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2001-6-22) 영국식 유머는 따분하다. 영국식 신사도란 것도 조금 답답하다. 아마, <타이타닉>에서의 앞뒤 꽉 막힌 선원들을 본다면 조금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국에서 가끔 흥행에 성공을 거두는 자국 영화를 보면 분명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나 프랑스 영화와는 다른 무거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년 영국 내 최고의 히트작 <빌리 엘리어트>가 탄광 노동자를 아버지로 둔 천재 발레리노 소년의 고달프지만 희망에 찬 삶을 볼 수 있었다면, <풀 몬티>같은 영화에서는 암울한 경제상황 아래서의 무거운 페이소스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새로 개봉되는 또 한편의 영국영화 <오! 그레이스> 또한 그러한 묵직한 웃음이 있다.
◇ 심의와의 전쟁 **2001년의 상황임!!!!**
먼저, 이 영화가 우리 나라 극장가에 걸리기까지에는 조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작년도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던 영화는 곧 바로 수입이 되었지만 영상물 등급위원회로부터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다. ‘마약 복용 장면의 과다한 묘사’가 문제였다. 우리나라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들은 법률(<음반 비디오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반드시 등급을 부여받아야한다. 이전의 공연윤리위원회에서 행해지던 심의가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이후 민간자율기관으로 발족된 영상물 등급위원회에 의해 등급이 부여되는데 이 기관은 해당 영화의 편집, 삭제 등에는 일체 간여하지 못하고 단지, ‘전체 관람가, 12세, 15세, 18세 관람가’라는 영화의 등급만을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규정에 의해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는 폭력성, 음란성 등의 영화에 대해서는 3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등급의 분류를 보류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니까, 소위 문제작은 3개월 동안 등급을 주지 않아 상영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현재 등급위의 영화심의 소위원회에는 영화감독 이두용씨를 위원장으로 모두 10명의 위원이 위촉되어 있다. 이들은 마치 미국의 대법원 판사들의 구성만큼이나 보수와 진보인사가 적절히 섞여 있다. 매주 네 차례 열리는 영화심의소위원회서는 재적위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등급이 결정된다. 심의위원 한두 명이 회의에 빠지면 등급이 달라질 소지가 있는 것이다. 예상대로 <오 그레이스>는 보수적인 시각에 의해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고, 영화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필름에 손질을 가해야했다. 영화가 상영되든 말든, 돈은 치렀으니 개봉은 시켜야할 것이니 말이다. 아니면 필름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좀 더 진보적인 심의위원이 새로 위촉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한다. 이 영화의 수입사는 △주인공 부인이 해변에서 처음 대마초를 피는 장면 1분34초 △마을 의사가 대마초를 피우고 취해서 눈이 커진 장면 15초 △부인이 재배한 대마초를 모두 태우자 그 연기에 마을 사람과 경찰관이 취해 춤을 추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39초 등 모두 2분 28초의 분량을 잘라내고 다시 심의를 넣어 마침내 18일, 18세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고 이번 주말 개봉하게 된 것이다. 그럼, 도대체 이 영화는 어떤 내용이기에 이런 법석을 떨었을까.
◇ 중년여인의 고생, 마을사람들의 공모
영화는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지는 영국의 촌마을인 콘월 지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편의 코믹한 범죄드라마이다. 마을 아녀자들과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온실에서 화초 키우는 재미로 살아가는 중년의 그레이스는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엄청난 삶의 고통에 빠지게 된다. 남편이 몰래 은행대출을 받아가며 사업을 하다가 다 날렸던 것이다. 곳곳으로부터 빚 독촉장과 대출금 회수 압력의 전화가 걸려오는 가운데, 그레이스 여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원사로부터 귀가 솔깃한 제의를 받게 된다. 바로, 대마초를 키우자는 것이다. 화초 재배에 일가견이 있었던 그레이스는 몰래 자신의 온실에서 일등급 품질의 대마초를 대량 재배하게 된다. 그리고, 재배된 대마초를 런던에까지 직접 가져가서 암흑가 사람과 접촉하며 위험한 거래를 시도한다.
◇ 우아한 중년 지키기, 우아한 사업 유지하기
분명, 불법인 대마초를 불법재배하고, 불법 마약거래를 하는 그레이스는 분명 범법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범죄 행위에 말려드는 모든 사람을 공범으로 만들고 만다. 이는 3년 전 개봉되었던 영국영화 <웨이킹 네드>를 연상시킨다. <웨이킹 네드>는 고립된 한 마을에 유족이 전혀 없는 네드라는 사람이 엄청난 액수의 복권에 당첨된 채 죽어버리자, 나머지 모든 마을사람들이 서로 작당, 공모하여 가짜 네드를 앞세워 당첨금을 받아 나눠 가지기로 하는 것이다. 이 영화 <오 그레이스>에서도 순박하기 그지없는 이 마을 사람들이 대마초를 재배하는 불쌍한 중년 과부의 불법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처리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코믹함이 준비되어있다.
신인 감독 나이젤 콜은 제목 ‘Saving Grace’가 암시하듯이 중년의 과부 그레이스가 불법행위를 하면서도 인격적 고귀함을 지키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갑작스레 빈곤과 역경의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은 한번쯤은 범죄의 유혹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감독은 그러한 즐거운 상상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대표적 락 가수가 계간지 <사회비평>과의 인터뷰를 통해 대마초 흡연의 합법화를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마약은) 좋은 건 아니지만, 필요할 수는 있다”며 포문을 연 그는 “국가가 개인의 외로움을 달랠 권리를 가지고 있느냐. 권리도 없으면서 왜 잡아 가두는 것이냐”고 했다. 그리고는 음반이 일본에서 성공을 하면 대통령과 면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도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아마도, 영국영화 특유의 어눌한 코믹함이 매력인 이 영화가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이런저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박재환 200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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