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1998.9.8) 그제(98년 9월 6일) 구로사와 아키라(흑택명)감독의 사망기사가 영화팬들을 우울하게 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정상적인 (통로로 유통되는 영화만을 보게 되는) 영화팬 가운데 그의 작품을 실제로 대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러브레터>야 어떻게 보았겠지만,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정말 일부 매니아들에게나 통하는 ‘명작감상’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PC통신에 오른 조문 성격의 글을 보면, 적어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외로움을 느낄 만큼 한국에서 푸대접받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아마 일본 내에서보다도 더 많은 흠모자를 거느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본 이 사람의 작품은 <폭주 기관차>(Runaway Train>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원안/스토리를 맡았었고, Andrei Konchalovsky 감독이 존 보이츠, 에릭 로버츠 등을 기용하여 남성미 철철 넘치던 고강도 액션 스피드물을 선보였다. 그걸 구로사와 감독작품입네 하고 만족해 하다가, <라쇼몽>을 보게 되었고, 얼마 전에 <요짐보>를 보게 되었다.
<요짐보>(用心棒)의 영어제목은 <보디가드>(Bodyguard)이다. 케빈 코스너의 보디가드만 생각한다면, 주인을 위해 한 목숨 다 바치는 의리의 사무라이를 다룬 영화일 것 같은데, 영화를 보노라면, 아마 <용병 사무라이>가 낫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의 배경은 1860년대이다.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영주의 칼잡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칼솜씨 하나 갖고 먹고살던 그 시대 이야기이다. 그들은 칼솜씨로 날품팔이 하는 것이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주는 부잣집에 달라붙어 칼을 휘두르고, 고용주의 이권을 챙겨주는 그러한 어두운 시대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주인공, 산주로(이름은 고용주가 묻기에 그냥 눈에 띄는 뽕나무 밭을 힐끗 쳐다보고는 “桑畑三十郞”(쿠와바타케 산주로- 뽕나무 30그루? 뽕밭 서른?)라고 말할 뿐이다. 그가 어느 날 정처 없이 한 마을에 나타난다.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郞) 라는 멋진 배우가 이 산주로 역을 열연한다. 차갑고 황량한 마을. 그는 주막(사케를 만들어 파는 곳)에 기거하며 우선 마을의 정황을 살핀다. 이 마을엔 두 사람의 실력자가 있다. ‘우시토라’와 ‘세이베이’가 그들이다. 이들은 마을의 비단과 술 제조(양조장)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칼질하고, 죽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은 세 사람이다. 하나는 그가 머무르는 주막의 주인노인장 곤지. 곤지는 이 산주로의 등장을 달갑잖게 생각하고, 이러한 죽이고 죽는 일상사가 증오스럽다. 또 한 사람은 그 술집 옆에 살며 관을 짜주는 사람. 언제나 관 만들기에 바쁘다. 그리고, 이 마을의 유일한 관리인 한수케. 하지만, 이 하급관리는 마을의 치안을 책임지는 사람은 아니다. 시간되면 징을 울려 몇 시라고 알리고, 조금이라고도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달라붙어 갖은 아부로 굽실거리는 아전 타입의 사람이다. 노스케가 마을에 왔을 때, 바람소리가 휭휭 들린다. 이에 관리란 작자가 한다는 아부의 소리는 “바람까지 당신이 온 걸 환영하는군요”였다.
