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모 감독의 <영웅>이 있기 전에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 있었고, 그 전에 서극의 <황비홍>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 장철이나 호금전의 수많은 무협 쿵후영화들이 존재했다. 그 이전에는? 글쎄요? 홍콩의 영화사를 살펴보면 이미 오래 전에 ‘황비홍’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있었으며 ‘소림사’ 이름을 단 영화들이 수두룩하다. 중국영화사, 정확히는 홍콩영화사에서 초창기부터 이런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있다. 1930년대부터 영화를 찍기 시작하여 5~60년대에 수십 편의 황비홍 영화와 무협영화에 출연했던 배우가 조달화(曺達華)이다. 할아버지가 다 된 조달화는 성룡 영화에서 가끔 만날 수 있는 배우이다. ‘할아버지’ 조달화가 출연한 영화를 한 편 소개한다.
황태래 감독의 1990년도 작품 <마등여래신장>(摩登如來神掌)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유덕화와 왕조현이 나온 코믹 액션물인데 족보가 좀 있다. 제목의 ‘摩登’은 ‘modern’을 뜻한다. (우리나라에는 [무림지존]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가 출시되었다) 원래 조달화가 1960년대에 주인공으로 나왔던 ‘여래신장’은 쇼 브라더스 이전에 꽤나 인기가 있었던 활극물이다. 다행히 ‘마등여래신장’에는 영화 곳곳에 옛날 영화가 삽입되어 있다. 황태래 감독은 1982년에 이미 이동승이나 혜영홍, 나열, 그리고 물론 조달화 등을 캐스팅하여 ‘여래신장’을 리메이크한 적이 있다. 1990년도 작품에는 왕정이 관여한다. 오락영화의 지존인 왕정은 홍콩사람들이라면 우리나라 ‘홍길동’만큼이나 잘 아는 여래신장 캐릭터를 현대판 여래신장에 절묘하게 집어넣는다.
홍콩의 두 불쌍한 샐러리맨 유덕화와 진백상(陳百祥)은 사업차 중국을 찾는다. 골동품을 밀거래하다가 공안에 쫓기게 되고 어쩌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에 떨어지게 된다. 그들이 그 곳에서 발견한 것은 무술비결서였다. 순식간에 절정의 무술실력을 갖게 된 유덕화가 장풍을 날리면서 동굴 깊숙이 밀봉되었던 옛 사람들이 부활한다. 원(元) 시절의 공주 왕조현과 그 시녀이다. 유덕화와 진백상은 이들을 현대의 홍콩으로 데려온다. 하필이며 왕조현 공주를 쫓아다니던 사악한 무술고단자 원화(元華)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이들의 뒤를 쫓는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장풍을 부는 황당한 무술실력을 가진 유덕화와 공주를 차지하기 위해 시공을 초월한 원화가 건곤일척의 대결을 펼치게 된다.
기본 컨셉은 같은 해 개봉된 장예모 주연(정소동 감독)의 <진용>과 비슷하다. 하지만 왕정은 자신의 주특기인 개그적인 요소를 적절히 배합했다. 700년의 잠을 깬 왕조현은 홍콩에서 전혀 지장 없이 지낸다. 알고 보니 그 옛날 마르코 폴로에게서 외국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옛날 영화만 삽입한 것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 ‘누가 로저래빗을 모함했나’처럼 애니메이션과의 합성도 시도한다.
곧 개봉될 주성치의 <쿵푸 허슬>에도 등장하는 원화는 1970년대부터 홍콩 액션물을 주름잡던 인물이다. 이소룡의 대역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했던 이 사람의 얼굴은 워낙 개성적이어서 홍콩영화팬에게 낯익은 얼굴. 기차 안에서 원화와 기싸움을 펼치는 할아버지는 바로 ‘동방불패’의 내시 유순(劉洵)이다. 그럼 조달화는?
원화가 왕조현 공주를 빼앗기 위해 유덕화의 아파트를 난장판으로 만들 때 등장하는 유덕화의 아버지 역이다. 물론 무술의 ‘무’자로 모르는 평범한 홍콩 노인. 하지만 원화는 그를 ‘여래신장’에 출연했던 바로 그 주인공으로 받아들이며 ‘사부!’라고 말한다. 품세 장면을 흉내 내는 것이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 (물론, 한국관객에게는 그게 왜 명장면인지는 이런 사전 설명이 필요한 일이다!)
원화가 유덕화와 진백상의 입에 누에(천잠)를 밀어넣는 장면은 김용 소설의 [천룡팔부]에서 유탄지가 삼키는 ‘빙잠’을 연상시킨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쇼 브라더스 이전의 홍콩의 무술영화를 보고 싶다.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이런 영화들을 모아 회고전을 마련해 주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박재환 200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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