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1998-9-17) 비디오 가게에서, 저 구석에 먼지 뒤집어서고 있는 보물 같은 작품들을 발견하게 될 때 무지 행복해진다. 이 영화도 그런 ‘숨은 비디오’이다. 피터 위어 감독은 아주 ‘조금’ 유명하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괜찮다는 <행잉 록에서의 피크닉>을 필두로 호주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건너와서 <위트니스(85)>, <죽은 시인의 사회(89)>, <그린 카드(93)>, 그리고 올해 <트루먼 쇼>까지 작품성과 흥행성을 골고루 만족시키는 감독이다. 그가 81년 호주에서 만든 이 영화는 전쟁영화의 명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아마, 좀 덜 비싸게 만들어졌고, 좀 덜 충격적인 <라이언일병 구하기>를 보고 싶거나, 좀 덜 황당한 <스타쉽 트루퍼스>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권해주고 싶다.
이 영화에서 호주의 황량한 들판, 사막을 볼 수 있다. 멜 깁슨이 <매드 맥스>로 세계 영화계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이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가 의외로 내면연기(얼굴을 실룩되고, 마치 코에 마약이라도 흡입한 듯 멍한 그 특유의 표정)에도 상당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물 다섯 무렵의 멜 깁슨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키(Mark Lee)와 프랭크(Mel Gibson)이다. 나름 이상을 갖고 있던 두 젊은이가 전쟁이란 비정한 현장으로 날아가서는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는 드라마이다. 때는 1915년, 일본도, 독일도 그 어떤 나라도 위협이 되지 않는 태평양의 외따로 떨어진 이 섬나라의 청년 이야기이다. 아키는 달리기(단거리 육상경기)에 모든 꿈을 걸고 있다. 첫 장면부터 아키는 그의 삼촌 잭으로부터 강훈련을 받고 있다. “너의 다리는 뭐지?” “용수철” “그 다리로 뭘 하지?” “달릴 거에요”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지?” “표범보다 빨리 달릴 수 있어요.” 이 대사는 그가 죽어갈 때 귓가를 맴도는 말이기도 하다.
아키는 동네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참전할 것이라는데 말에 자기도 무척이나 군에 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반대하고, 특별히 입대해야할 이유가 없기에 ‘육상연습’에나 매진한다. 어느 날 육상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된다. 여기에 나타난 프랭크. 프랭크는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다만 한 가지 가진 재주가 있다면 누구보다도 빨리 달릴 수 있는 발과 그걸로 도박하는 습관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아키가 우승하고, 프랭크는 그가 가진 돈을 모두 날린다. 그 다음날 여관을 몰래 빠져나오려는 어색한 멜 깁슨이나, 식당에서 아키가 먹다 남긴 그릇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멜 깁슨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덤이다. 둘은 이내 친해진다. 아키는 입대하고 싶어 했지만, 너무 어려 보인다는 징집관에 의해 퇴짜당한다. 아키는 기마병이 되고 싶었다. 프랭크가 그런다. 우리 고향 Perth에서는 가능할거야. 그래서 둘은 화물기차에 몰래 올라 퍼스로 향한다. 물론 엉뚱한 곳에 떨어져서 땡볕에 며칠을 고생하더니 겨우 퍼스에 도착한다. 아키나 프랭크는 모두 참전의 뚜렷한 목적이 없다.
그들이 가려는 전선은 이집트(혹은 터키)의 갈리폴리이다. 그곳에선 터키-독일군이 영국군과 일진일퇴를 공방하고 있는 곳이었다. 호주군인이 왜 그 먼나라까지 가지? “독일이 먼저 잘못 했을 거야. 지금 안 막으면, 여기에까지 쳐들어올지 몰라.” 그렇게 젊은이들이 자기랑은 전혀 상관없는 국경선까지 달려가서, 자기나라에는 총 한방 쏘지 않은 적과 싸운다. 그것도 1915년에 말이다.
어쨌든 아키는 기병대로, 프랭크는 보병으로 이집트 카이로에 가게 된다. (스타쉽 트루퍼스의 원형이다. 젊은이들이 각자의 꿈을 가지고 살다가, 어른-시민권을 가진-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바퀴벌레 사냥에 나가는 것처럼) 이 영화는 후반까지는 전쟁영화다운 총성도 포성도 없이 젊은이의 고뇌와 우스꽝스런 전쟁의 뒷모습만이 스케치된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뒤로 보이고, 사막에서 훈련을 하는 그들의 장난스런 모습을 보라. 쉬는 시간이면 이집트 잡상인이 그야말로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팔고, 또한, 그들이 참전하러 행군할 때에도 같이 달라붙어 이것 팔고, 저것 팔고.. 그리고, 군인들 상대로 하는 여자들까지.
