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1998년 즈음의 이야기 *
일본대중문화는 오래동안 금지/불허되어왔다. 그러다 김대중 정권 당시 ‘일본 대중문화의 국내 개방‘이 이뤄졌다. 어느날 갑자기 ‘확~’ 문이 열린 게 아니고 단계적으로 개방의 폭을 넓혔다.
1998년 10월 20일 단행된 제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는 영화 및 비디오에 한정되었다. 영화의 경우에도 공동제작 영화나 일본 배우가 출연한 한국영화, 세계 4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 수상작들이 허용 되었다. 이에 따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등이 개봉되었다. 이후, 1999년 9월 10일(2차), 2000년 6월(3차), 2004년 1월(4차) 조치에 따라 개방이 확대되어다.
2차 개방의 수혜자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였다. 이 영화는 정식 개봉되기 전, 당시 영화팬의 외래문화 접촉창구였던 대학가 비디오문화센터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극장 정식 개봉 즈음하여 쓴 글 같음.
(박재환 1999.11.3) 1945년 해방이후 줄곧 일본문화의 국내침투를 막아왔었고, 부분적인 누수는 있었지만 대체로 반백년 가까이, 가장 가까운 나라의 가장 대중적인 문화의 국내유입을 유효적절히 차단시켜왔다. 그러나, 그러한 인위적인 장벽은 정부의 정책변화와 인터넷 등 기술적인 문제로 지난 1~2년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이 ‘콜라 문화’, ‘청바지 문화’, ‘노래방 문화’ 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듯이 일종의 산업이 되어버린 요즘, ‘일본 문화’라는 것은 다원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사무라이 문화’나 ‘기모노 문화’, 혹은 ‘음란퇴폐 문화’의 상징으로까지 취급받던 일본의 대중문화는 음악과 영화라는 신세대 취향의 영상문화에서는 이전 세대와는 확실히 다른 수용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신세대적 문화는 소수의 메니아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아이들이 〈드래곤 볼〉 만화를 보고, 학생들이 〈엑스재팬〉시디를 모으고, 소녀들이 〈신세기 에반젤리온〉에 열광하더라도, 그것은 이른바 ‘오타쿠’ 이상의 파괴력은 보이지 못했다. 대신 국내의 문화수용의 폭과 방식을 확연히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문학의 힘에 의해, 혹은 소수의 복제된 비디오를 통해, 혹은 영화제에서 소개되는 특정한 우수 영화에 대해 더욱더 환상과 기대를 증폭시켜왔다.
물론 그러한 문화 유입의 초반기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어 개봉된 일본영화 〈가게무사〉, 〈하나비〉, 〈우나기〉 등이 그렇게 경쟁력 있는 상품이 아니란 것이 알려졌고, 또한 일본문화의 한국적 변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국판 실락원〉, 〈산전수전〉등이 비참한 흥행성적을 거두었기에 일본 문화에 대한 시각이 좀 더 현실화될 수 있었다. 게다가 올해 유난히 국산영화의 활황세에 비추어 일본문화에 대한 우월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환상이나 근거 없는 자신감에는 일본문화의 최강점이라 할 수 있는 재패니메이션의 차단과 〈러브 레터〉 등 화제작의 수입금지에서 생겨난 현상일 수도 있다. 이제 이번 주말이면 일본 영화 〈러브레터〉가 정식으로 국내에 개봉된다. 이미 최소한 10만 카피 이상 불법 복제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러브레터〉의 국내 흥행성적이 관심을 끄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어제 시내 극장에서 〈러브레터〉 시사회가 있었다. 이미 눈에 익은 장면들을 커다란 극장화면에서 지켜보고, 선명한 화질에 생생한 다이알로그에 영화의 참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두 가지의 시선을 갖게 만든다. 하나는 물론 영화 본래의 가치이고, 또 하나는 본격적 일본영화의 국내 유입이라는 차원에서의 감상이다.
우선, 첫째로 이 영화는 일본에서는 저평가 받고 있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극장용 영화데뷔작이다. 이와이 감독은 이 영화 이전에 이미 열 편 가까운 텔레비전 방영용 영화를 만들었다. 이들 소품들은 우리나라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모두 인기 있는 작품이다. 그가 이전의 일본 영화계의 거장들과 다른 점은 그가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도 수용가능한 일본심성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시아인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감성을 다루고 있다는 말이며, 그것은 또한 인류의 사랑과 열정을 순수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그림엽서’같고, 그의 대사가 순정만화에 나오는 대화들 같고, 그의 영화주인공이 하이틴 로맨스의 히로인인 것은 그러한 기초에서 시작되는 것들이다.
그러니 그런 영화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다분히 소녀 취향적 감상과 동화적 몽상인 것이다. 이 영화를 두 번 이상 볼 때부터 느끼게 되는 것이 옛사랑의 아련한 추억보다는 한시절의 연애감정의 동일성에 매료되는 것은 그러한 연상작용들 때문일 것이다.
이 〈러브레터〉는 그러한 감독의 연출 의도가 곳곳에서 피어나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비디오로 볼 때와는 달리 한 가지 한국관객들이 가장 호응하게 되는 부분은 아마도 학생시절 여자 후지이의 친구였던 사나에 오이카와(스즈키 란란)의 연기가 아니었을까. 극히 과장된 듯하면서도, 또한 극히 자연스런 연기는 이 영화가 영락없는 하이틴 로맨스 물임을 보여주기에 족하다.
이와이 감독은 우리나라 영화 〈편지〉에서 이정국 감독이 의도적으로 분산배치한 영화적 소품을 이 영화에서 가장 영화적으로 치장하였다. 눈덮인 산부터 시작하여 빨간 우체통, 그리고, 도서관의 서가, 자전거까지 모든 것은 감상적 취향과 과거의 회귀, 그리고 어둠의 기억을 깨우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일본영화의 산업적 측면에서 국내개봉의 의미를 잠깐 되짚어보자. 이제 본격적으로 일본영화가 국내에 소개된다. 관객은 이제 부산영화제에 내려가지 않아도 일본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칙칙한 불법복제된 비디오가 아니라 커다란 화면에서 제대로 번역된 일본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부산영화제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일본영화 감독들은 자국의 영화현실이 갈수록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세계영화제에서는 꾸준히 한 두개 씩 상을 타며, 그들 영화판의 수준과 열정의 깊고 넓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어떠한 영화를 볼 것인지는 한국 영화팬들의 판단에 달린 것이다.
이 영화는 눈 덮인 산에서 사라져간 옛 애인의 이름을 부르며, 안타깝게 안부를 묻는 스틸 사진 이상의 감동을 잔잔히 전해주고 있다.
[러브레터| Love Letter, 1995]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나카야마 미호,토요카와 에츠시, 한 부사쿠, 시노하라 카츠유키, 사카이 미키, 카시와바리 타카시, 스즈키 란란, 스즈키 케이치 개봉:199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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