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녀유혼 2011] 새로운 섭소천, 새로운 천녀유혼

2011. 5. 12. 11:06홍콩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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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녀유혼 (1959. 이한상 감독)
천녀유혼1 (1987, 정소동 감독  장국영 왕조현 주연)
▶ 천녀유혼2 (1990, 정소동 감독 장국영 왕조현 주연) - 이건 언제 리뷰 쓸려나....
천녀유혼3 (1991, 정소동 감독  양조위 왕조현 주연)


최근에 극장에서 홍콩영화 보신 적 있나요? 한국극장가에 내걸리는 홍콩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작년에 홍콩과 대만을 합친 중화권영화의 국내 시장점유율이 겨우 1.2%이다. 그러나 한때는 홍콩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와 나란히 한국시장을 주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의 신작영화들이 매주 쏟아지던 호시절. 그때는 임청하, 장만옥, 왕조현이 여신이었다. 그 시절 진정한 ‘싸나이’의 우정과 의리, 강호의 도를 부르짖던 수많은 홍콩영화들이 한국 영화팬들의 심성을 뒤흔들었다. 그러던 홍콩영화는 지독한 자기복제와 재능의 소진으로 기나긴 부진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 옛날의 영광은 오늘날의 자양분이 된다. 중국의 넘치는 돈은 영화계에도 스며들었고 대중문화의 첨병인 영화산업은 가장 각광받는 블루칩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들어 중국영화계는 홍콩의 영화자산과 한국의 영화기술과 손잡고 대작 영화에 올인하고 있다. 수많은 중국의 역사 속 인물들이 줄줄이 스크린에서 부활하고 있으며 한 시절을 풍미했던 홍콩영화들이 서서히 동면에서 깨어나고 있다. <천녀유혼>도 그러하다. 1987년 홍콩영화계의 재간둥이였던 서극이 만든 <천녀유혼>은 당시의 홍콩영화의 영광을 오롯이 기억하는 영화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장국영의 아우라와 왕조현의 아름다움이 뿜어내는 전설적 러브스토리는 천년만년 갈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20여년 만에 새로운 배우들로 새롭게 해석되어 관객을 찾는다. <천녀유혼2011>이다.




달라진 <천녀유혼2011>


1987년 장국영이 맡았던 영채신 역은 중국의 떠오르는 별 여소군이 맡는다. 장국영은 주막을 돌아다니며 돈을 걷는 수금원 역이었다. 이번에 여소군은 관아에서 산골마을로 파견된 수맥 기술자로 나온다. 왕조현이 맡아 숱한 남성 팬들을 설레게 했던 ‘귀신’ 섭소천 역은 새로이 중국의 유역비가 맡는다. 유역비는 이미 영화와 TV드라마를 통해 국내에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2011년 판에서 대반전의 묘미를 안겨주는 충격적인 캐스팅은 퇴마사 연적하 역을 홍콩의 미남배우 고천락이 맡았다는 것이다. 그 옛날 털북숭이에 산적같이 생겼던 우마를 기억한다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가치전복이다. 여소군과 유역비의 러브스토리에 고천락이 어떻게 끼어들까. <도화선>, <엽문> 등으로 액션영화에 비범한 재능을 보인 홍콩 엽위신 감독은 로맨스와 액션 중 어디에 방점을 찍을까.


섭소천을 사랑하는 영채신, 그리고 연적하


2011년 천녀유혼은 조금 달라진 러브 스토리이다. 연적하는 퇴마사(獵妖師)이다. 스승의 명에 따라 사형(師兄)과 함께 인간 세상에 숨어살고 있는 요괴들을 쫓아 퇴치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어느 날 요괴 하나를 쫓고 있다가 그만 홀리고 만다. 바로 흑산(黑山)일대에 출몰하는 섭소천이었다. ‘사탕’이 매개물이 되어 둘은 어느새 사랑에 빠진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연적하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 죽이든가 죽든가. 서로가 사랑했었던 기억을 영원히 봉인한다. 세월이 지난 뒤 흑산촌에 가뭄이 든다. 관아에서 나온 영채신(여소군)은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산으로 올라간다. 그곳은 요괴가 살고 있는 곳. 영채신이 소천을 만나는 순간 연적하가 나타난다. 연적하은 여전히 요괴들을 쫓고 있다. 순진한 영채신이 보기엔 연적하가 여자를 죽이는 살인마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소천은 그런 연적하를 기억할 수 없다. 영채신은 연적하의 손길에서 소천을 구해주러 나서고 이내 순정을 품게 된다. 소천도 끝없이 자신에게 희생하는 이 남자가 자꾸 맘에 끌린다. 그런데 연적하란 인물은 왜 자꾸 끼어들까. 연적하는 영채신에게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소천은 마침내 기억의 봉인에서 차츰 어렴풋이 영채신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인간과 요괴는 공존할 수 없는 듯.