모든 것이 자기네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결코 자기네 일과는 상관없는 불쌍한 이집트인을 보여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카이로에서 재회한 아키와 프랭크가 피라미드까지 달리기 하는 것. 피라밋에 낙서한다.(자연훼손!) “나폴레옹의 군인들 여기 오다” 라는 낙서 밑에 “1915년 프랭키와 아키”..라고.. 그들의 우정은 석양이 멋진 피라밋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전쟁터로 보내진다. 말이 전쟁터이지, 저 높은 고지에 자리 잡은 터키군이 아래로 기관총을 쏘아대며, 호주군은 꼼짝도 못하고 있는 입장. 어느 날, 영국군 2만 5천이 상륙하기로 되어 있다며,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상륙작전과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장면이 재현된다. 진지에서 나가는 족족 고지의 기관총 세례를 받는다. 이건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다. 왜 전쟁에서 달리기 선수가 나왔는지 이해가 간다. 첫째 열이 진지에서 일렬로 “돌격”하며 나서는 순간 전멸한다. 둘째 열이 또다시 돌격..하며 나가자마자 전멸한다. 한 발자국도 전진 못하고 말이다. 제대로 된 장교라면, 더 이상 진격명령을 내릴 순 없다. “포격이 시작되며 통신이 끊겨…”그래서 전령- 원래는 아키가 지목되었지만, 아키는 자신은 총을 쏘고 싶다며, 프랭크를 추천하였다. 전령이 저쪽에서 사정도 모르는 높은 분에게 달려가서 이러 저러하니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프랭크는 쏟아지는 총알을 피해 달려간다. 하지만 높은 분(대령)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영국군이 상륙해야 하니, 어떤 일이 있어도 점령하라” 이 말을 전해들은 진지의 예약된 죽은 목숨들.. 프랭크는 건의한다. 더 높은 사람(스타급)에게 부탁하죠? 그래서 더 높은 사람- 더 멀리 달려야 한다 -에게 뛰어간다. 더 높은 사람은 그제서야 상황을 판단하고, 프랭크에게 진지점령 명령을 철회한다. 프랭크는 기쁜 마음에 진지로 달려간다. 하지만, 통신선은 복구되었고, 그 대령은 호통 친다. 왜, 돌격 않느냐고…. 어쩔 수 없이 3열에게 돌격준비 명령을 내린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오는 프랭크, 진지에서는 전부들 일렬로 돌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 돼..안 돼…”하며.. 달려오는 프랭크..하지만, 돌격명령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죽음을 향해 뛰쳐나가는 호주군인들… 그중엔 아키도 있다. 쏟아지는 총탄. 아키가 총을 맞으며, 스톱 되고. 영화는 끝난다. 프랭크의 절망, 아키의 죽음을 지켜봐야한다.
호주의 젊은 청년들이 조국을 위해 참전하였지만, 그들은 조국이 왜 그들에게 그런 무모한 명령을 내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여기서 그렇게 죽음으로써 조국이 무엇을 얻게 되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원래 전쟁이란 것은, 그리고, 애국이란 것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집단 이데올로기가 내포되어 있다. 비록 개죽음이겠지만, 그것은 충분히 미화될 것이고, 충분히 위로받을 것이다.
몇 장면은 참 멋있었다.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카이로의 바닷가에서 호주의 젊은 군인들이 발가벗고 잠수하는 장면. 라이언에서 첫 장면에서 총 맞고 바닷물에 떨어지는 군인들(수중촬영씬)을 인상 깊게 본 나로서는 이 맑지 않은 바닷물에서 꿈틀되는 젊은 영혼들을 보며 무척이나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리폴리가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는 나는 왜 호주애들이 그렇게 멀리 날아가서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야하는지 안타까웠다. 영화는 은연중에 전쟁에 대한 그러한 어리석음과 광기를 고발하는 것이다.
(2003/3/8) 홈페이지를 다시 꾸미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2002년 5월에 이런 외신기사가 있었다. 갈리폴리 전투에 참가했던 호주군인이 전리품을 챙겨왔는데, 85년이 지나서 후손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신고했다고 한다. 전리품이 뭐냐고? 놀랍게도 터키군인의 머리라고 한다. 호주재향군인회 관계자는 충격적이라며 터키 정부에 사망자확인 수속을 밟는다고 한다. 1915년 4월 25일, 영국+호주+뉴질랜드 동맹국과 독일+터키 군이 갈리폴리반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결국 터키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에서 쌍방은 50만 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4월 25일은 호주에서는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다. (박재환 1998/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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