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db에 따르면) 이 영화는 32번째로 영화화된 ‘레미제라블’이라고 한다. 물론 이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들어졌으리라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윤색되어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다니 말이다. 아주 오래 전에 쟝 가방 (혹은 리노 벤츄라? 여하튼 그 시절의 프랑스 배우가) 나오는 칙칙한 프랑스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본 것도 같고, 10년 전 쯤에 다른 영화를 본 것도 같다. 여하튼, 이처럼 같은 작품이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지는 힘은 어디일까.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감성에 호소하는, 그리고 보이는 것 이상의 많은 것을 독자에게 안겨주는 원작의 힘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은 프랑스의 대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가 오랜 집필 끝에 1862년에 완성한 대하소설이다. 천 여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은 분명 읽기에 괴로울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출판사에서도 완역본이 나와 있다. 물론, 아동용 만화, 동화 등도 있다. 난 아주 어릴 때부터 <레 미제라블>, 혹은 <장발장>으로 나온 아동용 책, 혹은 청소년 축약본을 백 번은 더 읽었을 것이다. 신부님이 촛대마저 내주는 장면과 장발장이 수레에 깔린 사람을 구해주기 위해 힘을 쓰는 장면, 그리고, 자베르를 살려주는 장면은 몇 번씩이나 읽고 또 읽어도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어릴 때는 그 소설의 배경을 잘 몰랐지만, 사실 그 책은 책 두께만큼이나 무겁고, 갑갑한 프랑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진짜 프랑스의 진짜 국보급 유산이다.
18세기가 되기 전. 유럽 인구의 1/5이 프랑스에 살고 있을 만큼 당시 프랑스는 유럽문화-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 문화-의 중심지였었다. 농업생산량의 증가와 함께 경제수준은 큰 폭으로 발전하한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 변화(발전)는 분명 어떤 혁명적 씨앗이 되기도 한다. 불행히도 그러한 역사 발전은 조금은 우습게 진행되어간다.
..... 물론 프랑스혁명을 보는 시각도 낭만적 시각과 민중적 투쟁이 ‘주’였을 것이다. 프랑스 역사에 있어서 이른바 앙상레짐이라 부르던 구세대가 존재하였고, 그리고 그 밑에서 막연히 억압받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소작농들과 도시 빈민들의 결속된 풀뿌리 민중의 힘이 꿈틀대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앙상 레짐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민중은 “자유,평등,박애”를 쟁취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200년 뒤 다른 나라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단세포적인 접근을 거부한다..... “방데”라는 지방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난다. 위고의 아버지가 군인으로 이 방데 진압작전에 참여하였었다고 한다. 바스티유 함락 이후에도 프랑스는 혼란과 광기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군주제는 폐지되고 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지휘권의 혼란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계속되었고, 쿠테타와 공포정치가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등장하였고, 왕정이 다시 들어섰고, 그 왕정이 다시 무너졌고, 다시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국이 들어선다. 그리곤 다시 나폴레옹의 조카가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3세라는 이름으로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그는 매우 전제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였고 자유를 억제, 식민지 확장 전쟁을 일으킨다. (오늘날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 왕정을 찬미하고 있다!!) 빅토르 위고는 바로 이러한 때 왕정을 반대하여 영국으로 망명가서는 두꺼운 <레미제라블>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그가 이 광란의 시기에 생각한 것은 언제나 인간의 순수한 마음과 이성을 압도하는 지고지선의 감성이었다. 이처럼, 역사의 혼란기속에서 시인이었던 위고가 지켜 본, 인간성의 상실과 모멸감, 계급질서의 황폐감 속에서 그는 투쟁의 의미와 자유의 소중함을 고통스럽게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고도 인간의 본성에 호소하는 사랑과 용서, 희생과 교훈을 원했을 것이다.
