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2005/3/31) 오래 전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올린 적이 있는데 최근 원작소설을 다시 읽은 뒤, 영화를 다시 한 번 보고, 리뷰를 다시 쓴다.
홍콩 일간지 <<명보>>(明報)의 주필이자 사장이며, 사주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용(金鏞)은 ‘신필'(神筆)로 불린다. 1924년 중국 절강성 출신인 그는 1955년 나이 31살에 ‘서검구은록’을 필두로 왕성하게 무협소설을 써낸다. 이중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는 이른바 ‘사조3부곡’으로 불리며 김용 소설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이 소설은 모두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에 쓰여졌지만 그 후 김용은 몇 차례 가필, 수정작업을 진행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신조협려]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작업을 했었고 그 수정본이 ‘김영사’에 의해 새로 출간되었다. (오래 전 고려원에서 나온 [영웅문]1,2,3부가 각기 사조영웅전-신조협려-의천도룡기이다. 김영사는 작년에 사조영웅전, 올해 초 신조협려를 내놓았고, 연말에 의천도룡기을 새로 낼 예정이란다)
먼저 [사조영웅전]은 ‘곽정’과 ‘황용’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들 부부를 둘러싸고 이른바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 등 무협고수들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몽고가 중국을 지배할 때 몽고에서 태어난 곽정은 중원에서 여러 스승으로부터 각종 무예를 전수 받는다. 곽정의 아버지 곽소천, 양강의 아버지 양철심이 생명이 위급한 절박한 상황에서 의형제를 맺게 되는 것이 이 대하소설의 서두이다. 다행히 곽정은 착하고 올곧게 자라지만 양강은 자신의 출생신분도 모른 채 악행만 저지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민족애에 가득 찬 곽정과 황용은 친구이기도한 양강의 죽음에 일말의 아쉬움을 갖고 있다. 양강은 오랑캐에 붙어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신조협려]는 이들 인물의 후세대를 중심인물로 내세운다. 양강의 아들 양과가 [신조협려]의 주인공이 된다. 양과는 처음 곽정-황용 부부에게 맡겨지는데 양강의 잔악무도했던 성격을 알기에 양과를 천진교에 보내어 무예를 익히게 한다. 하지만 타고난 반항적 성격을 가진 양과는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대상을 알 수 없는 복수심에 천진교를 박차고 나온다. 그리곤 천진교 옆에 있는 ‘고묘파’ 소용녀와 함께 ‘옥녀심경’이라는 절정의 무예를 익히게 된다.
쉽게 짐작이 가듯 김용의 그 길고 긴 대하무협지를 2시간도 안 되는 영화 한 편에 다 집어넣는 것은 냉장고에 코끼리를 밀어 넣는 것처럼 힘든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번 영화 [영웅문]은 그런대로 원작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대체적인 인물들, 웬만한 에피소드는 다 소화해내는 수완을 보이고 있다.
양과(장국영)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고묘파 소용녀와 지내게 된다. 처음에는 사부-제자의 관계이다. 소용녀가 스승이다. 김용의 해설을 보니 중국 송(宋)대가 인의규범이 가장 철저하게 지켜졌던 때라고 한다. 제자가 스승을 사모하는 것은 당시 규범으로 보아선, 그리고 무협의 세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터부였던 것이다. 이런 인의예절을 극복하고 지고지순한 남녀간의 사랑이 어쩌면 김용 [신조협려]의 주된 테마일지 모른다. 소설에서 절정의 무공을 익힐 때 소용녀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양과가 아닌 전진파 윤지평 도사에게 동정을 잃고 만다. 소용녀는 자신의 몸을 가진 사람이 양과인 줄 알고, 양과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소용녀가 “이제 우린 하나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 못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비극적 오해가 원작소설을 이끄는 힘이기도 하다.
원작 소설과 이 영화에서도 윤지평은 김용 소설에 등장하는 캐럭터 중 최고 악당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윤지평이란 사람이 이 당시 실존인물이다 보니 80년대 이후 김용은 중국 쪽에 존재하는 윤지평의 후손으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최근 나온 수정판에서 ‘윤지평’대신 ‘견지병’이란 인물로 이 사악한 캐릭터를 대체한다. (물론 수정판에서 견지병은 순간의 욕정으로 빚어낸 비극에 대해 엄청난 자괴감을 느끼고 영웅적 죽음으로 만회하러 한다. 읽고 있노라면 윤지평-견지병이란 인물에 갖게 되는 분노를 어느 정도 상쇄시킨다!)
장국영이 출연한 83년도 영화 [영웅문]의 홍콩 개봉제목은 [신조협려]도 아니고 [영웅문]도 아닌 <양과와 소용녀>이다. 장철과 왕우, 강대위 등의 찬란한 이름을 가진 쇼 브라더스의 작품이기도 하다. 장철 감독은 김용의 [사조영웅전]을 세 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었다. 쇼 브라더스는 당시 인기를 누리던 소설 [신조협려]도 당연히 영화로 옮겼다. 화산(華山)이 감독을 맡았고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 쇼 브라더스 배우가 다수 출연한다.
그럼, 원작소설이 영화에 다 녹아있나? 물론 아니다. 소용녀의 못된 사자(師姉, 동문선배) 이막수도 나오고, 곽정-황용의 골치거리이며 문제만 일으키는 딸 곽부, 육무쌍 등 주요 조연과 함께, 금륜법사, 곽도 왕자 등 악당들, 황약사, 구양봉, 구처기 같은 유명 인물도 나오긴 다 나온다. 소설에서 보면 굉장히 규모가 클 것 같은 액션 씬은 실제 쇼 브라더스의 한정된 스튜디 안에서 소박하게 촬영된다.
원작소설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플롯인 양과가 곽부의 칼에 한쪽 팔을 잃는다는 설정과 양과와 소용녀가 16년간 눈물어린 이별을 하게 된다는 내용은 이 영화에서 몽땅 사라진다. 어쩔 수 없잖은가. 일주일 걸려 읽은 소설의 분량을 100분에 밀어 넣으려면 말이다.
소설에서 절대 순수의 협녀 소용녀로 등장하는 배우는 옹정정(翁靜晶)이란 배우이다. 이 배우는 <갈채>, <제일차>에 이어 잇달아 장국영과 공연한 배우이다. ‘장국영의 연인’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이는 연예신문 기사 이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옹정정은 굉장히 특이한 경력을 선보이는데 영화판을 일찍 떠난 후 법률 공부를 한 후 변호사가 되었고 꽤 유명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남편은 쇼 브라더스의 명장 ‘유가량’ 감독(무술감독, 배우)이다. [양과와 소용녀] 촬영 당시 옹정정이 장국영을 짝사랑했다는 소문에 대해 옹정정은 이미 그 당시 유가량과 연애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국영의 초창기 작품 [양과와 소용녀], 그리고 쇼 브라더스 말년의 무협물, 김용 원작 소설, 옹정정이라는 배우를 만나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의 하나. 이 작품은 여러모로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박재환 200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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