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8. 07:54ㆍ한국영화리뷰
요즘 같은 시대에는 애처롭게 느껴질 그 시절 풍속사(風俗史)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 공개되었다. 지난 22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이해영 감독의 6부작 오리지널 <애마>는 1982년 개봉된 안소영 주연의 영화 <애마부인>의 제작과정에 빗대 당시 처절했던 충무로 영화인의 열정과 밑바닥에서 끌어 오르던 민초들의 민주화 염원,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불온한 시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8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애마>는 신성영화사 대표 구중모(진선규)가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파격적 영화를 만들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이제 벗기는 영화, 본격적인 성인영화의 시대가 되었어. 주제는 성욕이야!” 이른바 전두환 시절의 ‘3S’(스크린,스포츠,섹스)의 시대에 발맞추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전속계약에 묶어놓았던 톱스타 정희란(이하늬)은 이제 지긋지긋한 에로물은 그만 찍고 싶다. 예술영화를 하는 권도일 감독(김종수)이 준비하고 있는 <육식의 밤>에 출연하고 싶어 한다. 제작자 구중모는 신인감독 곽인우(조현철)의 시나리오 <애마>를 찍기 위해 오디션을 통해 신인 여배우 신주애(방효린)를 캐스팅하고, 희란에게는 의도적으로 조역 에리카를 맡긴다.
곽 감독은 주체적 여성상의 애마를 그리고 싶지만 1980년대 충무로 상황은 녹록치 않다. 문공부는 사전검열을 통해 시나리오에 줄을 그어대고, 영화사 대표는 더욱 노골적으로 참견하고, 정희란은 에리카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신인배우마저 애마를 변화시킨다. 이제 곽인우 감독은 ‘은근하게, 하지만 노출에 진배없이~’ 자신의 ‘애마’를 필름에 담아야한다. 그 과정에서 촬영현장의 에피소드, 청와대의 홀딱쇼, 문공부의 칼질은 애달픈 그 시대의 유산이다. 과연 신인감독은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을까, 신인 여배우는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에리카(희란)는 덫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관객들은 여배우의 눈부신 나신을 스크린에서 제대로 만나볼 수 있을까. 팔팔서울올림픽을 앞둔 대한민국에서, 넷플릭스가 나오려면 40년은 더 있어야할 상황에서 말이다.
넷플릭스 <애마>는 그 시절 극장에서 상영되던 한국영화(‘방화’)를 본 관객들은 애틋한 감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문예물’의 전통이 남아있던 충무로는 전두환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쳐야했다. ‘정체’가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3S 정책’이라고 두루뭉술 이야기한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컬러TV시대가 도래하였고, 오랜 억압의 사슬을 풀고 ‘유교보이’들의 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판은 살아남기 위해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당시 충무로가 ‘정치영화’나 ‘SF’를 만들 순 없었다. 남은 카드는 ‘성애물’이었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나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같은 문예물의 탈을 쓴 작품을 거치며 <애마부인>에서 활짝 꽃을 핀 것이다. 그렇다고 ‘애마부인’을 지금의 잣대로 생각하면 안 된다. 검열관의 가위손이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으니. 넷플릭스 <애마>에는 ‘공보부’가 사전 시나리오 검열에서 36군데를 손보라고 회신한다. 곽인우가 그러했듯이 당시 영화인들은 창의적으로 성애물을 찍는다. 그러다보니 ‘과장된 신음’과 ‘뜬끔 없는 화롯불’, ‘민망한 소품’, ‘무의미한 자연풍광’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이런 방식은 TV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증기기관차의 모습으로 진화한다!)
이해영 감독은 <애마부인> 시절의 충무로 모습을 통해 당시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어두운 시절 강철대오의 시민과 의식 있는 영화인을 호출하려는 듯하다. 청와대 인물에 대한 정치적 공격, 연예부 기자들에 대한 적대감 등은 너무 단순하다. 대신 정희란과 신주애의 관계는 도드라진다. 두 사람의 드라마만으로도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1950) 같은 여성 서사를 완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애마>는 그럭저럭 그 시절을 회고하게 하는 작품이다. 비디오 조그셔틀을 이용하듯이 휙휙 건너가는 것도 레트로 감성이다. 김종수가 연기하는 권도일 감독은 김기영 감독과 유현목 감독을 연상시킨다. OTT에 <애마부인>시리즈가 많이 올라와 있으니 보시고 감탄하시길. ‘그 시절에 저런 영화에?’라고 놀라게 될 것이다. <애마부인>은 수많은 속편을 쏟아냈고, 유사상품을 양산했다. 그 뒤 <젖소부인>이 등장한 뒤 창의적인 패러디까지 ‘비디오샵’을 점령하기도 했다.
‘애마’(愛馬)가 ‘애마’(愛麻)로 바뀐 것은 충무로의 오래된 농담인 줄 알았는데 실제 문공부의 지시사항이었단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전신인 영진공(영화진흥공사) 시절 기관지 <격월간 영화> 1982년 3,4월호에는 <애마부인>의 시나리오를 쓴 이문웅 작가의 글이 있다. “愛馬夫人이라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서 작품신고를 했더니 馬자가 男性의 상징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男性 상징 대신 작품과는 전혀 엉뚱한 삼베 麻자로 改名하여 使用하라는.”
그런데, 이문웅 작가는 뒤에 이런 글도 덧붙였다. “컬러TV에 대응하여 우리 영화가 살 길은 하나밖에 없다.. 컬러TV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映像의 世界를 개척하는 길 뿐이다. 어드벤처 필름이나 SF나 서구적 공포와 괴기物 등은 문화의 배경이나 리얼리티가 결여돼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그러면 무엇이냐. 가장 우리 생활과 밀접한, 굶주려 있는 에로티시즘의 개발뿐이다...” 1980년대, 14인치 브라운관 시절 영화인의 고민이다. 이제 멀티플렉스도 비틀거리는 넷플릭스 시대 영화인들의 선택은 무엇일까.
참, ‘애마부인’하니 실비아 크리스텔의 ‘엠마뉴엘’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 1985년 실비아 크리스텔이 <마타 하리>라는 영화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가 <애마부인> 제목을 듣고는 웃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역시 영화는 제목이 ‘반’이다. (‘침성애자’ 신에서 정희란이 앉아 있는 의자는 ‘엠마뉴엘 부인’의 시그니처이다)
▶애마 ▶기획/각본/감독:이해영 ▶제작:더 램프, kick ▶제작: 박은경 이해영 ▶프로듀서:정창훈 ▶촬영:이의태 ▶출연: 이하늬(정희란) 방효린(신주애) 진선규(구중호) 조현철(곽인우) 우지현(기석) 이주영(이근하) 김종수(권도일 감독) 이성욱(최실장) 이홍내(양기자) 안소영(방현자/특별출연) 이주원(최성호/특별출연) 박해준(이부장/우정출연)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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