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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배창호 감독 The Winter Of The Year Was Warm, 1984)

한국영화리뷰

by 내이름은★박재환 2019. 7. 3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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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환 1988) 난 한때 배창호의 지독한 팬이었다. 그게 아마도 <안녕하세요 하느님>까지였을 것이다. 그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을 어린 나이에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물론 남아있는 기억이야 김보연이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랑 키스할 때 우산으로 카메라 앞을 탁 가리는 재기발랄한 장면과 공옥진 여사의 춤추던 장면만이 단편적으로 떠오를 뿐이지만 말이다. 당시 국산영화진흥책의 일환으로 우수영화란 것을 만드는 제작사에게는 외국영화 수입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보지도 않을 영화들-반공영화나 문예물 같은-우수영화란 명목으로 만들어졌다. 배창호가 만든 그러한 우수영화는 현대 정주영의 쥬베일항 신화를 영화화한 <철인들>이란 게 있다. 배창호는 물론 그러한 자신의 감독 데뷔작 전에 이미 영화판에 얼굴을 내비친 게 있다. 그의 화려한 충무로 데뷔작(?)은 바로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이다.

 

난 그의 모든 작품을 좋아했었다. 아마, 우리나라 감독 작품 중 하나같이 볼만한, 그리고, 다시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이 헐리우드와 홍콩영화에 경도되면서 우리영화에 발을 끊더니 지금은 배창호가 가끔 가다가 무슨 작품 만들고 있니, 누구와 결혼한다느니 하는 기사를 볼 때 무척이나 오래된 옛 연인의 근황을 전해 듣는 것처럼 가슴 아련한 느낌이 있었다. 오늘 아침에 케이블 캐치원에서 배창호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방영되었다. , 너무 기뻤다. 이 작품은 요즘 같은 시절에 꼭 볼 만하다. <약속>이 나오기 십년 전에 나온 정통 멜러물, 정통 최루성 영화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감독들이 가장 만들기 어려운 이데올로기를 다루었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같은 외형적 이데올로기의 침잠은 아니다. 이 영화는 한때 텔레비전의 힘을 보여준 이산가족 찾기 시류에 영합하여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원작이 박완서라면 분명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박완서의 풍성한 문학향기와 배창호의 산뜻한 연출, 그리고, 출연배우- 안성기,이미숙, 한진희, 유지인의 감칠맛 나는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소설가의 분단문학 작품을 젊은 영화인이 어떻게 영상에 옮겼는지 볼 수 있다. 오늘날처럼 남북간의 교류가 잦을 때야(으로는 유람선이 오가고, 西로는 침투선이 들락거리는) 멋진 이야기가 많이 만들어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한국전쟁이란 것은, 그리고 분단이란 것은 민족 전체 구성원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한 가족의 비극으로 압축하면서도 그래서, 그러한 범위의 축소로 인해서 가장 명료하게 한국인의 비극을 담아낸다. 아마도 총칼로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이나 퍼붓는 네이팜탄에서 쓰러지는 인간군상보다, 전쟁 후 어긋나는 이러한 가족이야기를 통해 금강산과 침투정에 얽힌 한민족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 장면은 이미숙이 응급실로 실려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유지인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의사가 "무슨 관계시죠?"..... 그리고 화면은 플래시백으로 625로 넘어간다. 유지인은 당시 9. 극중 이름은 한수지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 수인은 6. 오목이라 불린다. 아버지가 반동으로 처형되고, 엄마의 손에 이끌려 피난행렬에 섞여있다. 적기의 공습으로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그 와중에 엄마도 죽는다. 이제 9살 난 수지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동생을 업고 남으로남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철모르는 동생을 데리고 삶을 찾기란 너무나 어렵다. "어린 나이에 살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 언니는 더 어린 동생을 떼어 놓고 혼자 피난할 생각을 한다. "오목아..너 떡 먹고 싶지? 내가 떡 사올게..." 그러고선, 목걸이를 걸어주고는 "언니 꼭 돌아와야 해.."라는 동생의 말을 뒤로 하고 헤어진다. (, 이런 일에 쉽게 운다.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 그것은 분단이 나은 6살 난, 9살 난, 어린자매의 가장 잔인한 약속이 된 것이었다)

 

13년 후. 언니는 대학생이 되었고, 성악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고아원에서 자라났고, 어떻게 어떻게 하여(그 과정은 정말 슬픈 일이다. ‘이모라고 따라간 집안에서 허드렛일을 하다 이모부라고 속고 있었던 사람에게 성폭행당하기 직전 도망 나온다) 공원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전전하게 된다. (뭐 그렇다고 극한 인생까지 떨어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박완서의 힘이리다.)

 

스토리의 힘을 이야기하기 위해 줄거리를 좀 알아보자면, 동생 오목이는 공장에 일을 하게 되고, 그 공장 사장 한진희는 당시 언니인 유지인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 어느 날, 키스를 거부하고 가버리는 유지인에게 화가 나서 홧김에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이미숙과 하루 잔다. 이미숙은 자신이 하룻밤 농락당한 것을 알게 되지만, 유지인이 언니인 줄은 모른다. 유지인은 그 소란 속에서 분명 이미숙이 헤어질 때 걸어준 목걸이를 발견하지만, 외면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미숙은 자신을 어릴 때 유치원 시절부터 보호해주던 안성기와 결혼하지만, 이미 한진희의 아이를 갖게 되고, 안성기는 월남전에서 다리를 다치고 귀국하고...... 정말 이야기 전개는 우리나라 작가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한 것 같다. 전쟁, 헤어짐, 이별, 분노, 외면, 슬픔, 격정,...... 등등...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의 한 영화평론가의 비평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왜 아직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정영일씨나 최인호씨가 그랬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다 좋은데 어쩔 수 없이 한국 멜러물이란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비오는 소리와 기차 기적 소리의 잦은 등장이다. 이것들이 멜랑꼬리 차원을 넘어 신파극수준으로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영화에선 비 내리는 씬이 잦다. 이미숙이 한진희에게 겁탈당하는 날, 정말 운명의 장난처럼 비가 내린다. 그리고, 마지막 탄광에서 사고로 매몰될 때. 막장 밖에서는 비가 끝없이 쏟아진다. 그리고, 안성기의 폭력이 꿈틀댈 때마다 기차의 기적소리가 관객을 안타까움과 원망으로 몰아넣는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러한 개별적 요소는 사실 탓할 것이 전혀 못된다.

 

정교한 소재의 힘은 적어도 <편지>에서 충분히 볼 수 있었잖은가. 빨간 우체통, 그림 같은 집, 그리고, 흔들의자, 시계 등등... 그러한 개별 요소의 활용보다 하늘의 변화와 인간 감정의 복잡미묘함이 더욱 예술적이며 오감을 자극한다. 물론, 배창호 감독도 잘 만들었지만, 내가 감독이었다면, 적어도 마지막에 햇빛 찬란한 광경-일출이나, 풀잎에 맺힌 빗물방울 하나를 보여줌으로써 화해와 해원의 굿을 선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이 영화는 화해와 가족의 복원을 이야기 한다. 이것은 순전히 박완서 문학의 힘이기도 하고, 배창호식 영화연출의 승리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도 유효한 한민족의 눈물의 정서에 호소한 스토리 전개가 가장 큰 힘이지만, 적어도 그 스토리를 읽어내고, 호응하는 것은 결국 4-5천만 우리 민족 공통의 정서이지만 말이다. 백의민족은 여전히 눈물을 믿는다. (박재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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