원작소설은 사실 때로는 설교조로, 때로는 (테렌스 말릭처럼) 미려한 문체로 프랑스의 어두운 면을 속속들이 그려내고 있다. 쟝발쟝은 배가 고파 빵 한 조각을 훔쳐 감옥에 가고, 또 몇 차례 탈옥을 하다가 결국 19년을 옥살이하게 된다. 그런 그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 모멸감과 적개감만을 키웠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성당의 신부는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장발장이 한 밤중에 은수저를 훔치다가 신부에게 들켜서는 신부를 때려누이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영화는 다들 아는 내용대로 진행된다. 새로 정착한 곳에서 칭송받는 시장이 되고, 지독한 찰거머리 자베르 경감이 쫓아오고, 팡팅이라는 창녀와 그녀의 딸 코제트가 나오고, 코제트가 성장하여, 마리우스라는 혁명아를 사랑하게 되고, 프랑스는 또다른 혁명의 와중에 휩싸이고… 자베르는 장발장을 풀어주고는 파리의 세느 강변으로 스스로 몸을 던져버리고, 장발장은 자유로운 파리의 찬 아침공기를 들이마시며 달려간다.
하지만, 프랑스 역사와 적어도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많은 점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혁명의 의미와 목적, 의도와 진행은 겉핥기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마치 한국 사람이 미국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을 읽는 것처럼 의미 없는 맹숭맹숭한 메아리를 듣는 셈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분명 관객의 역사지식 부족인 점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적과 아군은 고사하고, 혁명의 숭고한 의지마저 탈색되고, 혁명아라는 사람은 연애 감정에 대사를 그르치기까지 한다. 그런 점에서 장발장은 오히려 현실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분명 한 시절 그런 행동이라면 그는 기회주의자나 패배주의자로 낙인 찍힐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장발장을 천하의 성인이요, 천하의 투사이며, 코제트에게 사랑을 쏟아 붓는 성자로 그려진다.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열연을 구경할 수 있다. 장발장 역을 리암 니슨이 매끈하게 해낸다. 그리고, 냉혈 자베르 경감의 제프리 러시는 과연 명배우였다. 이 영화를 법과 질서의 화신 자베르의 자아상실 측면에서 보아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믿고 지키려했던 법과 질서는 혁명의 와중에서 무너졌고, 사랑과 희생 앞에 비껴서는 것이다. “법보다 밥”이 필요했던 시기였던 것이다. 팡팅이라는 미천한 창녀로 나오는 우마 서먼의 연기변신과 귀엽다 못해, 깜찍한 클레어 데인즈의 코제트 연기는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해 준다.
때로는 문학성 있는 영화를 보는 재미가 있다. 참, 프랑스 국가(國歌)는 끔찍하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국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로 시적 감수성과 철학적 공감으로 가득한 명 가사(?)지만,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에즈 (La Marseillaise)>는 프랑스 혁명당시 불린 투쟁가라서 그런지 상당히 전투적이다. “나가자 조국의 아들딸이여. 영광의 날이 왔도다. 독재에 항거하는 우리의 피묻은 깃발을 날린다. 피묻은 깃발을 날린다. 보라! 저기 압제자의 야비한 무리들의 칼, 우리의 형제자매와 우리의 처자를 죽인다. 무기를 들어라. 대오를 지어라. 나가자! 나가자 우리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 얼마나 섬뜩한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 개막식 때 한 여자 꼬마애가 앙증맞게 나와 국가를 부르는데 “나가자 우리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 그러는 광경을 생각해보라. 그 가사가 전하는 이미지와 문화대국 프랑스의 이미지를 교차시켜본다면 사실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네들은 여전히 그런 전투적인 국가를 불려대며 삼색기를 휘날린다. 그 투쟁적 구호의 고귀함은 인류역사 수천 년을 쓰러뜨리기 위해, 그 해, 프랑스에서 죽어간 그 많은 투사의 영혼을 기리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박재환 1999/3/6)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1998] 감독: 빌 오거스트 출연: 리암 니슨, 제프리 러쉬, 우마 서먼, 클레어 데인즈 한국개봉: 1999/3/13
Bille August’s *Les Misérables* (1998), the 32nd cinematic adaptation of Victor Hugo’s 1862 opus, traces ex-convict Jean Valjean’s redemptive arc amid 19th-century France’s upheavals—from post-Revolutionary chaos to 1848 barricades. Liam Neeson’s stoic Valjean clashes with Geoffrey Rush’s unyielding Javert, embodying law versus mercy, while Uma Thurman’s Fantine and Claire Danes’ Cosette evoke human fragility. Yet, the film’s elegant restraint flattens Hugo’s radical critique of class oppression and revolutionary fervor, rendering history’s tumult more picturesque than profound. ★Reviewer: Park Jae-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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