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의 난] '미션' 임파서블 (박광수 감독, 1999)

2013. 1. 3. 11:11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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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프랑스에서는 한 해 내내 이와 관련된 온갖 행사가 펼쳐졌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프랑스혁명 200주년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왔던 그 시절을 좀 기억하고 있다.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 되었던 시대부터 시작하여,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고, 앙상 레짐이 해체되고 하던 그 시절. 우리는 통칭하여 프랑스혁명라고 부르지만, 그 시절, 그것이 혁명이랄 것도 없고, 민중이 정의와 박애에 가득 찬 善民이란 것도 순전히 뻥이라는 극단적 주장까지 쏟아져 나왔었다. 역사를 판단하기에는 200년도 짧은 시간인 모양이다. 그 때 아마 까치든가 한울이든가 하는 출판사에서 프랑스혁명 200주년 총서를 십여 권 기획발간하기 시작했는데 그 책 중에는 유난히 우리나라 개화기의 농민혁명, 제주도의 천주교민 발흥과 연관시킨 프랑스의 역사학자 논저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적어도 프랑스 근대史家에게는 제주도가 꽤나 매력 있는 역사탐구 장소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1900년 직전의 아시아 실정을 다시 보자, 영국과 프랑스 등 이른바 서구제국들이 아시아 국가를 침략, 수탈해가기 시작할 때 중국의 민초들은 청 제국의 수탈과 외세의 강점에 자생적으로 봉기하였다. ‘의화단의 난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역사에서 늘상 등장하는 민간신앙의 화신이었다. 백련교도의 난 같은 것은 중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면, '홍건적'만큼이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런 메시아적 상징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황비홍>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미신에 가까운, 그리고 혹세무민하는 사악한 존재로서의 이들을 평가하기 쉽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이들이 활개를 치게 된 경위를 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의화단의 난' 때문에 프랑스의 함대가 들이닥쳤고, 서태후 자희가 그렇게도 아꼈던 이화원이 몇날며칠을 불타올랐고, 그 많았던 중국의 보물이 약탈되어가는 역사적 경험을 알고 있다. 이른바 함포외교는 중국의 빗장을 열어젖혔고 중국은 외세에 짓밟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 시절 조선은? 그리고 조선의 변방 제주도는?

 

물론, 그 시절 그 장소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프랑스 사학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제주도 출신의 소설가 현기영이 꾸준히 제주도에 눈을 돌렸을 것이고, 이제 박광수 감독이 까마귀가 되어 조감하게 되는 것인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제주도라는 것이 그 후 반백 년 뒤에 있었던 4.3사건과 연계되어, 제주도라는 섬마을로 한정되는 특이성과 폐쇄성, 그리고 숨겨진 혹은 망각된 순간을 되살리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보면 1차적으로 느끼게 되는 언어의 상이함 때문일 수도 있고, 영웅의 부재에 기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재수는 결코 영웅도 아니고, 용사도 아니며, 연인도 아니다. 어정쩡한 역사의 현장에 어쩔 수 없이 내세워지는, 그러한 존재였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원래 영웅사관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오합지졸을 정예부대로 만들 사람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주도의 풍정처럼,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결코 그들이 아닌 것이다. 바로 외부에 있는 세력인 것이다. 그것이 프랑스든 일본이든 외세이고, 믿을 수 없지만 매달려야하는 조선정부였던 것이다.

 

거의 주기적으로 다시 읽게 되는 소설 중에 A.J. 크로닌의 작품이 있다. 그의 <천국의 열쇠>를 보면 주인공 신부님이 1910~30년대쯤 되는 중국에 포교활동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제국의 선교 형태를 잠깐 보면, 각 종파들의 세력 확대를 위해 일단 머리수를 중시하는 장면이 있었다. 어중이떠중이 중국인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철저히 수탈되었고, 가진 것이라곤 눈치와 배고픔 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연스레 하느님의 따뜻한 품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몰려든다. 그들이 "할렐루야", "성모 마리아여.."하고 부르짖기만 하면 먹을 것이 생기고, 입을 것이 생기니 무엇을 마다하리오. 그러니, 저 멀리 바티칸의 교황청에선 나날이 늘어만 나는 교세 확장에 싱글벙글하지만, 교황청으로부터 지원이 끊기자,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새로 생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잠자리까지 제공한단다. 이제는 그곳으로 몰려가는 식이다. 주인공 신부님은 이런 것은 결코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 그런 내용이다.

