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 우리들의 일그러진 ‘중딩’ 영웅 (연상호 감독 The King of Pigs 2011)

2011. 11. 3. 14:32애니메이션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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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내의 조직화된 폭력문화와 애써 눈 감거나 공범으로 빨려드는 무감각을 날카롭게 지적한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6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정과 비리의 반장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의 추악한 면모를 소름끼치게 그려냈다. 그리고 지난 주, 한국사회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인터넷뉴스를 휩쓸었다. 대한민국 어느 여중학교에서 여선생과 여학생이 서로 머리채를 끌어당기며 싸움을 벌였다는 기사이다. 분명 ‘학교사회’에는 선생과 학생이 각자 있어야할 자리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잘못된 질서와 체계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우울한 신호이다. 그런 우울한 때에 만화영화 한 편이 개봉된다. 올해 독립영화계 최고의 수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이다. <돼지의 왕>은 지난 달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다. 만화(독립)영화의 한계로 일부/특정 극장에서 개봉되지만 한국사회, 학교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챙겨봐야 할 ‘필견의 돼지’ 영화임에 분명하다.

15년 전의 사건, 그리고 트라우마

아파트. 집안 가재도구에는 차압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한 남자가 지금 막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한 것이다. 아내는 죽은 채 식탁에 엎어져있고 남자는 망연자실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남자는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이 남자 회사부도로 패닉에 빠진 황경민이다. 한편 소규모 출판사에서 대필작가로 글을 써주며 편집장에게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면 살아가는 정종석. 애꿎은 아내에게 화풀이하던 날 황경민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15년 전. 중학교 동창이다. 이 둘은 술을 마시며 끔찍했던 자신들의 학창시절을 회상한다. 학교에는 짱이 있고 학년별로 위계질서가 있고 교실 내에는 잔인한 ‘자율적’ 질서가 존재하던 그 시절. 계집애 같았던 경민이나 소심한 종석은 그런 학교질서의 희생자이며, 옹호자이며, 방관자였다. 나이와 상관없는 폭력성과 나름대로의 이해가능한 질서체제가 위태롭게 유지되던 그 학교에 전학생이 오면서 불안정한 질서는 극도의 긴장과 공포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경민과 종석은 향후 15년 동안 서로 외면할 어떤 ‘끔찍한 사건’의 한복판에 있게 된다.

각자의 사연, 각자의 미래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초등학교나 고등학교가 아닌 중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다. 너무 어리지도 다 커버리지도 않은 애매한 시점의 ‘애어른’이 펼치는 인간사회의 축소판은 충격의 강도를 더한다. 문제 학생이거나 피해학생이거나 이들 모두에겐 그들 성격만큼이나 처연한 가족의 사연이 있기 마련일 것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가정사를 가진 이들 중학생들은 학교에서는 학교의 룰(교장이나 선생님의 룰이 아닌!)을 지켜야하고 그 바운더리 내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품성을 키워 나가야하는 것이다. 그런 체제에서는 담임선생님이, 교과부가, 공자선생님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희생자이며 옹호자인 학생을 ‘돼지’로 보고 있다. “돼지는 열심히 먹지만 죽게 된다는 것을 몰라.” 돼지는 그 속에서 안전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안정된 체제에서 ‘돼지의 왕’이 존재하는 것이다. ‘돼지의 왕’은 ‘개’처럼 약자를 희롱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영화에서는 ‘고양이’도 등장한다. 은유적으로 묘사되는 일련의 과격행동과 충동발언들은 충분히 이해된다. 중학생들 사회에도 그들은 일반사회와는 유리된 공포의 시간들이 있고 그들의 유약한 힘으로는 질서의 회복, 나아가 권력의 재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유약함과 체념 속 수용이 결국 미래의 전체사회를 불온하게 만들고 비정하게 조립하는 것이다. 마치 교도소와 국회가 동일선상에서 논의되는 것처럼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힘은 연상호 감독의 스토리에 있다. 이게 나중에 실사영화로 다시 만들어진대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영화는 픽사나 지블리 스타일의 방식은 아니다. 마치 담고자하는 이야기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기 위해서인지 날카롭고 거칠고 어둡다. 하지만 관객들은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충분히 안다. 대한민국의 학교가 그러했고, 그런 학교를 나온(일찍 퇴학 맞든, 졸업하여 상급학교 진학했든) 학생이 사회의 진짜 일원이 되었을 때는 그 사회란 것도 그 학교만큼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결국 문제는 ‘무상급식’이나 ‘SNS’가 아니라 ‘학교’이며, 그 연장선상에서의 ‘가정’인 것이다. 이 영화는 정말 무서운 ‘대한민국 사회백서’이다. (박재환, 20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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