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1999) 홍콩영화에 있어 신기원을 이룬 작품이 몇 개 된다. <영웅본색>, < 지존무상>, <천녀유혼>등등. 그 중 서극 또는 정소동의 <동방불패>만큼 아시아권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작품도 드물 것이다. <동방불패>는 그 동안 축적된 홍콩영화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다. 동양적인 정서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서극이 미국에서 익힌 SF의 특징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중국전통 소설작법에 바탕을 둔다. 물론 김용의 원작 <소오강호>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무협-협객소설의 기본 프롯을 충실히 수행한다. 종족 간 혹은 계파 간의 갈등구조가 우선한다. 무협소설을 보면 가장 기본이 되는 줄거리는 '사부' 또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대결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明나라 지배계급인 한족(漢族)과 피억압세력인 묘족(苗族)간의 내재된 갈등구조를 보여준다. 또한 묘족의 정통종교인 일월신교 내부의 지도권 쟁탈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곁들여진다. 그리고, 보통 원수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이야기 진행의 주요 관심사이며 문제해결의 키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화산파의 수제자 영호충(이연걸)이 무슨 일로 강호를 떠나기로 하고 제자 수 명과 함께 강호를 떠난다. 그러다가 묘족 내부의 일에 끼어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호충은 각기 다른 몇 명의 여인을 알게 된다. 우선은 같은 화산파의 오리. 또 묘족이며 일월신교의 원래 교주인 임아행의 딸인 임영영(관지림), 물론 관지림의 수하인 남봉황이란 여자도 영호충을 은근히 사모하는 입장이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애정스토리는 '동방불패'란 인물이다.
'동방불패'는 원래 일월신교 임아행의 부하였지만, 천하의 무림비결서인 <규화보전>을 익히고는 임아행을 가두고 교주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규화보전>을 익히면 음양의 조화로 '남성'이 '여성'으로 변화게 된다. 동방불패는 기본적으로 너무나 사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영호충을 보는 순간 '여인'의 순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한 편으로는 각 무림 계파의 무술극이 펼쳐지게 되고, 또 하나는 임아행의 복수극, 그리고, 영호충과 동방불패와의 결코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야기가 전체 구조이다.
동방불패는 천하를 얻기 위해 고독한 결단으로 <규화보전>의 비밀을 체득했지만, 그는 이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애첩 씨씨도 멀리 하게 된다. 그가 애첩에게 하는 말에 " 천하를 위해 내 머리를 바쳐도 날 기억해 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오히려 천하사람들이 날 배신할 것이다."
영호충과 동방불패는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사로잡힌다. 물론 영호충은 동방불패가 여자인 줄로만 알고, 동방불패는 동방불패 나름대로 사랑을 할 수 없는 자기에 대한 깊은 슬픔을 안게 된다. 영호충이 "날 만나서 한 마디도 하지 않구려. 아마 일본인이라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오, 차라리 잘 되었소. 사람들이 말이 너무 많아 생각과는 다른 말을 남발하여 시비의 발단이 되니까..."
이에 임청하는 말 한 마디 못하고 피리를 분다. 이에 영호충이 시를 읊조린다.
"천하의 영웅이 되려는 야심을 떨칠 수 없어
강호에 뛰어든 지도 어언 십여 년이 흘렸네
헛되이 품었던 거창한 패업(覇業)의 꿈
문득 돌아보니 일장춘몽이어라"
이 노래는 둘의 마지막 대결 장면에서 임청하가 다시 읊조리게 된다.
'동방불패'는 관지림의 부탁으로 임아행을 구해내지만 임아행의 본색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존재. 그는 영호충의 무술을 가상히 여겨 자신과 함께 동방불패에게 복수를 하고 천하를 향유하자고 한다. 하지만 영호충은 이를 거절하고 임아행은 영호충을 제거하려 한다. 이때 관지림이 나타난다. 어색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이 펼쳐진다. 영호충에게는 선택의 길이 놓인다. 죽든지 무공의 기를 완전히 잃든지, 아니면 관지림과 결혼하여 임아행의 복수를 돕든지.
그러나, 영호충을 사모하는 관지림이 칼을 뽑아들고, 자신의 목에 대고는 "한족에게 시집가느니 죽어버리겠어요"한다. 그 순간 영호충은 목숨을 구하고, 두 사람의 인연은 차갑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관지림은 영호충을 살리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영호충을 포기한 것이다.
영호충에 대한 여인의 눈물은 하나 더 있다. 동방불패이다. 동방불패를 찾아온 영호충. 동방불패는 영호충에 대한 마음을 그의 애첩 씨씨에게 맡긴다. 대신 동침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임청하의 눈물이 이 영화의 가장 영화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두 주인공은 서로 건널 수 없는 비극의 강을 건너게 된다.
동방불패인줄 알고 씨씨와 잠자리에 드는 영호충. 그 시간에 동방불패는 임아행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게 된다. 강호를 떠나기로 했던 화산파 제자들이 모두 동방불패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리고.. 동방불패가 침실로 왔을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의 애첩의 자살... 그리고, 영호충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동고동락하던 화산파 형제자매들의 차가운 시신 뿐.. 영호충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불꽃이 인다.
강호를 떠나려했던 영호충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를 부르는 강호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임아행의 말대로 사람과 관계가 있으면 그곳이 강호인데 어찌 강호를 떠날 수 있으리오. 영호충은 동방불패가 바로 임청하이란 사실에 놀라게 되고, 전날 자신과 동침한 여자가 그(녀)인지 아닌지에 대해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장대한 액션극이 펼쳐진다. 끝내 동방불패는 그 비밀을 말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영호충을 사모하던 여인은 하나씩 떠나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협극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호충의 대범함에 사모하던 상문천이 자신의 팔을 자르는 장면. "교주의 명을 이행하지 못하면 팔을 자르는 것이 무사의 도리요..."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몇 장면은 정말 홍콩무협영화 영상미학의 결정판이다. 처음 영호충과 묘족의 상문천이 대결하는 장면과, 영호충이 처음 동방불패의 밀실로 침입해 가는 장면은 이후 홍콩 무협영화의 기본 대결장면의 전형이 된다. 등잔불의 작은 불꽃이 칼날 위에서 춤을 추고, 실과 바늘이 허공을 날아 가는 장면들은 지극히 홍콩영화적인 매력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투장면 십여 분은 홍콩영화의 최대 성과물이다.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고, 온갖 무술의 기교가 펼쳐진다.
가끔 가다 다시 봐도 여전히 재미있는 홍콩영화.
참, 이 영화 자막에 이연걸의 극중 이름을 '영고충' 이라고 한게 있는데 영호충(令狐沖)이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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