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의 눈물] 몬도가네 아마조네스

2010. 3. 19. 12:12다큐멘터리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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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 아주 엽기적이고, 이국적인 풍물을 이야기할 때 몬도가네라고 한다. 이것은 1960년 초에 만들어진 이탈리아 영화(다큐멘터리) 제목에서 유래한다. 그 영화는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본 이국적이며, 원시적인 기이한 풍물목록이다. 한국인의 식견(犬)풍습 같은 것 말이다. (다행히 한국대신 대만이 타깃이 되었다) 이태리 감독은 세계 곳곳을 돌며 괴상한 문화풍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대만의 개고기레스토랑을 포함하여, 소에게 맥주를 먹이는 일본(고급 육질의 고급 육우가 된다), 추락한 비행기를 숭배하는 미개인, 돼지에게 젖을 물리는 종족 등을 보여준다. 요즘같이 비디오나 다큐멘터리 채널, 유튜브가 없는 시절에 꽤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몬도가네’는 이탈리아말로 ‘개들의 세상(Dog's World)’이란 뜻이란다. 그러니,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아마존에서 그들 스타일로 살아온 그들을 ’개 같은 세상‘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사적 차원에서 제목을 ’몬도가네‘라고 뽑았을 뿐이니 오해마시기 바란다. 몬도가네의 원래 뜻을 몰랐으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말이다

MBC 피디, 아마존에 가다

지난 연말 MBC에서는 창사특집으로 <아마존의 눈물> 5부작을 방송했다. 이미 <북극의 눈물>을 통해 지구온난화로 사라져 가는 북극과 그로 인한 자연재해의 심각성을 ‘와일드’하게 보여주었기에 그 후속편 <아마존의 눈물>에도 관심이 높았다. <아마존의 눈물>은 심야시간대에 편성된 다큐멘터리임에도 시청률이 20%를 웃돌 만큼 호응이 좋았다. 게다가 드물게 제작진(피디, 카메라맨)이 예능프로그램인 <강호동의 무릎팍 도사>에도 나와 다큐멘터리만큼 흥미로운 촬영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제작진의 고생담과 그 다큐멘터리에 실린 깊은(?) 뜻을 마치 DVD에 수록된 감독 코멘터리처럼 수용할 기회를 가졌다. 김진만 피디는 “파괴와 개발의 광풍을 맞이한 아마존에서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뭔가 숭고한 감동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스태프들이 벌레에 물어 뜯겨 만신창이가 된 몸까지 보여주면서 다 오지촬영의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그럼, 스태프들의 고생 끝에 만들어진 <아마존의 눈물>, 그리고 그 극장판의 진(眞) 모습은 어떠한가.

슬픈 열대

아마존강 유역의 밀림은 무려 700만 ㎢이다. 지구에서 가장 큰 열대 우림이자 지구 전체 산소공급량의 20%를 제공하는 그야말로 지구의 허파이다. 그런 지구의 보고가 지난 30년 동안 난개발에 시달리고 있다. 연간 30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내뿜으며 남벌되고, 파헤쳐지고,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그 밀림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수많은 원주민들이 함께 ‘현대화’‘문명화’되어가고 있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아마존의 눈물>은 아마존 밀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원주민 들 중에 조에족과 와우라족 등 몇몇 부족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들의 일상의 삶을 담아낸다. 이른바 ‘문명화된’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든 일부다처제(polygamy), 혹은 일처다부제(polyandry)의 진기한 모습은 확실히 드라마된 오지탐험물이다. 그들은 (아마도) 태곳적부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종족유지 방법임을 터득했을 것이고, 원숭이를 화살로 쏘아 그냥 화덕에 구워먹는 것이 생존의 필수방식임을 체득했을 것이다. 단지, 처음 보거나 ‘문명화된’ 한국시청자에게는 진기한 쇼이겠지만 말이다. 1977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존재가 알려졌다는 조에(Zoe)족은 턱에 ‘뽀뚜루’라는 것을 꽂고 산다. 마치 아프리카 여성에게 가해지는 할례 풍습처럼 뽀뚜루는 (치아/구강)건강을 해칠 뿐 아무런 이득이 없는 기이한 풍습이다. 첫째 남편(나이가 좀 많다)은 사냥을 떠나고 둘째 남편은 하루 종일 거울 쳐다보면 치장에 열을 올리는 한 부족의 가정풍경은 흥미로운 구경거리임에 분명하다. 250여 명의 부족민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사는 와우라(Waura)족은 초경이 시작되는 소녀의 온몸에 뾰족한 물고기 이빨로 상처를 내기도 한다. 사실 이보다 더한 위험천만한 성인의식은 지구상에 여러 곳에서 관찰된다. 그런 기이한 볼거리를 드라마가 있는 인간사로 재구성하는 것이 요즘 다큐멘터리의 미덕이 되었다. 사실 <몬도가네> 이전, 영화란 것이 발명되고 나서 한동안 초창기 필름의 많은 양은 지구상 곳곳의 사람들과 부족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찍어서 ‘문명화된 사회의 구성원에게’ 구경시키는 것이었다.

