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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리뷰

[쌀] 우공이산, 황무지는 어떻게 옥토로 개간되었는가 (신상옥 감독,1963)

by 내이름은★박재환 201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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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 적 초등학생 시절. 방학이면 항상 외가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시골마을이었는데 과수원이 있고, 졸졸 흐르는 개울이 있고, 논과 밭이 있는 전형적인 그런 곳이었다. 책꽂이 가득 꽂혀 있는 영농관련책들 틈에서 어린 내가 꺼내 보았던 책은 아직도 기억하지만, 아마 <월간 농민>이라는 잡지책이었을 것이다. 그 책은 온통 '뽕나무 가지치기', '벼멸구 퇴치법', 혹은 '돼지 새끼치기' 같은 지극히도 농민 전공적인 내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회 생활만 하다 시골에서 한 달 여를 처박혀 있어야하는 나로선 곧 읽을거리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바로 그 <농민>이라는 잡지에도 만화가 있었던 것이다. 내용은 전부 '새마을 지도자 성공사례'를 만화로 엮은 것이었다. (그 당시는 朴統시절이었음) 내용은 한결 같이 가난하고, 보수적인, 그리고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도 없이 오직 하늘탓, 나랏님만 욕하고 탓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마을에, 선각자가 나서서 그 고장을 잘 살도록 만든다는, 오늘날 MBC-TV<성공시대>같은 내용이 주였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화이고, 민초들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괜히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이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아스라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영향이었는지, 중학교 가선 <>이랑, <상록수> 같은 소설을 보며 '브나르도'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대학시절 남들 다 가는 '농활' 한번 가 보질 못했다. (사실은 방학 때면 돈 번다고, 아르바이트 하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영화는 그런 시골 마을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생각하게끔 만든 영화였다.

이 영화는 1963년도 영화이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쿠테타로 집권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대한민국 '窮民'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혁명정신으로 달려들 때의 이야기이다. 아직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그 시절 말이다. 배경은 전라도 무주 구천동에서 조금 떨어진 한 시골 마을이다. 대대로 가난을 업으로 살아가는 이 동네의 개척사인 것이다.

영화에서 출연자들은 줄곧 기존 정치에 대해 욕설을 퍼붓는다. 야당을 찍었다고 정부지원이 안 되고, 관청에서 보조금이라도 받을라치면 서로가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여기로 저기로 넘겨버리는 그러한 전형적인 관료사회의 작태, 아직도 남아있는 소작형태들. 그리고 빨갱이 운운하며 탄압하려 하는 많은 저항세력. 이 시절에 우리는 아주 헌신적인 인물을 만나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주인공을 보게 된다. 신영균과 남궁원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제대 군인들인 이들은 (신영균은 다리를 절고, 남궁원은 한쪽 팔에 갈고리가 붙은 의수를 달고 있다) 그들의 방식대로 세상을 욕하며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술집 여자의 표독스럽지만 현실직시적인 말에 신영균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시골마을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뒤늦게 건네받은 신영균은 기차로, 그리고 비포장도로를 버스로 한참이나 달려 고향마을에 도착한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황량한 비포장도로만큼 비극적이다. 고향마을 어귀에서 그는 아이들이 소꼽장난을 하며 나누는 대사를 듣게 된다. 가난으로 점철된 이 마을에서는 아이들의 최대관심사는 배불리 먹어보는 것 뿐. 아버지는 평생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하고, 그것이 한이라도 된 듯 두 눈을 뜬 채 죽는다. 신영균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난을 물러치리라 각오한다. 어떻게?

그의 마을은 지주의 비옥한 땅을 제외하곤, 온통 황무지이다. 저 산을 뚫으면 금강물을 끌어들여 이곳을 옥토로 바꿀수 있으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마을 사람을 끌어 모아 산을 깎고, 암석을 뚫어 물길을 열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무모한 의지를 저지하는 것은 여럿 있다. 우선은 관청의 비우호적 태도. 말단 직원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높은 사람은 그 저의를 의심하고, 선거에만 골몰한다. 그리고 마을의 수구적인 태도를 대표하는 무당은 산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 저주의 말을 쏟아붓는다.

이런 어둡고, 칙칙한 가난에 찌든 마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밝게 하는 것이 바로 최은희의 존재이다. 최은희는 이 마을의 지주이자, 유지이며 실력가의 딸이다. 그는 가난하고 다리마저 저는 신영균을 사랑하고 있고, 헌신적으로 그를 따른다. 물론 아버지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저해할 신영균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여기며 이들을 더욱 갈라 놓으려고 하고, 그럴수록 최은희는 더욱 신영균에게 경도되는 것이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터널이 뚫리고, 물이 쏟아진다. 이제 대대로 가난을 물려받던 이 마을에도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옥토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의 목적인 계몽영화로서의 한계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농민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 돌파구를 마련해주는 혁명군의 공약실행 등의 문제는 요즘 와서 볼때는 사실 잠깐 접어 두고 볼 일이다. 이 영화에서 신상옥 감독은 줄기차게 인민의 의지와 인민의 단결, 인민의 자결을 주장한다. 그래서 보기 나름이지만 상당히 용공주의적 색채가 있기도 하다. 특히 당시 아버지의 행동에 반대하는 지극히 자의식 강한 최은희의 인물묘사는 그후에도 한국영화에선 찾아보기 힘들만큼, 혁명적이리만치 강인하다. 그것이 비록 한 남자에 대한 열정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는" 그러한 혁명적 열성이 바로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러하더라도 이 영화가 그렇게만 해석할 수는 없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공산주의 대륙중국)의 뉴스시간을 잠깐 보더라도, 이 나라에선 군인(인민해방군)과 관련된 소식을 꽤 많이 전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수해가 나면 물막이 공사를 하고, 벼 수확철이면 벼베기에 대거 동원되고, 산을 깎고, 도로를 건설하고... 그런 인민에게 파고드는 해방군의 모습은 원래 모택동의 혁명시절, 장정시절 때부터 유지해오던 전통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군인들은 이런 후방지원사업에 많이 동원되어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군인의 모습이 주체적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단지, (어쩜 가장 중요한 일일 수도 있는) 혁명군의 집권이 단지 출연배우들의 몇 마디 대사로 처리되고, 난공사에 대한 지원으로 폭약을 실어줄 뿐이다. (물론 폭파장면은 없다. 굉음만으로 "- 난공사 코스가 뚫리게 되었구나.."하고 관객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지극히 한국영화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63년이라서 아직은 군인을 대거 동원될 형편이 못 되었는지도 모른다.