자, 그럼 산주로의 분위기 있는 등장과 함께, 실제 그의 칼솜씨는 어떨까? 모두들 궁금해 한다. 그렇게 분위기, 운만 띄우던 산주로가 이 두 집안이 대결하고 있는 마을 공간- 이러한 공간은 웨스턴의 전형이다. 지켜보는 마을사람들, 숨 막히는 결전의 순간-에서 칼 솜씨를 선보인다. 그는 정말 놀랍도로 유려한 칼 솜씨로 단숨에 세 놈을 베어버린다. “여기 관 세 개!” 이 솜씨에 반한 우시토라와 세이베이는 서로 산주로를 요짐보로 끌어들이려하지만, 산주로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그는 자신의 몸값만을 올리고 있다. 두 집안이 일대 격전을 막 벌일 때, 감찰관리가 마을에 도착한다. 감찰 관리가 있을 동안은 마을의 평화가 유지되지만, 뒷돈 대기도 사실 버겁다. 관리가 떠나자, 이제 산주로 쟁탈전(일종의 1급 킬러 스카웃전)이 다시 벌어진다. 이때, 우시토라의 셋째 아들인 노스케가 마을에 나타난다. 그는 권총을 가지고 있다. 이제 산주로의 검과 이 권총이 어느 순간 대결을 하게 되리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마을의 여인네를 하나 두고, 두 집안은 싸움이 벌어진다. 아니 어쩜 산주로가 그러한 싸움을 유발시킨 셈이다. 산주로는 목숨을 걸고, 이 여자를 빼돌려 남편과 아들의 품에 안겨주고, 용병의 대가로 받은 금전 30냥을 내놓는다. 이 바보같이 순박한 사람이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고, 그것 때문에 산주로는 죽도록 맞고, 갇히게 된다. 하지만, 산주로는 탈출에 성공하고, 두 집안의 마지막 결전이 벌어진다. 노스케의 권총으로 세이베이 일가와 그 요짐보들을 몽땅 없애버린다. 산속의 절에서 겨우 몸을 추스린 산주로는 자기를 도와준 주막노인장이 묶여 있는 마을로 내려온다. 그리고 이 집안과의 마지막 칼싸움을 벌인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구도와 배치의 영화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몇 장면만 보더라도 산주로의 시선이 어디서, 어디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커다란 차이를 나타낸다. 영화에서는 이 황량한 마을을 처음으로 나타 낼때 아주 훌륭한 장면을 잡는다. 개 한마리가 사람의 손목을 입에 물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장면. 이 마을엔 곳곳에 시체가 널려있다. 그리고, 처음 산주로를 고용한 세이베이 가족이 모여, 일만 치르고, 산주로를 죽여 버리자는 음모를 꾸밀 때 화면가득 담긴 클로즈업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인 것은 두 집안이 처음 격전을 벌이려 할 때. 패거리들이 서로 고함만 지르고는 선뜻 나서려 하지 않는다. 칼을 길게 뽑아 들고, 엉덩이는 최대한 뒤로 엉거주춤 뺀 채 도망갈 준비부터 하는 듯하다. 사실, 칼은 무섭다. 산주로가 칼을 바람같이 사용하는 것은 예술이다. 칼은 치명적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첫 장면. 작대기를 던져 그 가리키는 방향으로 정처 없이 걸어가는 산주로. 산주로는 사실 이 마을이 어떤 마을이고, 어떤 고용주가 자기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단지, 자기에게 돈을 조금이라도 더 주는 사람이면 된다. 이렇게 주도면밀하고, 때로는 음모가 같은 산주로가 결국 영웅이 되는 것은 수단방법이 비록 비열할지라도 훌륭한 칼솜씨와 따뜻한 인간애(여자를 구하기 위해 그가 벌이는 위험천만한 일련의 행위들) 그리고, 지신을 도와준 노인장을 구하기 위해,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은 그가 요짐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비참한 일본의 한 시절에 살아남은 전형적 영웅상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할 자>가 어디서 영감을 얻었는지는 아마 이 영화보면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라스트맨 스탠딩>은 논외로 하고도 말이다. 황제 구로사와 아키라의 그림자가 얼마나 널리, 깊이 미국 영화아카데미에 끼쳤는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郞) 1920년 중국 칭따오 출생.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97.12.24)에 숨졌다.
[굿바이] 마지막 화장사 (おくりびと,2008) (0) | 2021.01.04 |
---|---|
[비밀] 아내와 딸을 사랑한 남편이자 아버지… (0) | 2019.08.14 |
[프라이드 드라곤 피쉬] 이와이 슌지의 생선요리 (이와이 슌지 감독 Fried dragon fish 1993) (0) | 2019.08.14 |
[개 달리다] X나게 달리다 (최양일 감독 犬、走る DOG RACE ,1998) (0) | 2019.08.14 |
[총알 발레] 폭력의 엘리제 (츠카모토 신야 감독 バレット・バレエ, Bullet Ballet 1998) (0) | 2019.08.14 |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서울국제음식영화제 개막작 (가와세 나오미 감독 あん, An, 2015) (0) | 2019.08.10 |
[철남/테츠오] 로보토 니뽄맨 (츠카모토 신야 감독 鐵男, Tetsuo, The Ironman, 1989) (0) | 2019.07.31 |
[숨은 요새의 세 악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장작의 제왕’ (0) | 2019.07.30 |
[그 남자 흉포하다] 나쁜 경찰 (기타노 다케시 감독 その男,凶暴につき 1989) (0) | 2019.07.30 |
[수라 유키히메] ‘킬 빌’의 원형 일본영화 (후지타 토시야 감독 修羅雪姫, Lady Snowblood ,1973) (0) | 2019.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