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조지아’ 영화이다. 트럼프의 운명을 가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미국의 조지아 주가 아니다. 소련 시절엔 ‘그루지야’로 불리던 곳이다. 내가 아는 그루지야는 고르바초프 서기장 시절의 소련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가 소련 붕괴 후 그루지야의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입김에서 벗어나고파 ‘그루지야’ 대신 영어식으로 ‘조지아’라고 불러달라는 나라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영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영어 제목: And Then We Danced)를 보았다. 레반 아킨 감독은 스웨덴 사람이다. 특이한 영화이다. 영화는 조지아의 민속춤을 추는 남자 이야기이다. 왠지 집시풍일 것 같은, 왠지 서커스단 같은, 아니면 아예 키예프의 정통 발레를 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 틀렸다. 조지아는 완전히 다른 동네이고, 완전히 다른 춤이다!
조지아 국립무용단의 댄서 메라비(레반 겔바키이니)는 오늘도 열심히 춤 연습 중이다. 파트너 마리(아나 자바히슈빌리)와 함께 뛰고, 돌고, 폴짝거리고, 손을 쭉쭉 뻗어 모든 감정을 육신에 실어 힘과 열정을 전달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메라비의 춤사위가 마음에 쏙 들지가 않는 모양이다. 좀 더 강하게, 좀 더 남자답게 추라고 채근한다. 조금씩 조지아 무용의 핵심에 접근한다. 남성 무용수는 최대한 강인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절도 있게, 무게감 있게, 박력 있게! 메라비는 얼굴 생김새부터 유순해 보인다. 여성적이기까지 하다. 무용 연습이 끝나면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돈을 벌고, 집에 돌아와서는 할머니, 어머니에게 사랑스럽고, 말 잘 듣는 아이이다. 아무리 땀 흘리며 연습해도 메라비의 춤은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때 이라클라(바치 발리시빌리)가 무용단에 새로 들어온다. 한번 뛰기만 해도 박력이 넘친다. 오디션을 앞두고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인 것이다. 그런데 메라비는 함께 춤을 추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라클라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는 ‘국제무용영화제’에 어울릴 영화라고 생각했다가 보면서 점점 ‘서울프라이드영화제’로 진입하는 영화이다. 오직 춤에만 열중하던 남자 주인공이 누군가의 등장으로 가슴이 설레더니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조지아는 엄청나게 보수적인 사회이다. 춤 하나에서도 ‘남성성의 현현(顯現)’을 으뜸으로 치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메라비 가족의 상황을 짐작하게 된다. 그의 가족들이 ‘남성답지’ 않은 ‘여성스러운’ 춤을 추었기에 댄서로서 좌절하고 도태되었을 것이라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메라비의 숨 쉴 공간은 위축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갈등하고, 방황한다.
영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는 메라비와 이라클라의 이야기로 끝나지는 않는다. 메라비는 발목을 쩔뚝거리며 마지막 오디션에서 보란 듯이 자신의 춤을 춘다. 관능미가 철철 넘치는. 조지아의 춤이 아니라 댄서의 춤을. 메라비의 혼란과 방황, 그리고 노력을 옆에서 지켜본 마리가 끝까지 남아 있다. 어쩌면 그렇게 메라비의 가족력은 이어질 듯하다.
메라비 역의 레반 겔바키이니는 실제 조지아 현대무용수라고 한다. 감독이 인스타그램 속의 그를 보고 끈질기게 구애, 영화 출연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보수적인 나라 조지아답게 촬영 과정에서도 협박이 이어졌고, 시사회 때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단다.
조지아의 허름한 건물, 바닥이 패인 강당에서 펼치는 레반 겔바키이니의 춤사위는 볼쇼이에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발레를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전율과 감동을 안겨준다. 2020년 11월 25일/15세관람가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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