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몬태나 “죽거나,죽이거나, 살아남거나”

2018. 7. 11. 10:14미국영화리뷰

미국 서부개척사 시대를 다룬 책 중 인디언의 몰락을 연대기적으로 가장 잘 설명한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는 인디언의 명운과 관련된 아주 유명한 말이 나온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라는 말. 원래 이 말은 그 유명한 커스터의 상관이었던 셰리던 장군이 인디언 이주정책을 폭력적으로 밀어붙일 때 나온 말이다. 학살과 추위, 굶주림에 지친 토사위라는 이름의 코만치 추장이 셰리던 앞에서 떠듬떠듬 영어로 “토사위, 좋은 인디언”이라고 말했단다. 그때 셰리던이 한 말이 “내가 본 좋은 인디언은 다 죽었어”였단다. 이 말이 옮겨지면서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인디언멸망사의 헤드카피가 된 셈이다.

존 웨인이 활약하던 서부극(웨스턴 무비)의 시대는 영원히 끝나버렸지만, 그래도 매년 한두 편의 인상적인 서부극은 만들어진다. 이제는 더 이상 재빠른 총잡이의 자태나, 대평원을 주름잡던 개척자정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단지 그 시절 쓰러져간 존재들의 의미를 되짚는다. 언제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1876년 몬태나의 리틀빅혼 카운티에서 죠지 A, 커스터가 지휘하던 제7기병대가 전멸하고, 1890년 연말 운디드니힐에서 대학살이 펼쳐진다. 그리고는 일사천리로 미국 전역에서 ‘그 땅의 원래주인’인 인디언들이 미국 평원에서 ‘인디언보호소’로 내몰리던 1892년의 이야기이다. 

영화 <몬태나>(원제:Hostiles 감독: 스콧 쿠퍼)의 첫 장면은 광활한 평야의 한 오두막집의 정착민 백인가족을 보여준다. 곧이어 코만치 인디언의 습격이 시작된다. 네댓 명의 말탄 인디언들은 백인남자를 죽이고 머리(이마)가죽을 칼로 벗긴다. 그리고 총질이 시작된다. 어린 자녀 셋이 순식간에 죽는다. 겨우 여자(로자먼드 파이크)만이 가까스로 숲으로 달려가 바위 밑에 숨는다.


그 시각 뉴멕시코의 베린저 기지에서는 조셉 블로커 대위(크리스찬 베일)가 명령을 받는다. 병세가 깊어 곧 죽을 샤이엔 인디언 추장을 고향 땅으로 호송해가라는 대통령의 특명이다. 조셉 대위는 인디언이라면 이를 간다. 결국 조셉 블로커는 그 인디언 추장 가족을 이끌고 먼 길을 떠난다. 길 초입에 로자먼드 파이크를 만나고, 중간에 인디언의 습격을 받는다. 길은 멀고도 험하다. 영화는 백인도, 흑인도, 인디언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아이도, 산 자도 죽은 자도 마음 편치 않을 미국사의 압축판을 만나게 된다.

존 웨인과 알란 라드의 호시절을 지나고 서부극은 다양한 모습으로 영화 팬을 찾았다. 물론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것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피해당사자 인디언의 모습을 정면에 내세운 것은 <솔저 블루>(Soldier Blue,1970)때 부터이다. 용감한 기병대들이 어떻게 인디언들을 도륙하고 몰아내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시작된 셈이다.

사실, ‘인디안’이란 용어 자체가 백인들의 착각에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바다를 나섰다가 신대륙에서 만난 그 종족들을 뭉뚱거려 ‘인도인’(인디안)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들이 샤이엔이든, 모히칸이든, 아파치든, 나바호이든. 그냥. 백인 개척인의 적, 인디언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는 그런 미국식 정의의 개척시대를 지나 이제 가해자로서 무릎 꿇고 피해자에게 과거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크리스찬 베일이 시카고에서 기차에 오를 즈음, 이미 총잡이의 시대는 끝났고, 인디언은 학살의 대상을 지나 이미 ‘연민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아주 극소수만이 살아남아서 말이다. 웨스턴의 영광도, 프론티어의 찬미도, 인디언의 수심도 영화 <몬태나>에서는 그저 은은하게, 묵묵하게 숨 쉴 뿐이다. (2018.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