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2003)과 <괴물>(2006)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뒤, <마더>(2009) 직전에 찍은 단편영화가 있다. 미셀 공드리, 레오 카락스 등 유명감독과 함께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하는 옴니버스 영화 <도쿄!>이다. 미셀 공드리 감독은 ‘아키라와 히로코’를 레오 카락스는 ‘광인’을, 봉준호 감독은 ‘흔들리는 도쿄’(Shaking Tokyo)를 담당했다. 발매된 DVD에 들어있는 코멘터리에서 봉 감독은 “레오 카락스는 영화보고 좋아했던 감독이다. 이 영화로 칸에 가서 직접 만났다. 좋아했던 감독과 옴니버스를 찍게 되다니 신기하고,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한다. 아마, 이번 오스카 투어에서도 봉 감독은 초현실적 경험을 많이 했으리라.
봉 감독, 도쿄를 뒤흔들다
봉준호 감독의 30분짜리 단편 ‘흔들리는 도쿄’는 도쿄의 작은 가정집에 10년째 콕 박혀 살고 있는 ‘히키코모리’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남자(카가와 테루유키)는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하고, 햇빛 쬐는 것을 싫어한다. 10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살고 있다. 아버지가 매달 보내주는 편지봉투 속 현금으로 모든 것을 시켜먹는다. 특히 토요일에는 피자! 벨소리와 함께 문을 빼꼼 열고는 피자박스를 받는다. 감히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날, 살짝 열린 문틈으로 피자배달부(아오이 유우)의 다리가 보인다. 가트벨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지진이 일어난 듯하다. 히키코모리는 ‘완벽한 아지트’를 나와 세상과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일까.
일본 대중문화에는 꽤 많은 ‘히키코모리’가 등장한다. 봉 감독은 도쿄를 다루는 옴니버스를 생각하면서 ‘히키코모리’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가 생각한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다. “도쿄의 모든 사람이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어느 날 지진이라도 일어나서 다들 집밖으로 뛰쳐나온다. 잠깐 지축이 흔들리며 사람들은 우왕좌왕. 그러더니 흔들림이 딱 멈춘다. 갑자기 어색해진 사람들. 주섬주섬, 다시 자기만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봉 감독은 이런 이미지를 영상화시킨다. ‘10년 된’ 히키코모리의 시간은 층층이 쌓인 빈 피자박스와 차곡차곡 벽을 채우는 두루마리 휴지심으로 형상화한다. (봉테일의 섬세함은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하~’하게 된다. 남자가 피자를 먹고 난 뒤, 뒷벽에 쌓인 피자박스의 높이가 달라진다. 1년 동안 더 많이 쌓인 박스라니!)
단편 <흔들리는 도쿄>에는 봉준호라면 기대했음직한 ‘재앙과 맞닿은 일본열도’라든지 ‘막다른 골목에 이른 일본현대인의 분노’ 같은 거대담론은 없다. 오히려 제한된 공간과 한정적 인물이 펼치는 귀여운 소품이다. 게다가 봉준호 특유의 감성, 혹은 유머가 곳곳에 숨어있다. 4차원 캐릭터 아오이 유우가 뜬금없이 펼치는 ‘손가락절단’ 마술. 봉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DVD코멘터리에서 이렇게 답한다. “‘상징적인 거세’, 평론가들이 물어보면 답하려고 준비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물어보더라.” 참으로 유쾌하다. (혹시, <기생충>에서 박명훈이 살던 지하방의 소품을 떠올린다면 더욱 놀랄 듯하다)
물론, <흔들리는 도쿄>는 만화광, 영화광이었던 봉준호 감독이 그 당시 품었던 히키코모리의 세상을 일본 배우들과 함께 흥미롭게, 낭만적으로, 그리고 ‘세기말적’으로 끌어낸다. 봉준호 감독이 아이폰CF를 만들어도 걸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참, 차도 사람도 없는 텅텅 빈 도쿄 시부야 교차로는 월요일 아침에 찍었고, CG의 힘으로 완성된 장면이란다. (박재환 201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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