 

1901년의 제주도를 이해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연장선상이다. 고종은 제주도에 칙령을 내려 천주교 신부를 마치 자신을 대하듯 하라고(如我待) 이른다. 그러니 어중이 떠중이, 못된 패거리까지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설쳐댄다. 그리고 봉세관(세금 거두는 사람)의 앞잡이가 되어 제주도 민중의 원한을 사는 것이다. 영화 시작할 때 사악한 천주교 교인에게 수모를 당한 할아버지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이 장면부터, 관객은 이 영화의 복잡한 사회구도를 인식해야하는 숙제를 짊어진 것이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은 그러한 모든 사회적 계급과 천주교의 의미, 제주도 사회가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묘사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략과 절제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시나리오도 애매하고, 연출도 부족하다. 관객에게 폭넓은 심미안을 강요하는 것만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제주도의 형상을 구현시킬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제국주의 헐리우드의 울트라 블록버스트 <스타워즈>와 같은 날 개봉되었다는 이유 때문에라도 유명해진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투박한 제주도 말이 관객을 낯설게 하는 가운데 관객은 박광수 감독의 이 야심작에 조금씩 몰입하게 된다.

 

일개 통인이었던 이재수가 조금씩 각 세력의 실상을 이해하고 점점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이 스타 이정재를 용의주도하게 활용하여 장구한 역사 속에 티끌 같은 민초의 실상을 그려낸다. 어차피 시대가 그렇고 사정이 그러하니, 이재수가 난의 중심 인물이 될 수도 없었고, 그러한 민중봉기에도 한참이나 못 미치는 창의(倡義)라는 것이 성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란 것을 모두들 알고 있다.

 

이 영화는 세 가지 시선을 유지시키려고 한 감독의 의도는 쉽게 알 수 있다. 이재수가 바라다본 제주도, 명계남이 지켜보는 현실, 그리고 까마귀의 시선이 주는 선지자적인 의미. 물론 그것은 모두 실패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32억이나 투자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보다는, 100분이라는 너무나 짧은 시간에 무엇을 집어넣으려 했는지 우선 의문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사건 자체가 하나의 삽화, 혹은 묻혀버릴 야사적 성격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700명이나 죽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결코 장대하게, 스펙터클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단지 박광수라는 타이틀에 압도 되어, 제주도의 민중봉기라는 무게에 짓눌러 영화의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상실하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 영화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 영화 중의 하나인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감독 박광수의 분발을 정말 기대한다. 이런 소리 하기엔 아무 것도 아닌 박재환이지만 말이다.

 

역사드라마는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큼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이 민초, 종교갈등, 신분갈등 같은 무거운 주제가 될 경우, 그 영화는 백 퍼센트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박광수는 호기롭게 달려들었고, 영상에 옮겼지만, 역부족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제주도에서 그해 죽어간 사람의 영혼만큼이나 의미 없고, 한불합작이란 미명하에 이루어진 엄청난 영화적 실수였음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이재수의 난이란 것은 그 역사적 사실도, 그 영화도 결국은 까마귀만큼이나 중요하게 설정되었지만, 그 까마귀의 날갯짓만큼 허무하게 묻혀버릴 '미션 임파서블'인 것이다.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은 실존인물 이재수가 1900년 제주도에서 일으킨 민중항쟁 신축민란의 이야기를 다룬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가 원작이다.(박재환 1999)

 

이재수 (1877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재수(李在守, 1877년 ~ 광무(光武) 5년(1901년))는, 대한 제국 광무 5년(1901년)에 제주도에서 교폐, 세폐 시정을 외치며 일어난 신축민난의 장두(狀頭, 지도자)이다. 《속음청사》는 이제수(李濟秀)로 적고 있다. 본관은 고부(古阜,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이고. 제주도 대정군(大靜郡) 출신이다. 시준(時俊)과 송씨 사이의 둘째아들이다. 관노(官奴) 또는 마부 신분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싸움과 장난을 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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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민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재수의 난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1999년 영화에 대해서는 이재수의 난 (영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제주 관덕정. 당시 봉기를 지휘했던 이재수가 이곳 광장에서 천주교도를 처형하였다. 신축민란(辛丑民亂), 제주 신축교난, 제주 교난 , 또는 이재수의 난은 구한말 봉세관(捧稅官)의 조세 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맞선 민중 항쟁이다.[1] 토착 신앙이 전통 종교이자 사상 · 정신의 토대였던 제주도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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