사랑의 기억, 희생하는 사랑


2011년판에서는 퇴마사 연적하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단순히 영채신-섭소천의 이룰 수 없는 인간과 귀신과의 사랑을 다룬 것이 아니라 요괴와 퇴마사의 사랑을 이야기하다니. 게다가 그 요괴는 그 사랑을 기억 못하고 또 다른 인간과 사랑에 빠진다. 그것을 지켜보는 퇴마사의 심정은 어떨까. 달라진 이야기를 듣게 되면 장국영판 <천녀유혼>을 기억하는 사람은 심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천녀유혼>의 원작이 되는 소설 속 이야기는 어떤가.



원작 포송령의 <<요재지의>> 중 섭소천 이야기



<천녀유혼>은 중국 청나라 문인인 포송령(蒲松龄)이란 사람이 쓴 <요재지의>(聊斋志异)라는 책에 수록된 단편 <섭소천>(聂小倩)이 원작이다. <요재지의>는 기괴한 이야기를 좋아했던 포송령이 살아생전 모았던 괴이한 이야기가 500편 가까이 수록되어있다. 중국판 <전설의 고향>인 셈이다. 그런데 <섭소천>은 3천자 남짓의 한문으로 쓰인 문어체 소설이다. 지금 독자가 이 책을 읽자며 내용이 디테일하지도 비주얼하지도 않다. 그래도 원작을 조금 소개하면 이렇다.



▶ 포송령의 <요재지의>는 몇군데 출판에서 번역출간되었는데 민음사에서 나온 6권짜리 책에 수록된 <섭소천>삽화




절강성 사람 영채신은 품성이 굳세고 올곧았다. 어느 날 금화(金華)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다 허물어진 난약사(兰若寺)란 절에 묵게 된다. 그런데 그날 밤 섬서 말씨를 쓰는 연적하라는 서생도 함께 묵게 된다. 그날 밤 아리따운 미녀가 방으로 들어와 영채신을 유혹하지만 영채신은 여자를 심하게 꾸짖고 쫓아낸다. 여자는 황금덩어리도 줘보지만 영채신은 요지부동. 다음날 또 다른 서생이 건넌방에 묵는데 이 남자는 시체로 발견된다. 발바닥 한가운데 송곳으로 찌른 듯한 상처가 있고 거기서 피가 다 빨린 것이다. 그날 밤 여자는 다시 영채신 앞에 나타나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18살에 요절하여 절 근처에 매장된 섭소천이며 요물의 협박을 받아 이곳에 묵는 남자들을 홀려 죽이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밤 요물이 나타나 당신을 죽이려할 것이라고 일려준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연적하는 자신은 검객이라며 도술을 써서 요물을 물리친다. 영채신은 섭소천의 유골을 파내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다. 그런데 섭소천이 다시 나타서 고마움의 표시로 영채신을 위해 집안일을 대신 해준다. 이후 영채신은 과거에 급제하고 소천은 첩이 되어 아들 낳았단다.

그러니, <요재지의> 속 <섭소천>이야기는 등장인물도 얼마 안 되고 스펙터클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애틋한 사랑이야기도 아니다. 유부남이 성실했고 귀신은 첩이 되어서라도 은혜를 갚는다는 봉건시대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유전되면서 살이 붙고 색깔이 더해지는 성질이 있다. 서극이 영화로 만들 때는 에로틱한 면에 나무귀신이라는 볼거리까지 보태어 더욱 생생한 이야기로 만들어낸 것이다.


엽위신 감독은 중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 이야기를 다시 영화로 만들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영채신과 섭소천의 단순한 사랑 이야기에 제3자인 연적하를 개입시킨 것이다. 어쩌면 요괴를 쫓아다니는 운명을 진 검객(퇴마사) 연적하의 이야기가 훨씬 드라마틱하다. 자신이 죽여야 하는 대상과 사랑에 빠지다니. 그리고 그 사랑의 기억을 지워야하는 아픔까지.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의 사랑)를 기억 못한다니. 구구절절 애절하고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런 드라마틱한 사랑의 이야기를 제대로 형상화하진 못했다. 영화 초반에 보이는 고천락(연적하)의 눈물의 의미를 후반부에 가서 알게 되지만 그 사랑을 관객이 가슴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타이트하지 못하다. 참, 이 영화의 CG는 한국업체가 맡았단다. 대단하다.


어쩌면 장국영-왕조현의 영화를 기억하는 영화팬들은 그 애틋한 1987년의 기억을 봉인해야할 시점인 것 같다. (박재환, 2011.5.12)

영화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엽위신 감독 - 유역비 - 홍콩 중견배우 혜영홍.  이날 협찬받은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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