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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트] 절망에 빠진 사람들, 그 다리를 건너지 마소서 (올리베르 라셰 감독, Sirāt,2025)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며 영화팬의 주목을 받았던 올리베르 라셰(Oliver Laxe) 감독의 영화 <시라트>가  한국에서 정식으로 개봉되었다. 길/통로를 뜻하는 ‘시라트’(sirāt)는 이 영화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더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슬람 경전에서는 시라트는 지옥 위에 놓인 가느다란 다리로,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로워 의로운 자만이 다리를 건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설명해 준다. 어떤 운명의 아랍 사람들이 그 아슬아슬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일까. 영혼을 흔들고 심장을 끝없이 쿵쾅거리게 하는 음악과 함께 관객들은 그 고행의 길을 함께 한다.  모로코 남부 사막지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시처럼 모여든다. 수많은 캠핑카와 트럭, 밴들이 보이고 유랑자들이 강한 비트의 테크노/신디사이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이른바 ‘레이브 파티’이다. 사람들은 약에 취해, 술에 취해, 음악에 취해 흐느적댄다. 그 사람들 사이를 루이스(세르지 로페즈)와 어린 아들 에스테판이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이들 부자는 오래 전 소식이 끊긴, 실종된 딸 마르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이들을 불쌍히 여긴 사람이 이곳 파티가 끝나면 모리타니아 쪽에서 또 다른 레이브 파티가 열리니 그 곳으로 가보라고 일러준다. 그때 트럭을 탄 군인들이 몰려온다. 축제는 끝났다고. 어디선가, 무슨 일로 전쟁이 일어났고 EU시민권자는 안전지대로 신속히 이동해야한단다. 하지만 딸을 찾으려는 생각뿐인 루이스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약속된 땅을 향해 길을 떠난다. 끝없는 황야, 붉은 돌산, 깎아지른 절벽의 좁다란 도로를 따라.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아야할 것 같다. 치지직대는 라디오에서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전한다. 총을 든 군인의 모습은 잠깐 보였지만 이곳, 황량한 사막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인 듯하다. 이들은 흙먼지를 날리며, 낡은 차에 올라 국경을 통과해야한다. 그렇게 아프리카 서북...

[시스터] “친언니를 납치했다!” (진성문 감독, Sister, 2026)

“나는 오늘, 언니를 납치했다.” 해란(정지소)은 태수(이수혁)의 도움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한밤의 골목길에서 소진(차주영)을 납치해 두건을 씌우고, 미리 봐둔 철거 지역의 버려진 집에 감금한다. 납치된 소진을 협박해 재력가인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거액의 몸값을 받아내려는 계획이다.  해란은 절박하다. 중국에는 수술을 받아야 할 동생이 있기 때문이다. 소진은 자신의 아버지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 결코 돈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주도면밀하게 납치극을 준비한 태수는 더 끔찍한 방법을 찾겠다고 위협한다. 태수가 동향을 살피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해란과 소진은 계획에 없던 대화를 나누게 되고 납치극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강력범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란, 살기 위해 필사적인 소진,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절대 빌런 태수. 이 세 사람만이 버려진 주택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안대로 눈을 가리고 손발이 묶인 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10억 원의 몸값 세계적인 갑부나 분쟁 지역의 인질극에서 요구하는 몸값은 천문학적이다. 그에 비하면 10억 원은 ‘재벌집 딸’의 몸값으로 꽤 현실적인 액수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등장한다. 부녀 관계가 이미 절연된 상태인 데다, 납치범이 존재조차 몰랐던 이복동생이라니.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설정은 극 중반 ‘현실적인 빌런’이 등장하며 이야기의 동력을 얻는다. 거액을 받아내기 위한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납치범과 인질 사이에는 기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인질극에서 나타나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한국적 정서가 결합된 기이한 형태다. 하지만 그 온기가 지속될 리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수든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절박함이 만드는 긴장감 중국에서 온 해란은 어떻게든 동생의 수술비를 마련해야 한다. ‘우연히’ 만난 태수는 그 범죄의 길을 일러준다. 영화는 밀실에서의 제한된 대화를 통해 진실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또 다른 탈출구를 모색한다. 해란은 차마 모질지 못하고...

