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는 매주 금요일 밤 ‘한국영화 100년 더 클래식’ 연작물을 방송 중이다. 1919년, 서울 단성사에서 선보인 우리영화 ‘의리적 구투’의 개봉 100년에 맞춰 KBS와 한국영상자료원이 함께 기획한 ‘100년의 한국영화 걸작 12편’이다. 지난주에는 일곱 번째 시간으로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1990)이 시청자를 찾았다.
실업자로 놀고 지내던 배일도(박중훈)는 치마공장에 취직되어 처(유혜리)와 어린 자식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경기도 외곽의 한적한 시골마을 우묵배미로 오게 된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민공례(최명길)에게 끌리게 된다. 평소 남편(이대근)의 폭력에 시달렸던 공례는 능청스럽기까지 한 일도의 저돌적인 접근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되더니, 끝내 둘은 밤기차로 ‘외도’에 나선다. 1970년대 산업화와 1980년 도시화의 과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풍경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도시외곽 가내수공업 현장에서 펼쳐지는 서민들의 애환과 사랑이 애틋하게, 칙칙하게, 우울하게 펼쳐진다.
‘서울황제’(86)와 ‘성공시대’(88)를 내놓으며 충무로에서는 드물게 사회파 감독으로 주목받은 장선우 감독은 ‘우묵배미의 사랑’을 내놓으며 그런 경향성에 정점을 이른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예고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 감독은 이후 ‘경마장 가는 길’,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나쁜영화’, ‘거짓말’까지 온갖 논쟁을 불러일으키더니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정점의 꼭대기에서 끝도 없이 추락하고 만다. 이후 영화판을 떠났다가 재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대중의 눈앞에 다시 등장했었다. 작년 장선우 감독의 영화인생을 확인할 수 있는 풍성한 셔플과 함께 <우묵배미의 사랑> 블루레이가 영상자료원에 의해 출시되었다.
“멋진 인생”
<우묵배미의 사랑>은 두 남녀의 사랑을 통해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하류층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빌딩과 카페, 승용차가 질주하는 도시가 아니라 논과 밭이 있고, 변두리 시골길에 어깨를 움츠린 사람들이 지나가고, 좁은 공장에 옹기종기 모여 미싱(재봉틀)을 돌리는 시골 아낙들이 생생한 일상의 대사를 뱉어내는 ‘1990년의 리얼리티’가 살아있다. 그 속에서 악다구니 같이 삶을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 혹은 질박한 삶에 대한 감독의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욕망에 불타오르는 일도와, 조심스레 현실을 벗어나고픈 공례가 마지막 기차에서 나누는 대사는 깊은 울림을 준다. “모든 인생의 샛길은 그 시작이 중요하더라고요.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야간열차를 탄 것이 멋진 인생이라 생각되지 않아요?”라고.
<우묵배미의 사랑>은 작가 박영한의 연작소설 중의 한 편이다. 박영한 작가(1947~2006)는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랐다. 고등학교를 나온 뒤 공장, 부두노동자를 전전했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뒤늦게 연대 국문과를 나와 <머나먼 쏭바강>을 시작으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 휴머니즘 작품을 발표한다.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낭곡’은 그 옛날의 ‘난곡’은 아니다. 작가가 청년기시절 떠돌아다녔던 세상의 압축판이다. 원작소설 후기에 따르면 ‘남양주군 덕소, 고양군 능곡, 김포, 안산시 일대와 부산의 최변두리’란다. 도시 외곽지역의 징후를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 가상무대인 셈. 영화를 보면서, ‘1990년의 그 곳’은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진다. 영화 끝에 촬영장소가 ‘신장1리 더우개마을’이라고 나온다. 지금 그곳은 아파트가 들어선 하남의 한 곳이다.
박영한 작가의 마지막 말이 영화의 깊이를 더한다. “이데올로기는 變數이나 人間은 永遠한 常數이다.” (박재환 201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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