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洞)] 대만영화가 춤을 춘다!

2008. 2. 21. 08:47홍콩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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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d by 박재환 2000-12-]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의 열악한 영화제작 환경 속에서 차이밍량이나 후샤오시엔, 그리고 이번 깐느를 통해 대가의 반열에 올라선 양덕창 같은 대만 영화감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의 무한한 창의적 능력이기도 하거니와, 외국 영화기획자들의 선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개봉된 양덕창의 <하나 그리고 둘>이 일본 자본의 도움으로 영화화가 가능했다면, 이 영화는 프랑스의 자본과 기획력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영화의 원제 구멍(洞)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차이밍량 감독의 영원한 오브제 '물'이 빠질 수 없다. 그리고, 같은 구멍을 뜻하는 혈(穴)과는 달리, '洞'에는 '보존'과 '숨김', 나아가 '동화'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순전히 중국문자에 대한 1차원적 해석에 의해서이다. 차이밍량 감독의 98년 작품 <구멍>은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고독과 극단적 소외에서 삐져나오는 자아인식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새천년을 앞둔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의 배경은 구세기의 마지막 몇몇 날들의 대만이다. 2000년을 일주일 정도 앞둔 시점의 영화는 온통 '비'와 '고립'과 '슬픔'이 가득하다. 대만이라는 나라 자체가 불행하고 고립된 존재이다. 게다가 이제 정체를 알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해 모든 존재들이 카프카식 '변신'을 거듭한다. 이들 바이러스의 매개체는 물론, '물'이다. 깨끗하지 않은 '물'을 마신 대만 사람들은 조금씩 자신이 바퀴벌레라는 환상에 빠지고, 침대 밑 어둠 속으로만 숨어들어가는 극단적 붕괴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AIDS'로 대변되는 전염과 격리의 악순환의 고리를 의미한다.

차이밍량 감독은 경제적으로 많은 무대배경이나, 대만 영화현실을 넘어서는 많은 등장인물 없이, 한정된 장소에서 한정된 소품으로 한정된 이야기만을 전하는 것이다. 차이밍량의 페르소나 이강생과 양귀매는 끝없이 추적대는 '비'만이 가득한 대만에서 전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황당한 SF적 이야기를 펼친다.

<애정만세>에서와 같이 이들은 고립과 소외를 가장 두려워하면서, 그러한 삶 자체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이다.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는, 혹은 그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듯한 남자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확실히 알수 없는 여자는 한 아파트의 위층과 아래층에 살고 있다. 이들에게선 평소 단 한번의 개인적 교류나 상호인지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어느날 물이 샌다는 이유하나로 배관공이 그들을 막고 있는 천정- 남자입장에선 바닥 -에 조그만 구멍을 낸다. 그리고 그 조그만 구멍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진다. 그것은 지구종말이 가까워하는 카운트다운일수도 있고,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교류의 끝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과 여를 가로막는 벽은 이제 조그만 구멍으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훔쳐보기식 관음증적인 호기심에서 세기말적 엿보기로 이동한다. 이것은 아파트 생활자의 아이러니이며, 독신자들의 희망인 것이다. 관객이 관찰하는 이 아파트에는 오직 세발 자전거의 어린이만이 장난으로 벨을 눌리고는 달아나는 격리된 사람만이 살아간다. 그 아파트에는 이 꼬마 이외에는 그 누구도 커뮤니케이션의 징조를 내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혹은 라디오는 마치 민방위훈련의 비상 연락망처럼 이들에게 유용하지 않은듯한 정보만을 내뱉고 있다.

차이밍량 감독은 이 장마철 빗소리만큼 단조롭고 변화없는 영화에 그의 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컬러풀한 소품을 활용한다. 그것은 1950년대 대만사회를 풍미했던 흘러간 노래들의 반주인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그레이스 창(葛蘭)의 노래는 양귀매에 의해 뮤지컬의 양식으로 관객에게 색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그것은 차이밍량 감독 작품에서는 유일하게 경쾌하고 신나는 '명(明)'의 시퀀스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모두 다섯 차례 양귀매의 춤과 노래가 등장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이강생도 등장한다. 이 논란많은 뮤지컬 장면의 삽입은 관객에게 더욱 많은 상상력을 키운다. '고독녀' 양귀매는 마치 꿈꾸듯 노래와 춤으로 비극적이며 암울한 비오는 대만을 벗어난다. 아마도 그레이스 창의 인용된 노래가사는 밝고, 희망적인 양귀매의 한쪽 면을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이 기이한 남녀의 교류를 잡아낸다. 그것은 세기말의 극단적 바이러스에서 구해내는 희망의 '손'이며, 그간 양귀매를 옭아멨던 소외와 고독, 그리고 치명적 바이러스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차이밍량의 더욱 괴로운 영화 <하류>에서처럼 철저히 망가진 가운데 조그만 희망의 빛을 찾아내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내내 괴로운 감독 차이밍량, 그리고 고독에 도취되어 동참하게 되는 차이밍량. 이번에도 그의 영화에서 느끼는 감정은 동일하다. (박재환 2000/12/2) 


 
洞 (1998)
감독: 차이밍량 (蔡明亮)
출연: 양귀매, 이강생
한국개봉: 2000/11/30
3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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