[직장상사 길들이기] ‘헤드’헌팅의 달인, 가스라이팅의 여왕 (샘 레이미, Send Help, 2026)

샘 레이미는 마블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찍기 전, <이빌 데드> 같은 B급 공포영화로 호러 매니아를 즐겁게 한 감독이다. 그가 <드래그 미 투 헬> 이후 실로 오랜만에 호러로 돌아왔다. 샘 레이미의 호러는 ‘과다출혈’과 ‘신체분리’의 비주얼 폭격과 블랙코미디가 유려하게 결합한 장르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번에 개봉된 영화 <직장상사 길들이기>도 그런 샘 레이미 호러 월드의 전형을 보여준다. 가끔 오리지널 타이틀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한글 제목의 영화가 등장하는데 이 영화도 그러하다. 보고 나면 <직장상사 길들이기>가 영어 제목(Send Help)보다 훨씬 직관적이다. 정말 때려죽이고 싶은 직장상사가 있다면 말이다! 금융자산관리회사 전략기획팀의 만년 평사원 린다(레이첼 맥아담스)는 출중한 업무력을 가졌지만 무슨 이유인지 승진을 못 하고 있다. 대강 짐작하겠지만 ‘직장 내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운 CEO 브래들리(딜런 오브라이언)는 이런 린다를 자르고 싶지만, 일단은 주요한 비즈니스를 성사시키기 위해 함께 방콕으로 출장을 가게 된다. 근사한 전용기에서 ‘정치력 만랩’의 남자 직원들이 브래들리와 하하호호하며 ‘린다 흉보기’에 급급할 때 악천후를 만나고, 비행기는 손 쓸 틈도 없이 태국 앞바다 어느 무인도에 추락한다. 린다와 브래들리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그런데 린다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극한 생존 프로그램 ‘서바이벌’과 각종 생존지침서를 독파한 ‘생존의 달인’ 린다는 이 무인도에서 종횡무진 대활약을 펼친다. CEO 브래들리와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생존하기, 버티기의 극한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진다. 예전에 음성으로 전화번호를 자동 연결하는 이통사 광고가 있었다. ‘때려죽이고 싶은 직장상사’의 단축 이름은 ‘X새끼’ 같은 것, ‘마음에 안 드는 시엄마’의 닉네임도 적당히 입력하면 됐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으면 그...

[뮤지컬 비틀쥬스] 외로운 사람, 외로운 영혼, 즐거운 소동극 (Musical BEETLEJUICE.2026)

B급 정서를 담뿍 품은 악동 팀 버튼의 영화 <비틀쥬스>(1988)는 국내에 <유령수업>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매니아층을 형성했다. 신혼부부가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은 뒤, 행복했던 시절을 잊지 못해 유령이 되어 집을 떠나지 못한다는 설정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필 그 집에 세기말적 고민을 혼자 떠안은 듯한 소녀 리디아의 가족이 이사 오면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막힌 동거가 펼쳐진다. 이 두 세계를 오가며 팀 버튼 특유의 이야기를 완성짓는 존재가 바로 ‘비틀쥬스’다.  영화 <비틀쥬스>는 오랜 과정을 거쳐 2019년 브로드웨이에 올랐고, 2021년 한국에서도 소개되었다.(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그리고, 마침내 그 재연 공연이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홀에서 펼쳐지고 있다. 여전히 팀 버튼의 악(惡/樂)취미가 물씬 풍긴다. 뮤지컬은 원작 영화를 무대극에 최적화했다. 아담과 바바라 커플은 교통사고가 아닌, 집을 청소하다 바닥이 꺼지는 황당한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스위트 홈’에 대한 집착이 강화된 셈이다. 사춘기 딸 리디아는 아빠와 새엄마에게 ‘뾰족하게’ 맞서고, 유령 부부는 이들을 내쫓고 싶지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어 고민한다. 그 틈새를 백억 년을 산 유령 비틀쥬스가 파고든다. 그런데 놀랍게도 리디아는 유령을 볼 수 있다. 이제 산 자와 죽은 자, 사연 있는 자와 사심 가득한 자들이 뒤섞인 거대한 소동극이 시작된다. ● 그 이름을 감히 세 번 부르지 마시오!  대니 엘프먼의 몽환적인 영화음악은 에디 퍼펙트의 다채롭고 화려한 넘버들로 대체되었다. 물론 시그니처 송인 ‘Day-O’(The Banana Boat Song)도 빠짐없이 등장해 흥을 돋운다. 비틀쥬스는 캐릭터 사이의 메신저일 뿐만 아니라, 객석을 향해 직접 말을 거는 해설사 역할도 겸한다. 마블 코믹스의 데드풀처럼 ‘제4의 벽’을 수시로 깨뜨리며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번 2025-2026 시즌 공연에서는 코미디언 이창호...

