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뎐] 임권택版 판소리 춘향전

2008. 2. 18. 22:10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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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람치고 춘향이를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고,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내달리는 이몽룡의 신나는 라스트 대반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춘향이는 적어도 심청이와 더불어 자자손손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캐릭터임에는 분명하다.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야기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창극으로, 영화로, 코미디로, 애니메이션으로 수백 번 다시 만들어져서 우리를 찾아왔다. 이번엔 임권택이라는 거장 감독이 뛰어들었다. 이미 <서편제>로 한국적 정서와 우리 것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선보였던지라 많은 사람들은 어떤 기대를 하였다.

 

춘향과 몽룡이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지고, 남자는 서울로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여자는 크나큰 시련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이기고 사랑의 승리를 만끽하게 된다는 기본 플롯은 언제나 각광받는 줄거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면적 텍스트안에는 지독한 사회적 모순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계급간의 사랑이라거나 치기어린 사랑, 그리고 지독히 단순한 권선징악의 결말구도는 영화를 한편으로는 맥빠지게 하고만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데는 몇 가지 특별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 <서편제> 이후 임권택 감독이 빠져든 한국 전통의 음악, 소리, 혼에 대한 추구인 것이다. 기실 이 영화의 판본은 우리나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판소리(심청가) 보유자인 조상현의 완판 <춘향가>를 바탕으로 김명곤이 시나리오로 옮긴 것이다. 완판 춘향가는 모두 5시간에 이르는 대작이며 임권택감독은 이것을 영화로 꼭 옮기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지루한 영화'에 대한 시도가 완성된 것이다. 

 

영화는 줄곧 조상현의 걸쭉한 창과 임권택감독의 완숙한 연출에 정일성 특유의 안정된 화면을 선사한다. 모두가 아는 내용을 모두가 꺼려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기에 다소 지루한 면이 없지 않을까 했었지만 그것은 관객들이 오랫동안 우리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 전개구조에 대한 낯설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리아리 넘어가는 창의 장단고저는 관객에 따라서는 흥겨운 가락이 될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지독한 난향(亂響)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락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호흡에 기인한 흥겨움이 실려있다. 그래서 방자의 걸음걸이에서 느끼는 경쾌함이나 어사 출도 후에 묘사되는 우왕좌왕은 지극히 한국적인 리듬임에 분명하다. 잊어버릴 뻔한 그 가락말이다.

둘째는 여전히 임권택 감독의 장인정신이다. 97번째 감독작품이라는 스케일이 말해주듯이 이제 그의 손을 거치는 영화는 어떤 정제된 느낌마저 줄 정도이다. 그래서 이야기 마디마디가 전혀 낯설지않고, 연결고리가 너무나 부드럽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물론 임권택 감독과는 한 쌍으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정일성 촬영감독의 역시 안정된 카메라는 관객에게 예상가능한 한국적 지형미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춘향이가 그네 타던 광화루와 눈덮힌 겨울 산 등 한국적 미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표준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셋째, 임권택감독이 찾아낸 춘향과 몽룡은 21세기에서 찾은 고전적 인물이다.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된 이효정과 조승우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게 주인공역을 무난히 해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힘이었겠지만, 한복에 매몰되기 쉬운 한국인의 아름다움, 혹은 청순미를 살려내는데 빠짐이 없었다. 이제 여고 1년생이라는 이효정의 속곳 입은 연기는 어린 나이의 춘향이 하는 어른스런 사랑을 충분히 각인시켜준다. 그것은 이미 그 나이에 가질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그리고 가장 간단한 사랑의 방식이었을테니 말이다.

물론 춘향과 몽룡의 로맨스에는 사랑과 열정이라는 기본메뉴보다는 음탕한 탐관오리의 니글거리는 시선이 더 큰 요인이다. 그래서 사랑의 승리라는 것이 기실 정의의 승리라든가 사회정의의 실현, 혹은 계급구조의 대변혁이라기보다는 역시 그 나이에 어울리는 신나는 귀향극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춘향이를 '성춘향'이라 부르는 것은 여전히 춘향이가 옥에서 몽룡이가 돌아와서 자신을 꺼내가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여인상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임권택이 만들었다고 해서 잔다르크로 부활하는것도, 평강공주의 역할이 부여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정치적으로 옳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파격적 춘향을 기다리려면 더 많은 시간이 흘려야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여전히 임권택과 정일성, 게다가 조상현이 빚어낸 고색창연한 작품이니 말이다.

하나, 이 영화가 21세기에 만들어진 춘향전임을 알수 있게 하는 것은 한밤의 무덤 장면에서 춤추는 귀신불의 영상이다. 이 CG장면이 아마 새로운 춘향전임을 생각하게 하는 유일한 단서일 듯하다. 판소리에 별다른 조예가 없는 사람으로서 판소리가 모짜르트만큼이나 들어볼만하다는 느낌이 순간순간 들었다. --; (박재환 20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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