18금 극장판 영화로의 부활

요즘 방송계 화두는 원소스 멀티 유즈, 혹은 콘텐츠의 가치재창조이다. 방송 프로그램이 책으로 엮어져 나오는 것은 고전적인 방식이다. 한류드라마는 뮤지컬이나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다큐멘터리도 그런 다매체 방식이 이용된다. 이미 KBS의 <차마고도>가 극장판으로 만들어져서 극장에서 공개되었다. <아마존의 눈물>도 극장판으로 재편집되었다. (극장판 3D버전도 준비 중이란다) 그럼, 인터넷으로 쉽게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왜 극장판으로 다시 만들었을까. 아마존의 광활한 밀림을 더 넓은 화면으로 지켜보라고? 야생의 신비로움을 극장에서 만끽하라고? 5부작 다큐멘터리를 85분 영화판으로 만들면서 제작진은 공중파TV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다양한 모습을 살려낸다. 이른바 성기에 따라다니던 모자이크를 걷어내고, 화가 났을 경우 내뱉는 일상용어를 리얼하게 살려낸다. (원주민 말을 ‘적확히’ 재번역하였다는 것이다) 혹시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이나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야생의 부족을 다룬 다큐를 본 사람이라면 ‘뽀뚜루’만큼이나 희한한 ‘신체보형물/치장물’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관객들은 모자이크를 걷어낸 그들의 모습에 곧바로 동화된다. 삶이란 원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서바이벌 게임이니 말이다. (실제 동화라는 측면에서는 관객들이 같이 발가벗고 영화를 관람하는 것도 야생의 진미일지 모르겠다)

아마존의 눈물이 마를 때

<아마존의 눈물>은 전작 <북극의 눈물>만큼 호평을 받았고 또한 진지한 비평을 감수해야했다. 보여주는 야생의 모습이란 게 사실 특별할 것은 없고, 새로운 것도 없다. 단지 화면에 제작진의 고통과 고생과 고난이 나타났다는 것이 특별하다면 특별할 것이다. 이런 다큐나 영상을 찍는 제작진의 촬영고생담은 방송계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이 다큐멘터리가 화제를 불러 모을 때 또 다른 아마존 전문피디의 작은 외침도 있었다.)

발가벗은 아마존의 원시는 급격하게 문명화의 물결에 휩쓸려든다. 이제 자전거도 탈 줄 알고, 티셔츠는 입어야 멋쟁이라는 수준으로 진화, 발전하고 있다. 지구상의 많은 원주민부족들이 그렇게 ‘문명화되어가고 있다. 아메리카의 인디언이 그랬고, 대만의 고산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땅을 내어주고, 보호구역으로 내몰리고, 정부보조금으로 연명하며, 전체가 살아있는 민속촌의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제작진은 그런 사라지는 원시의 부족들의 지금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무모하게도 무너져가는 지구/환경문제를 각성시키려 한다. 그 의도가 성공적이었다면 다행일 것이다. 김진만 피디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우리는 (시청자들을) 교육시킬 의도는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시청자는, 아니 이미 ’문명화된 우리는‘  아마존 와우라족 야물루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 재생지 사용하기, 물 아껴쓰기, 자동차 덜 타기 같은 친환경적인 습관뿐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족. 기존 TV프로그램을 극장판으로 바꿀 때, 이전같은 블로우업 작업이 없다지만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스크롤될때 자막을 읽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제는 극장판으로 변환할 때 그런 문제까지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글 박재환 20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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