살던, 그리고 꽃다운 오필리아를 쫓아다니던 햄릿은 이제 온 세계, 온지구, 온 청춘의 고뇌를 저혼자 짊어지고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우거지상을 하고 하루하루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1948년작이고, 흑백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수도 없이 영화화되었지만, 아카데미 작품상 탄 것은 오직 이 영화 하나뿐이다. (66년도 수상작 <사계절의 사나이>는 세익스피어 원작이 아님! 그리고 <세익스피어 인 러브>도 당연히 아님^^) 영국 런던의 셰익스피어 연극단의 대표배우 국민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과 주연 햄릿을 겸한 이 작품은 그후 만들어진 수십 편의 <햄릿>(그 중 대표적인 햄릿으로 보자면, 토니 리처드슨(69년), 프랑코 제피렐리(90년), 케네스 브래너(96년) 감독의 작품이 평가를 받고 있음) 가운데에서 최고로 손꼽힌다. (물론 흑백의 묘미 때문이겠지만) 이 영화는 덴마크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 세트나 영국식 안개와는 또다른 느낌의 북구 해안의 차가운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다. (음, 너무 과장이 심한가? ^^) 어쨌든 이 작품은 1948년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주연상(로렌스 올리비에), 의상상, 미술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어쨌든 북구분위기를 만끽해보자. 영화가 시작하면, 아주 셰익스피어時代에 어울릴 그런 자막이 뜬다. 그 분위기는 앞으로 펼쳐질 분노와 살의, 실의와 절망, 그리고 정의구현의 무모함을 나타내준다. 이 오프닝씬의 장중한 음악과 안개는 고뇌와 갈등, 혼란과 혼돈의 덴마크 왕조의 비극을 그 무엇보다도 선명히 소개시켜준다. 바로 그 햄릿왕자의 걷잡을 수 없는 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밤중에 망루의 보초가 유령을 본다. 그 모습은 얼마전에 죽은 선왕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갖은 억측으로 미루어 볼때 유령의 출몰은 뭔가 억울하게 죽은 혼귀처럼 누군가에게 무언가 할말이 있음을 나타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셰익스피어 각본대로 진행된다. (사실 셰익스피어는 시나리오나 소설이 아니라 연극대본을 남겼다. 인터넷에는 풀 텍스트가 올라와 있다)

이 연극대본-영화의 핵심은 어린,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인 젊은이가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현실앞에서 저혼자 고뇌하는 것이 핵심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형 인간은 일단 부딪쳐보고 다음 일을 헤쳐나가는 캐럭터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햄릿형은 발 하나 내딛는 것에서조차 고뇌와 갈등과 번민을 거듭해야하는 것이다. 원래 햄릿이라는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인간상이다. 분명 우상시 하던 아버지의 죽음과 이 세상 최고의 '순결의 상징'으로 우러러보던 어머니의 재혼이 어린 영혼에 상처를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난 처음엔 왕비를 취하는 것이 당시 일반화되었을 형사취수의 관습인 줄 알았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재산뿐만 아니라 형수까지 거두어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생긴 단어가 onanism이라고 문화풍속사 시간에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챨스 램의 이야기를 보니 그런 대목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부도덕하고 매정스럽고, 대단히 좋지 못한 해괴망칙한 짓이라는...." 그러니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의 결혼은 정상적인 사고체제와 인간적인 윤리에선 납득할 수 없는 짓거리인 것이다. 그래서 이 너무나 인간적인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고 방황하고, 자기 어머니에게 그 새를 못참아 저런 벌레같은(원작에는 햄릿이 숙부를 벌레보다 못한, 곰팡이 같은 놈... 이런 표현을 쓴다)놈과 어울러 왕관과 침대를 물러받았는가 하며 세익스피어 작품중 가장 유명한 대사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라고 말한다.

사실 문학으로서의 햄릿이 철학으로서의 햄릿이 되는 요소는 그러한 인간의 고뇌에 있다. 사색하는 인간과 행동하는 인간, 가려진 진실과 권위로 지켜지는 허위, 유령에 위탁하는 양심과 '칼날'로 드러나는 결단, 우정과 사랑의 신념, 회의 등이 차례로 등장하기 때문에 더욱더 흥미진진해지는 것이다.

영화에선 왕비가 숙부의 살인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자의적으로 그 행동에 따랐는지에 대해 애매모호한 앵글을 유지한다. 하지만, 소설원작에선 적어도 그런, 무감각한 인물설정은 아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모략가적 대신 폴로니우스-가 햄릿의 칼날에 죽게 되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분명 왕비는 숙부에게 기운다. 하지만, 마지막 칼싸움 장면에서 독약이 든 술잔을 들때- 이 장면은 아주 드라마틱한 구조를 띄고 있다. 마시는냐 마시게 하느냐는 바로 삶과 죽음의 희롱인 셈이다. 소설에서는 독약이 든 사실을 모른채 왕비는 멋모르고 그 술잔을 드리킨다. 하지만 영화에선, 왕비가 모든 음모와 죄악을 알고는 스스로 그 술잔을 들이키는 형식을 띈다. 그래서 더욱 "약한 자여 그애 대 이름은 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선왕이 죽었고, 대신 폴로니우스가 죽고, 오필리아가 죽고, 왕비가 죽고, 오필리아의 오빠 레어티즈가 죽고,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마지막엔 햄릿이 죽는다. 쉽게 말해 주요인물은 다 죽는다. 이런 처참한 살상극은 곧바로 인간의 권력무상과 욕망의 끝을 셰익스피어다운 철학으로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들 머리에 얹힌 왕관의 보석이 천년만년 빛을 발할지라도 흙속에 파묻힐 육신은 10년이면 해골만이 남을 것이니 말이다.  (박재환 1999/5/2)

 Hamlet (1948)
감독: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 로렌스 올리비에
1949년 아카데미 작품, 감독, 미술감독, 의상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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