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화선] '영화'로서의 취화선, 영화으로서의 '취화선'

2008. 2. 18. 21:26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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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by 박재환 2002/5/18]
   영화판(?) 언저리에 뛰어든지 얼마 안 되었던 어느 해. <춘향뎐> 기자시사회에 갔었다. 그때 나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내 머리엔 우리나라 최고의 영화평론가라 생각하고 있던 모(某)씨가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을 보더니 거의 90도로 절을 하는 것이었다. 문사로 그치는 평범한 취재원-기자간이 아니라 거의 스승으로 떠받드는 열혈 옹호자의 몸가짐이었다. 그후 임권택 감독 작품에 대한 그 사람의 코멘트를 유심히 뜯어다 들여보는 습관이 생겼다.(씨네21에 실린 최근의 글까지 포함하여) 사실 영화평론가나 영화기자는 영화작품에 대한 글나부랭이로 기생하는 부차적인 직업군이지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집단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외국의 예나, 아카데믹한 글쓰기, 충분히 감동과 공감을 안겨주는 에세이도 간혹 존재하지만 난 그 존재가치를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해본 적이 없다. 그런 관점에서 난 영화를 보아왔다. 그래서 '난' 체하는 글쟁이들이 특정영화나 영화인에 대해 폄하하거나 홍콩 삼마이 영화에 광적으로 열광하는 팬덤 현상에 대해서도 동일선상에서 보았다.

<취화선>을 보기 전에 상당히 갈등을 하였다. 임권택 감독이야 (이번에 보니 이 작품이 그의 98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한국최고의 명감독이며 해외에서도 역량을 인정받고 있는 노장이 아닌가. 그의 <서편제>는 정말 내 가슴에 남아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내가 접근하기에는 너무 고답적인, 혹은 작가주의적인 경지에 이르고 말았다. <취화선>을 볼까말까 갈등하던 중 어제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이 영화의 깐느 진출을 기념하여 주한프랑스대사관과 에어 프랑스가 주관한 주한외교사절 등 외국인 대상 특별시사회가 있었다. 영어자막으로. 외국인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참석했다. 다행히 개봉하기 전부터 화제가 되었고 깐느에까지 진출한 개봉작이라 영화관계자들은 이미 이 영화를 봤는지 어제 참석한 사람 중에 내가 안면이 있는 영화관계자는 눈에 띠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배우 최민식, 안성기씨와 함께 이 영화를 제작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 참석하여 벽안의 관객에게 좋은 시간을 갖기 바란다는 무대인사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우선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대한 최대의 찬사로 시작될 만하다. 어느 한 장면 버릴 곳이 없을 만큼 수려한 영상미를 담아내었다. 영화 끝난 후 가진 Q&A시간에 외국인 관객들은 로케지가 어딘지 질문할 만큼 수려한 한국강산의 사계가 영화를 수 놓는다. 그 아름다운 강산에 있는 인간들은? 때는 1800년대 중반. 서울의 시정거리의 거지 장승업 소년이 개화파 양반 김병문(안성기)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후 장승업은 천재적인 그림실력으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커나간다. 영화는 장승업의 풍성한 인생역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나가는 한편 김병문을 중심으로 한국개화기의 격동의 순간을 잡아낸다. 영화에서는 우리가 익히 배운 한국근대사의 순간이 이어진다. 효수형을 당한 천주교신자들의 머리가 내걸리고, 한양거리에선 일본군과 청군이 엇갈려 행군한다. 장승업이 전라도 땅에 내려갔을 때는 동학란의 아수라장 한복판에 내던져지기도 한다.

영화는 <아마데우스>에서 보여준 시대의 숙명 속에 내던져진 천재의 광기와 <레미제라블>에서 볼 수 있던 혁명의 격랑 속에 휩쓸린 인간을 동시에 다루려는 과욕이 보인다. 미술작품, 그것도 한국근대화에 대한 심미안이 없는 나로서는 장승업의 그림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꽤나 비싼 값에 거래되는 걸작임은 안다. 그런 작품을 남긴 사람이 모차르트나 고흐에 버금가는 광기의 천재인지는 문학하는 사람, 영화하는 사람의 상상의 공간에서 빚어진다. 영화에서 장승업은 한밤에 몰래본 중국화가의 그림을 머리 속에 모조리 기억하여 다음날 화선지에 똑같이 모사한 장면이 있다. 한번은 그의 그림세계를 빗대어 "장승업은 중국화가들의 잘된 특정부문만 똑같이 모사하여 그려낸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런 세간의 평 속에 장승업은 자신의 화풍에 대해 회의하고 시대상에 분개하며 미친 듯 술을 마시고, 붓을 든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의 광기를 강조하기 위해, 혹은 예술가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몇몇 여자와의 로맨스를 추가한다.

물론 화가는 화가일뿐.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業이다. 그는 격동하는 근대사의 한복판에 끼어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시대의 흐름을 뒤바꾸는 혁명의 엔진이 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하지만, 임권택 감독이나, 함께 시나리오를 쓴 김용옥 교수는 장승업의 궤적을 통해 한국근대사의 피곤한 드라마를 재현해내려고 한 모양이다. 하지만, 천재화가 장승업과 당나라의 詩仙 이태백을 병치할 필요는 없었을 듯 하다. 요즘같이 정치과잉의 시대에는 특히 말이다. 어쨌든 감독은 엄청난 역사의 중압감과 창작의 갈등을 겪던 장승업의 최후를 김동리 단편소설 <등신불>처럼 꾸민다. 이 장면은 명백히 작가의 창작이다. <아마데우스>에서 천재 모차르트의 최후를 생각한다면 다분히 영화적으로 꾸며진 결구이다. 하지만 영화팬에게는 감동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누가 만들었던지 간에 우리 영화에선 흔치않은 시대를 집중조명했고 우리의 역사인물을 형상화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김옥균과 장승업의 조우 장면이다. "요즘 장승업 그림 하나 없는 사대부 집안이 없지..."라는 장면.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와 케네디가 만나던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그렇게 시공간을 직조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 가진 Q&A에서 이태원 사장은 깐느에서 상을 타고 싶다고 솔직히 밝혔다.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장면. 영화에서 최민식이 기와 지붕 위에 올라가서 고래고래 욕을 할 때 아래 마당에서 한 양반이 뭐라 한다. 바로 그 할아버지가 제작자 이태원씨다. 그가 상을 타는 것이 우리 영화를 풍요롭게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참. 요즘 우리 한국영화에 남녀성기를 일컫는 육두문자 욕설이 난무하고 있다. 실제 요즘 사람들 입이 거칠어지기도 했다. 몇 년 전 방송에서 남녀성기를 일컫는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자고 하던 김용옥 씨가 참여한 각본이지만 최민식이 내뱉는 욕설이 너무 고답적이었다. "야, 이 눔아.." "개~자식!" 수준에서 말이다. 흥미로왔다. 

취화선 (2002)
감독: 임권택
주연: 최민식, 안성기, 유호정, 손예진, 김여진
한국개봉: 2002/5/10
55회 깐느영화제(2002) 공식경쟁부문 진출작
네이버영화정보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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