신영균은 처음 산을 뚫는데 5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많은 기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리고 영화내내 관객은 시간의 흐름엔 무감각해진다. 리얼감 부족이라기 보다는 집념에 몰입하다보니 부차적인 허술함은 쉬이 잊어버린 것이다. 중국의 옛 이야기 중에 <우공이산>이 있다. 우공이란 노인이 사는 마을엔 산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은 대대로 먼 길을 돌아서 가야하는 불편이 있었기에, 우공은 어느 날부터 산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흙과 돌을 파서 실어 나르는 것이다. 마을 사람이 모두 그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때 그가 한 말은 "내가 못하면 내 손자가, 내 손자가 못 끝내면 그 손자의 손자가 이 작업을 마무리지을 것이고, 그럼 우리 자손들은 좀더 편한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최초의 대규모 자연파괴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을 이야기한 것이다. 물론 <>에서의 자연개척은 순전히 극단적인 배고품의 퇴치에 의한 것이다.

신상옥 감독은 6-70년대를 풍미하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다. 부인 최은희씨와 함께 78년 북한에 납치되었었다. 그리고, 86년 드라마틱하게 비엔나에서 탈출하여 더욱 그의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그후 신상옥은 이 나라 저 나라를 오가며 몇 가지 화제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영화제작에 대한 화제, 그리고 그가 북한에서 만든 영화에 대한 저작권과 관련된 화제, 그리고,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고 온갖 마타도어로 가득찬 김정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김정일의 영화과 예술혼을 조금씩 전달해 주었고, 우리 민족 절반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물론, 한때는 아방궁과 플레이보이, 혹은 나쁜 놈 '김정일'에 촛점을 맞추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에서 신감옥을 검색해보면 그가 자유의 품으로 '돌아온' 이후의 작품까지 합쳐 (94<증발>이란 영화) 모두 66편이 있다. 이 영화 <>로 그는 아시아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이런 영화를 프로파간다로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어떤 목적이 게재된 게몽영화일 터이니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베를린 올림픽을 담은 기록영화처럼, 의외의 작품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눈에 보이는 뚜렷한 주제와 전형적인 이야기구도에도 불구하고 시종 잡아두는 재미와 감동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극단적인 대립은 없다. 지주와 소작인, 혹은 부패관료와 혁명군인, 가난한 남자와 부유한 지주의 딸, 무당과 과학적인 태도의 여자, 이 모든 구도는 극단적인 투쟁과 대립을 통해 영화를 더욱 치열하고 비극적이게 만들수도 있었지만, 영화는 결코 그러한 일방의 패퇴와 절망으르의 좌절을 선택하진 않는다. 최고의 악역은 결국 지주였겠지만, 영화 마지막에 신영균의 단 한마디. "우리와 힘을 합쳐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였음 합니다."로 서슬퍼런 혁명군은 쉽게 그를 풀어주게된다. 그리고 지주는 물론 개과천선했을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무당은 자신의 딸이 빠져죽은 그 강물이 마침내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 마치 씻김굿이라도 하듯 오열하므로써 모든 구원과 불행은 정말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영화에서 무당의 딸로, 미친 여자로 나온 여자의 대사중에 "울지마, 울면 더 배고파..."같은 대사는 지극히 촌스럽지만, 지극히 매력적인 슬픈 대사이다. 조연으로 나와 영화에 활기를 준 김희갑의 연기도 명연기였다.

신상옥은 남과 북에서 다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영화를 만들던 풍운아이다. 멋진 영화적 소재가 될 법도 하다. 신영균은 현재 신한국당 국회의원이다. 지난 달에는 제주도에 사재를 털어 <영화박물관>을 개관했었다. 내가 신혼여행을 외국(중국이겠지만^^)에 안가고 제주도로 간다면, 그것은 순전히 <영화박물관> 보러 가기 위해서 일 것이다. ^^ (박재환 1999/7/5)

[special]신영균 시대와 국가가 원했던 쾌남 (씨네21)

 

[special] 시대와 국가가 원했던 쾌남

신영균이 1960년 32세라는 늦은 나이로 영화계에 데뷔하던 당시 한국영화계에는 기라성 같은 선배 김진규와 최무룡이 버티고 있었고, 후배 신성일이 막 스타로 발돋움 하려는 참이었다. 적어도 외모만 놓고 봤을 때, 그가 이들 배우들과 경쟁하여 최고의 스타가 되기는 어려워보였다. 선 굵은 얼굴과 건장한 체격은 당대 주류를 이루었던 멜로드라마의 배우로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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