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2002.10.25.) <트윈 픽스> 같은 기괴한 영화를 곧잘 만들던 데이빗 린치 감독의 딸 제니퍼 린치의 유일한 감독작품 <박싱 헬레나>(93)라는 영화가 있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외과의사가 여자친구 ‘헬레나'(쉐릴린 펜)에게서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되고, 충격을 받은 그 외과의사는 ‘헬레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헬레나’를 납치하여 자신의 저택에 가두어둔다. 헬레나는 눈도 깜짝 하지 않는다. 외과의사는 최악의 방도를 생각해낸다. 헬레나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두 다리가 사라진 것을 보게 된다. (외과수술로 다리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헬레나는 외과의사에게 차가운 경멸의 눈빛만을 보낸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번엔 자신의 두 팔마저 사라진다. 외과의사는 그렇게 헬레나를 자신에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이다. 경찰은 실종된 헬레나를 찾아 나서고 헬레나는 사지가 절단된 상태에서도 그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마 마지막엔 경찰이 뛰어들고 의사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을 것이다. 한쪽 방안에 갇혀있는 여자로서는 최악의 순간이다. 이제 그녀는 꼼짝없이 굶어죽게 생겼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와 김기덕 감독의 신작 <나쁜 남자>는 유사한 점이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사랑을 얻지 못할때 보이는 극단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헬레나는 끝까지 남자를 수용하지 못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망가진 몸뚱아리를 의학적인 생명을 연장시켜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남자뿐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나쁜 남자>의 첫 장면은 건달 조재현이 서울 명동 번화가 (아마 롯데백화점 앞)에서 한 여대생을 바라보면서 시작된다. 그 여대생은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여느 여대생처럼 밝고, 건강하고, 화사했다. 아마도 봄바람이 불어서인지 아니면 그 여대생의 날씬한 각선미를 훔쳐 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조재현은 이 여자에게 다가가 강제로 입을 맞춘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말이다. 강제 성추행을 당하는 여대생. 역시 사회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은 바로 유니폼 입은 사람들. (아마도) 휴가 나온 해병대 군인아저씨들이 달려들어 조재현을 마구 두들겨 팬다. 그야말로 미친 개에게 물린 것과 같은 이 여대생은 당당하게 말한다. “사과 해!”라고. 그러곤 조재현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조재현이 갑자기 여대생을 사랑하게 되었다거나, 한낮 대로변에서 성욕을 느꼈다거나 하는 ‘비정상적’이며 ‘비이성적’인 인물일까? 그 이유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 여대생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조재현은 그야말로 건달. 사창가의 포주이며, ‘기도'(보디가드?)이며, 기둥서방이며, 벙어리이다. 그는 똘마니 둘을 데리고 사창가 창녀들의 비즈니스를 총괄하고 있다. 이 정도 진행되면 조재현의 엽기적 행동을 굶주린 사랑과 짓밟힌 자존심의 줄타기임을 이해하게 된다. 김기덕 감독은 어디에다 초점을 두었을까. 똘마니 중 하나가 사창가 창녀로 추락한 여대생을 짝사랑하게 되자 질투심이나 경쟁심 같은 반응을 보여주진 않는다. 오히려 “깡패새끼가 무슨 사랑이냐..”라는 속 깊은 절규를 내뱉을 뿐이다.
김기덕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극단적 상황의 인간심리에 관심을 가질만하다. 조재현은 애당초 여대생에게 연정을 느꼈다기보다는 성욕으로, 혹은 장난으로, 혹은 계급적 갈등의 정복욕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것이 현재의 사회질서(감독은 그것을 계급간의 갈등으로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탈행위였으며 조재현은 좌절을 겪게 된다. 그것이 복수의 화신이 되어 조금씩, 아니 철저하게 파멸시켜버리는 것이다.
조재현은 조재현대로 철저히 파괴된다. 육신이 걸레짝이 되고 여대생은 여대생대로 인간 밑바닥의 신세가 된다. 김기덕 감독 영화가 언제나 강렬한 라스트를 연출하듯이 이 영화에서도 논란 많은 충격을 안겨준다. 하나가 자살하거나, 하나가 돌아버리거나, 하나가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둘은 ‘2인1각’의 공생관계로 바닷가를 전전하게 된다. 그들이 벌이는 이동식 윤락장사는 과연 김기덕다운 상황설정이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트럭이 저 멀리 점으로 변해갈 때 사람들은 이 두 존재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 계급을 초월한 사랑? 지고지순한 열정?
애당초 감독이 생각했던 계급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대생’이란 것이 부르조아의 퇴폐적 상징일 수도 없고, 사창가 포주가 이 시대 모든 악의 대표주자일 리도 없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대상의 결합이 내놓는 김기덕식 조합이 깊은 울림을 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감독은 이 영화에 개봉에 즈음하여 여대생 선화의 극단적 인생유전을 한 사람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백주대낮에 역 앞 대로변에서 납치되어 창녀촌에 팔려간 여자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감독은 그러한 극단적 상황을 대입한 ‘운명’과 ‘사랑’ 이야기에서는 부조화를 이룬다. 어차피 김기덕 감독 영화의 특성이라면 극단적 상황에 몸부림치는 극중 주인공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발버둥치는 관객과의 편치 않은 소통이 아니었던가.
7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김기덕 감독의 여덟 번째 (벌써 8번째다!!!!) <해안선>이 상영된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이 여전히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매체, 평론가로부터 각광받는) ‘스타 감독’이란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자신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일 뿐이라고 자조했다.
김기덕 감독은 영혼이 맑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의 궤적이 그걸 증명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 영혼이 맑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기덕 감독은 그걸 치열하게 자신의 영화에서 형상화시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실 나도 김기덕 감독에 대해 무척 곤혹스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박재환 2002.10.25.)
[나쁜 남자 2002] 감독: 김기덕 출연: 조재현,서원,윤이준,최덕문,남궁민,이한위 (2002년 1월 1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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