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무더웠던 8월 4일, 바다 건너 미국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매사추세츠의 폴 리버에 사는 부유한 기업가/금융가인 앤드류 보든과 그의 아내 애비 보든이 집안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당시 그 집에는 작은 딸 리지 보든과 하녀 매기가 있었다. 큰딸 엠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중이었다. 보든 부부는 도끼로 수십 차례 가격을 당한 끔찍한 상태였다. 경찰은 수사에 나섰고, 뜻밖에도 딸 ‘리지’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한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었지만, 평의 결과 무죄로 풀려난다. 당시 재판에서는 그런 교양 넘치는 집안의 규수가 그렇게 잔인한 살인을 저지를 수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리지 보든 사건’은 그날 이후 미국의 또 다른 전설이 되었다. 과연 1892년의 미국 양가집 규수는 손도끼로 부모를 수십 차례 내리치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를 수 없는 것일까. 이 이야기는 100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이야기로, 드라마로, 영화로 만들어졌다.(넷플릭스에 드라마도 있다!) 유튜브에서 ‘리지 사건’을 검색하면 아마추어 범죄학자들이 내세우는 가설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리지 보든’을 다룬 최신작 ‘리지’(제목: Lizzie 감독:크레이그 맥닐)가 지난 주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과연 리지가 제 부모를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따라가 보자.
영화 ‘리지’는 여배우 클로에 세비니가 친구 브라이스 카스(극본)와 함께 공을 들인 작품이다. 너무나 유명한 리지 사건을 다루면서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분명 두 가지이다. 리지가 간질을 앓고 정신적으로 피폐된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 그리고 사건 발생 6개월 전에 보든 집에 가정부로 들어온 매기(브리짓 설리반 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매기라 불린다)라는 존재이다.
아버지 앤드류 보덴은 여러 사업을 펼쳤고, 부동산 수완도 좋아 꽤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지만 소박한 집에서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가 잔인하게 죽었을 때 남겨진 재산은 30만 달러(요즘 화폐가치로 837만 달러)였다고 위키피디아에는 나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혹은 시대적 상황에 맞지 않게 자의식 강한 리지는 부친과 뾰족하게 충돌한다. 밤이 되자 돈 많고 점잖은, 전형적인 백인 노신사는 하녀 매기의 방을 찾아간다. (성폭행을 암시한다!) 만약, 그것이 살인으로 연결된다면 공통의 분노를 가진 리지와 매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기에 더해, 만약 리지와 매기가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뛰어넘어 ‘미묘하지만 제어할 수 없는 어떤 불꽃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면? ‘리지’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즈비언 드라마’가 더해진 것이다. 이런 참신한(?) 발상은 사건발생 후 한 세기가 지난 뒤 미스터리 작가 에드 맥베인(에반 헌터)이 ‘리지’ 책을 내면서 내놓은 설정이다.
이미 잘 알려진 범죄이야기와 법정극이 크레이그 맥닐 감독에 의해 숨 막히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치정의 드라마로 변신한다. ‘사악한’ 삼촌의 등장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눈감고 있는 어머니(계모이다)까지. 작은 집에서 펼쳐지는 몇몇 안 되는 등장인물의 갈등이 예민하게 부대끼더니 마침내 8월 4일의 아침이 되고 만다.
리지 사건을 다룬 (유튜브의) 많은 영상에서는 도끼와 도끼자루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 ‘리지’에서는 살인의 순간(도끼를 휘두를 때), 살인범의 복장에 주목하게 된다. ‘올 누드’이다. 사건 당시 32살의 노처녀였던, 간질 증세를 가졌던, 억압적 아버지 밑에서 본성을 꾹꾹 누르고 있었던 리지와 그런 리지에 의해 무대에 오른 매기의 모습과 행동과, 대사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남자는 모를 거야. 여자는 할 수 있어.”라는 말의 무게가 도끼날의 날카로움과 같다.
무죄판결을 받은 리지는 이후 매기와도, 언니 엠마와도 인연을 끊는다.(정확히는 끊긴다!) 그리고 66살에 죽을 때까지 외롭게 혼자 살았단다.
영화는 제인 오스틴 소설을 읽다가 어느 순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만나는 느낌이 든다. 흥미롭다.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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