[신의 악단] “평양은 찬송가를 믿지 않는다” (김형협 감독, Choir of God, 2025)

독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가 1843년 쓴 [헤겔 법철학 비판]에는 그 유명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정확한 문장은 이렇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人民)의 아편(阿片)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회자되며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를 탄압하는 논거가 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이 사라진 듯 보이는 그곳에서도, 종교는 마약처럼 사바세계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 연말 개봉된 영화 <신의 악단>은 세상에서 가장 폐쇄된 동토의 왕국에서 펼쳐지는 복음의 성가를 다룬다. 2억 달러를 위한 ‘메소드 연기’ 영화는 북한이 처한 딜레마에서 시작된다. 국제적 경제제재로 달러가 절실한 북한에 달콤한 제안이 온다. 평양에 교회를 세우고 인민을 모아 부흥회를 연다면 2억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것. 체제 수호의 최선봉인 보위부는 고민에 빠진다. ‘절대 지도자’가 엄존하는 땅에 주님의 전당이라니. 하지만 궁하면 통하는 법. 보위부는 외국 지원단체의 현장 확인 전까지 3주일 동안 ‘가짜 신도’들을 양성하기로 한다. 성경을 읽히고, 찬송가를 익히고, 통성기도의 ‘연기’를 몸에 숙달시킨다. 그야말로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메소드 연기’의 시작이다.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코믹함과 장엄함 영화는 익숙한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상황 반전의 묘미를 살린다. 불순세력을 잡아 가두던 보위부가 이제는 외화벌이를 위해 ‘반혁명 작태’인 예배를 완벽히 수행해야 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7번방의 선물> 각색에 참여했던 故 김황성 작가의 유작이다.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는 하나, 완전히 매칭되는 실제 사건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교회의 전설이나 남쪽 종교인들의 선교 활동이 두만강을 넘어 북녘에 온기를 전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실제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평양을 수차례 방문해 김일성에게 성경을 선물했고,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는 여전히 ‘쇼윈도’ 기능을 수행하며 평양에 서 있다. 영화는 이 차가운 성...

[라이프 오브 파이] 무대 위의 호랑이, 구명보트에 올라타다 (Live on Stage)

'음식남녀',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등으로 유명한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는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소설이 원작이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경영하던 가족이 경영난에 힘들어하다가 결국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기로 하고 일본화물선에 오른다. 그 배는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고, 열일곱 살 주인공 소년 ‘파이’만이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오른다. 그런데 화물선에 실렸던 '동물'들도 잇달아 구명보트에 올라탄다.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골호랑이까지. 소년은 227일 동안 태평양 망망대해를 떠도는 작은 보트에서 사나운 호랑이와 동거를 하게 된다. 그것은 '소년이 전하는' 이야기다. 과연 그 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얀 마텔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이안 감독의 환상적 영화로 오래 기억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무대극으로 만들어졌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일련의 워크샵을 거쳐 2019년 영국에서 초연 되었고, 브로드웨이를 거쳐 마침내 서울 'GS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뮤지컬’이 아니라 배우와 퍼펫(동물인형)이 함께 뒹구는 특별한 ‘연극’(PLAY)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 동남부 폰디첼리의 ‘피신 몰리토르 파텔’은 친구들에게 ‘파이’(Pi)라 불리는 소년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물원은 경영난에 시달리고 정치적 혼란이 잇따르자 동물원을 처분하고 가족이 모두 이민을 가게 된다. 몇몇 처분하지 못한 동물들도 함께. 하지만 곧 폭풍우를 만나고 소년과 동물이 겨우 구명보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리처드 파커’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벵골호랑이도.   이야기는 227일 동안 태평양을 떠돌다 구조되어 병원에 실려 온 ‘파이’에게 선박회사 조사관이 화물선의 침몰 상황에 대해 캐묻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17살 ‘파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물도, 음...

