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화 감독 회고전

2011. 9. 16. 17:38연예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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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뜨거운 손맛을 보시라!

TV드라마에서, 대중음악에서 한류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변방의 대중문화가 전혀 다른 문화권의 대중에게서 제대로, 그리고 인기리에 수용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문화적 코드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떨까? 우리나라에서 만든 영화 중 미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영화는 무엇일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새 장을 연 <쉬리>? 미국의 호러/괴수 마니아를 매혹시켰다는 <괴물>? 아니면 심형래 감독의 <디 워> 아니면 <라스트 갓파더>?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우리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다. 무엇일까? 바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 대중영화로서의 성공보다는 이국적인, 문예영화로서 성공한 것이다. 미국의 박스오피스 전문사이트인 박스오피스모조닷컴에 따르면<봄 여름...>은 238만 달러, <괴물>은 22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미국에서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외국 즉, 비(非)미국영화는 대만 출신의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으로 1억 2천 8백만 달러이다.

할리우드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다

(사진: 정창화 감독과 김수용 감독)

여기서 한걸음 더. 그럼 매주 쏟아지는 신작 속에서 미국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한 한국영화가 있을까? 당연히 없다. 그러나 한국인 감독의 작품은 있다. 올해 개봉된 <쿵푸 팬더2>의 감독은 한국계 여인영( Jennifer Yuh) 감독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개봉 첫 주말에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 박스오피스 정상을 내주었었다. 오래 전 1973년 미국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한 한국인 감독의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5 Fingers of Death>라는 작품이다. 정창화 감독의 작품이다. 정창화 감독은 한국에서의 작품 활동을 접고 당시 홍콩의 명가 쇼 브러더스에 초빙되어 홍콩에서 작품 활동을 했었다. 그때 찍은 작품이다. 홍콩에서의 제목은<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철인>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작품이다. 이 놀라운 기록의 사나이 정창화 감독은 올해 85세. 어제부터 서울 상암동에 위치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정창화 감독 회고전>이 시작되었다. 어제 저녁 행사시작 훨씬 전부터 원로영화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왕년의 충무로 멋쟁이 배우 남궁원, 윤양하, 윤일봉이 눈에 띈다. 그리고 김기덕(<맨발의 청춘>과 <대괴수 용가리>를 만든 노감독), 김수용, 임권택 감독도 모습을 보였다. 이미 2003년에 정창화 회고전을 마련했던 부산국제영화제의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과 이용관 현 위원장, 그리고 EBS의 <<한국영화특선>>을 통해 옛 한국영화를 꾸준히 소개해온 김홍준 교수도 자리를 빛냈다.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 정창화


정창화 감독은 1928년 서울에서 나서 자랐다. 부친은 한국독립당 중앙위원으로 김구선생을 모시던 사업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장사를 하는 대신 자신의 재능을 살려 서울음악학교에 입학했다. 해방 직후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46)를 본 후 영화감독이 되기로 뜻을 세운 뒤 최인규 감독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도제식 수업을 받게 된다. 조감독 생활을 끝내고 부친을 설득하여 첫 영화 <유혹의 거리>(53)를 감독하지만 625전쟁 중 포탄을 맞아 필름은 전소하고 말았다. 정 감독은 자신의 첫 작품을 아직도 안타까워한다. 이후 <장화홍련전>(56), <노다지>(61), <장희빈>(6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65), <순간은 영원히>(66) 등을 감독하며 한국영화 태동기부터 중흥기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감독활동을 펼쳤다. 대만 영화사와 함작으로 만든 <순간을 영원히>가 그의 영화인생을 바꿔놓는다. 서울, 홍콩, 타이베이에서 로케로 촬영한 한국판 제임스본드 스타일의 첩보영화였던 <순간을 영원히>를 홍콩 쇼 브러더스의 대부 란란쇼가 보고는 정 감독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당시 홍콩뿐만 아니라 동남아, 나아가 미국, 유럽의 차이나타운에 걸쳐 방대한 극장체인을 갖고 있던 쇼 브러더스는 자신의 극장에 내걸 영화들을 쉼 없이 만들어내고 있을 때였다. 수요를 채우기 위해 아시아 각국의 능력 있는 감독을 초빙하였다. 정창화 감독은 1968년에서 10년간 영화를 찍게 된다. 그때 만든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정 감독은 쇼 브러더스를 떠난 뒤 골든 하베스트에서  몇 작품을 더 찍다가 귀국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별 재미를 못 보고 미국으로 떠난다. 그리곤 오랫동안 잊힌 영화인이었다가 한국영화사가들의 노력과  ‘부산국제영화제의 발굴’로 그의 존재가 뒤늦게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2005년 칸 국제영화제 클래식부문에 초청되어 다시 주목받았다. 칸 초청 이후 <킬 빌>의 쿠엔틴 타탄티노 감독은 자신의 베스트액션 리스트에 이 영화를 올려놓아 화제가 되었다.


 

<정창화감독 회고전> 개막식은 이병훈 한국영상자료원장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 감독과 함께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한 충무로의 동료 김수용 감독이 애정이 담뿍 담긴 축사를 했다. 원로 배우를 대표하여 정 감독의 <칠인의 협객> 등에 출연했던 윤일봉이 무대에 올라 정 감독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높이 샀다. 개막식 행사의 마지막은 김홍준 감독이 만든 18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 <정창화감독회고전을 위한 12개의 단편영화> 상영이 있었다. 이번 회고전을 통해 상영되는 12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정 감독의 영화예술세계를 일별할 수 있게 했다. 정창화 감독의 작품은 사극, 액션, 멜로드라마 등 다양하다.

(사진: 배우 안성기의 아버지 안화영씨도 원로 영화인이다)

개막식 행사가  끝나고 개막작으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상영되었다. 무도 대회를 앞두고 무림을 제패하려는 악한과 우직하게 무도의 길을 걸어가는 주인공의 활약상을 그린 정통 쿵푸물이다. 정창화 감독은 이 작품에서 반일적 정서도 포함시켜 오늘날의 관객들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당시 홍콩 쇼 브러더스 스타였던 라열(羅烈,로례)이 주연을 맡았고, 정 감독과 함께 홍콩 액션영화에 출연하던 한국 배우들이 다수 출연한다.

<<정창화감독 회고전>>은 15일부터 22일까지 상암동 미디어센터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다. 모두 무료이다. 상영일정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시라. 이번 주말에는 특별한 시간도 마련된다. 토요일 <황혼의 검객>과 일요일 <죽음의 다섯 손가락> 상영이 끝나면 정창화 감독이 직접 참석하여 ‘관객과의 대화’ (GV)시간이 마련되어있다. 절대 놓치지 마시라!!!!!!!!!!!!!!! (박재환, 2011.9.16)

* 이 글은 KBS사이트에도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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