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킬러의 정명론(正名論) (민규동 감독, 이혜영 김성철 주연)

2025. 5. 2. 10:59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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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일가게에서 ’낙과‘(落果)나 ’못난이 사과‘ 같은 상품을 만날 때가 있다. ’정품‘보다는 조금 싼 가격으로 유통된다. 그런데 ‘파과’라니. ‘파과’는 상품성이 없는 과일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구병모 작가의 소설에서는 ‘파과’를 ‘낙과’ 정도로 이야기한다. 흠이 있어서 사람들의 손이 잘 가지 않지만 충분히 맛있는 상품이라고. 구병모 소설 <파과>는 민규동 감독의 영화에서 ‘킬러’의 유통기한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때는 1975년.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날 밤, 소녀 하나가 비틀대더니 쓰러진다. 그 소녀를 거두어준 사람은 미군부대 앞에서 장사를 하는 류(김무열) 부부이다. 소녀는 그 가게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정당방위에 준하는 첫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식당주인 류는 소녀에게서 ‘킬러’의 자질, 존재(가치)의 쓸모를 발견한다. 그렇게 류에 의해 ‘손톱’이라 불리며 킬러, 청부살인, 혹은 사회악을 척결하는 배트맨 같은 존재로 자란다. 그리고 ‘손톱’은 ‘조각’이 되고 어느새 세월은 흘러 그 킬러는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 은퇴 소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도구를 놓을 순 없다. 지하철 빌런을 머리비녀 하나로 순식간에 해치우고 복귀한 그 날, 회사에서 신입을 하나 보게 된다. ‘업계 레전드’인 ‘조각’을 흠모한다는 그 놈이 낯설지가 않다. 이제, 은퇴를 코앞에 둔 왕년의 킬러와 과거를 알 수 없는 라이징 킬러의 어색한 동행이 시작된다.
 
이런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치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키의 <1Q84>와 <존 윅>이 대중문화의 상상력과 킬러의 직업정신에 대해 충분히 예열을 시켰다. 그리고 리암 니슨의 노익장 액션이 거듭되면서 할머니킬러도 자연스럽다. 대신 관객은 류마티스를 앓는 킬러라든가, 치매 초기 증세의 프로페셔널이라는 다양한 변주를 기대하게 된다. 이들에게 작업을 맡긴다면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믿을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테니. 그 임무를 이혜영 배우가 맡았다. 리암 니슨을 생각한다면 올해 예순 셋 밖에 안 된 팔팔한 킬러인 셈이다.
 
‘조각’이 속한 회사는 사회를 어둡게,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존재를 바퀴벌레로 인식하며, 이런 악성벌레를 퇴치하는 게 그들의 신성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회사이름조차 거룩한 ‘신성방역’이다. 허름한 건물의 사무실 한쪽 벽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하고 있다”같은 비장한 문구가 걸려있다. 이혜영이 연기하는 인물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본명보다는 ‘손톱’, ‘조각’으로 불리었고, 대모님, 어르신, 레전드 같은 존경을 담은 이름에서부터 ‘노땅’, 늙은 사자‘, ’유통기한 지난 폐기물‘까지 다양하다. 

영화는 사회정화, 방역사업에 일생을 바친 ’조각‘이 어쩌면 그 과정에서 저지른 잘못, 혹은 후과로 말년에 ’응징‘받는 이야기를 담는 듯하다. 자신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소명의식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제목 '파과'는 중층적이다. 상품성을 잃은 과일(破果)이자, 소녀가 살인을 저지르며 상실한 무언가를 암시한다. 한편, 한자에서 '파과(破瓜)'의 '瓜'는 16세를 의미했다. 문학적 상상력을 더하면, 소녀의 성장통이자 깨진 순수성에 대한 은유가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굳이 과장된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조각 흠이 난 과일처럼, 늙고 상처 입은 킬러의 심리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을 울린다.

‘손톱’을 굳이 ‘조각’(爪角)으로 바꾼 것은 흥미롭다. 짐승의 발톱처럼, 생존과 공격을 위한 최후의 무기가 될 것이다. <파과>는 과즙이 흐르는 달콤한 이야기가 아니다. 조각난 살결에서 배어나는 피처럼, 아프고 잔혹한 동화다. 민규동 감독은 두 킬러의 서사와 상징을 모두 완성했을까. 끝내 이루지 못한 꿈처럼, 이 작품은 쓸쓸하게 남는다. 

▶파과 (영제:The Old Woman With The Knife) ▶감독:민규동 ▶원작: 구병모 소설<파과> ▶출연:이혜영, 김성철, 연우진, 김무열, 신시아, 김강우, 조한철, 최무성, 옥자연, 박지아, 현봉식 ▶제작:수필름 ▶배급:NEW ▶개봉:2025년 4월 30일/122분/15세이상관람가
[사진=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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