[조씨고아,복수의 씨앗]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짧다 (The Orphan of Zhao, 고선웅 연출,2025)

 고선웅이 각색과 연출을 맡은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최근 다시 무대에 올랐다. ‘조씨고아’는 2015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처음 선을 보인 뒤 꾸준히 무대에 올랐고 이번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10주년 공연을 맞이한 것이다. 캐릭터와 스토리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드라마틱한 전개로 오랫동안 공연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답게 이번 공연도 연일 매진을 자랑했다.   ‘조씨고아’는 중국 원(元)나라의 기군상(纪君祥)이 쓴 희곡 <조씨고아>의 이야기를 판본으로 한 작품이다. 작가는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의 춘추시대, 진(晉)나라 때 일이다. 진의 영공(靈公)은 문신 조순과 무신 도안고의 보좌를 받으면 집권하고 있었다. 횡포한 도안고가 야심을 드러내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춘추’시대라 하면, 주(周)의 왕이 형식적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가운데 제후국의 공(公)들이 자기들의 영역을 책임지던 시절이었다. 그리곤 그들이 마구 싸우던 ‘전국’시대를 거쳐 결국 시황제가 중원을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야심가 도안고는 충신 조순이 역모를 꾸민다고 상소하고 이를 빌미로 조씨 집안의 ‘9족’을 멸한다. 9족이 어디까지인지는 복잡한데 친가-외가-처가에 걸쳐 거의 모든 피붙이를 도륙하는 것이다. 여하튼 도안고는 조순 집안과 관계되는 300명을 다 죽인다. 그런데, 드라마틱하게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도안고의 명을 받은 한궐 장군이 조씨 집안을 완전도륙내지만, 조순의 아들(조삭)의 처(姬)가 낳은 갓난아기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조씨 집안을 드나들던 의원 정영이 그 갓난아기를 책임지게된 것이다. 정영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 속에 아이를 가까스로 빼돌린다. 하지만 도안고는 전국의 갓난아기를 다 죽이라고 명한 상태이다. 정영에게도 갓 낳은 아이가 있었다. 이제 정영은 조씨 집안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갓난아이를 살리기 위...

[한란] 소녀가 온다 - 제주 4.3의 비극 (Hallan,하명미 감독,2025)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광복을 맞은 한반도는 진정한 통일을 맞지 못한다. 남과 북이 갈라지고 제주도가 혼란에 휩싸인다. ‘데모크라시’와 ‘이데올로기’의 깊은 뜻을 모른 채 희생의 탑을 쌓기 시작하는 것이다. 1948년의 격전장은 제주도였다.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되어있다. 과연 그해 그 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명미 감독은 그 때의 비극을 극화한다. 영화 <한란>은 어느 날 갑자기 이데올로기 싸움터에 내몰린 제주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바람 많은 제주 해안마을의 돌담집이 보이고 축사의 돼지를 바라보고 있는 여섯 살 소녀 해성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산으로 올라가서 소식이 끊겼다. 엄마 아진은 어린 딸을 할머니 손에 맡기고 마을 사람과 함께 산으로 향한다. 엄마가 산으로 떠나고 얼마 뒤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한다. 노인네고 어린애고 모두. 그런데 어린 해성이 새벽이슬에 깨어난다. 살아남은 것이다. 이제 어린 아이는 아빠가 숨었다는, 엄마가 올라간 그 산길을 따라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제주도의 산과 오름에 숨어든 ‘빨갱이 세력’과 빨갱이로 몰려 죽는 게 두려운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의 엄마와 어린 딸의 운명이 엇갈리기 시작한다. 곳곳에서는 군인이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 아진은 어린 딸 해성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제주 4.3사건은 문학계와 대중문화에서 조심스레, 꾸준히, 치열하게 다뤄졌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의 ‘화산도’,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등. 여기 그 추념의 목록에 <한란>이 추가된 것이다. ‘제주 4.3’을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우리...

[위키드 포 굿] 125년 동안 오해 받은 서쪽마녀의 진실 (Wicked: For Good, 존 추 감독,2025)

 작년 11월 개봉되어 228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던 할리우드 뮤지컬영화 <위키드>의 속편 <위키드 포 굿>이 드디어 개봉되었다. 영화 <위키드>는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동명의 베스트셀러와 브로드웨이를 석권한 뮤지컬을 바탕으로 존 추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물론 맥과이어의 소설은 훨씬 오래 전 L.프랭크 바움의 아동문학 <오즈의 마법사>를 정치사회학적으로 비튼 패러디 소설이다. 그러니 쥬디 갤런드의 어린이날 특선영화는 결코 아닌 셈이다. 뮤지컬의 백미였던 ‘Defying Gravity’(중력을 벗어나)와 함께 스크린 밖으로 날아가 버린 엘파바가 속편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 ‘편견과 박해’로 가득한 세상에 복수의 비질을 할지 기대가 크다. 물론, 결론은 다 알지만 말이다.  <위키드>에서 출생의 비밀을 가진 초록이 엘파바(신시아 에리보)는 에메랄드 시티의 시즈대학교에서 타고난 인사 ‘갈’린다(아리아나 그란데)와 운명적인 룸메이트가 된다. 마법을 할 줄 아는 엘파바와 마법을 하고 싶은 갈린다. 인기가 너무 없는 엘파바와 인기가 너무 많은 갈린다는 우여곡절 끝에 우정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하지만 에메랄드 시티는 의뭉스러운 마법사가 지배하고 있고, 쉬즈 대학은 마담 모리블의 권위로 온 세상이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던 동물들이 내몰리며 엘파바는 편견과 차별에 맞서 분연히 빗자루를 타고, 중력을 거스르며 에메랄드를 벗어난다. 그리고, <위키드 포 굿>에서 그 빗자루를 타고 다시 에메랄드시티로 돌아와서 노란색 벽돌 길을 헤집으며 마법사와 모리블과 우매한 오즈의 시민과 격한 투쟁을 펼치게 된다. 착한 글린다는 우정과 권력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피예로와의 삼각관계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L. 프랭크 바움의 아동소설 <오즈의 마법사>(원제:The Wonderful Wizard of Oz)는 1900년 처음 ...

[국보] 무대 위의 두 사람 (国宝,Kokuhō 이상일 감독,2025)

우리나라의 ‘인간문화재’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 일본에는 '인간국보‘(人間国宝)가 있다. ‘가부키’계의 인간국보의 세계를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19일 개봉하는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이다. 영화 <국보>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이상일 감독은 <악인>, <분노>에 이어 세 번째로 요시다 슈이치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부키’에 대한 짧은 소개 자막이 나온다. 17세기 처음 등장한 가부키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풍속적인 이유로 여성의 출연을 금지했단다. 그 때문에 ‘온나가타’(女形)라는 여성을 연기하는 남성연기자가 등장한다. 우선은 ‘가부키’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알아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경극과 판소리처럼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일생을 걸고 ‘생과 사’를 노래하는 것이니 말이다.  1964년 일본 나가사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야쿠자 보스 타치바나의 저택에서 새해맞이 술자리가 펼쳐지고 있다. 손님이 북적대며 덕담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유명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가 찾아오며 일순 술렁거린다. 손님들의 여흥을 위해 타치바나의 어린 아들 키쿠오가 가부키 분장을 하고는 짧은 공연을 펼친다. 한지로가 ‘온나가타’로 분한 키쿠오의 실력에 놀라는 것도 잠시. 야쿠자 무리들이 난입하며 신년 축하연자리는 엉망이 된다. 아버지를 비극적으로 잃은 키쿠오는 이제 한지로의 집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가부키를 배우기 시작한다. 가부키의 길은 야쿠자의 길만큼 험난하다.  <국보>를 보면서 한국의 관객들은 가부키에 입문하게 된다. 노래와 연기를 잘한다고 가부키 배우가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가부키는 가문에서만 승계되는 비기(祕技)이다. 키쿠오는 곧바로 한자이의 아들 슌스케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동년배인 키쿠오와 슌스케는 함께 가부키를 배우지만 그들의 미래는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다. 야쿠자의 아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