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26. 10:28ㆍ일본영화리뷰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에 이르기까지 스크린을 더욱 풍성하고 다채롭게 장식한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의 음악 세계를 만나볼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 <사카모토 류이치: 오퍼스>를 감독한 소라 네오 장편극영화 감독데뷔작 <해피엔드>가 지난 달 30일 개봉되었는데 영화팬의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근(近)미래의 도쿄. 고등학교 음악동아리의 다섯 친구들-유타, 코우, 아타, 밍, 톰-은 '무엇이 그리 불만이지' 밤거리를 쏘다니며 젊음과 치기, 분노와 좌절을 분출하려고 기를 쓰고 있다. 그들은 테크노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에 들어가려다 제지당하지만 유타와 코우는 기어코 잠입에 성공한다. 이제 이들 다섯 친구의 행복하지 않은, 일탈과 불만, 불안한 일본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한국계도 있고, 미국계도 있고, 중국계도 있다. 일본의 학교는 감옥같고, 사회는 세기말적이다. TV뉴스에서 등장한 총리가 지진에 대한 공포심을 극도로 조장하고, 시도 때도 없이 지진경보가 울린다. 악동인 유타와 코우는 교장의 노란색 스포츠카를 기하학적으로 세워두는 장난을 치고, 이 일을 계기로 학교는 학교 곳곳에 AI감시망 '파놉티콘'을 설치한다.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고, 벌점이 부과된다. 사회는 혼란스럽다. 엄습할 지진에 대한 공포감은 외국인 배척을 주장하는 정치적 선동에 더욱 긴장감이 고조된다. 유타와 코우, 아타, 밍, 톰은 그런 사회분위기에 휩쓸리고, 학교의 강압적 훈육에 그들의 '우정과 결기'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영화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일본 현 사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수업 중에 자위대 대원이 들어와서 '리크루트'하는 장면이 있다. 일본인이 아닌 사람은 교실에서 나가도 된다고 하는데 교실 구성원의 상당수가 ‘자위대에 들어갈 수 없는 비(非)일본인이다.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일본영화인의 역사인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라 네오 감독은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대학을 다니고 있었단다. 지진의 여파가 한동안 일본과 세계를 뒤흔들고 나서, 감독은 지진과 일본사회의 또 다른 면을 보았단다. 그것은 오래전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대응이었다. 유언비어가 퍼지고, 희생양으로 조선인을 학살하던. 그 야만성과 비극성에 대한 성찰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감독은 실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영화에 나오는 다섯 친구 중 코우는 조선인이다. 태생적으로 일본사회에 반항적이며, 비관적인 인물일 것이다. 학교에서 사고를 치자, 식당을 하는 엄마는 학교로 불러온다. 다른 일본인 친구의 엄마는 "학교가 이래서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일 때 엄마는 (거의) 무릎 꿇고 "제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서.."라고 빈다. 아마, 그 엄마는, 아들이 알량한 학교라도 나와야 그나마 일본사회에서 살아남는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라고? 그 피와 눈물과 차별로 체화된 부모세대의 지혜를 무시하지 마라!)
소라 네오 감독에게 놀랍고도 고마운 것은 관동대지진에 대한 그의 관심이다. 이 영화에서 행동하는 일본인의 양심으로 등장하는 여학생 후미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캐릭터의 영감이 된 것은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이다. 1920년대 정치적으로 분노를 표명했던 여성으로 박열이라는 젊은 재일조선인 시인을 만나 관동대지진 직후에 체포된다.”고 일본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해피엔드>에서는 한국계 ‘코우’가 일본여학생 후미의 행동주의 양심에 감화되는 것을 만나볼 수 있다.
일본영화, 반항의 청소년 ‘학교’영화라면 으레 등장할 이지메나 폭력, 섹스 신이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그들은 각자 개인적인 가족의 문제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 개인과 가족 바운드리의 문제를 열화시키고, 끝내 폭발시키는 일본의 제도적, 사회적 문제는 숱하게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불안정한 학생들은 시끄러운 클럽의 음악에서 흔들리는 영혼을 위무하며, 현실을 잊으려고 한다. 학교의 일탈이라는 것도 (한국 반항의 청소년 학교영화와 비교하면) 너무나 순수하고, 창의적이며, 가슴을 때린다.
영화는 그 또래의 감성을 이야기한다. 비슷한 생각으로 뭉친 그 나이에 어울리는 우정 같은 것. 그러다가 ‘지진’이라는 일본적 공포심으로 빚어진 배외주의적 사고방식,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무브먼트로 진화될 때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우정은 정치적 동맹으로 진화할 것인가. 그러기엔 진앙이 너무 가깝다.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가 그런 일본사회 기성세대의 모습이다. 연설 중인 총리에게 테러가 일어난다. 누군가가 김밥을 던진다. 총리는 얼굴에 묻은 김밥조각을 떼어내며 ‘아까워라’란다. 이런 장면은 후반부에서 교장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정치인의 유머도, 일본인의 근검절약도 아니다. 국민과 학생의 기대치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대응방식을 조롱하는 것이리라.
영화에 등장하는 AI 학생감시 체계인 ‘Panopty’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할 것 같다. 중국에서는 일상화되었고,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에서 맹활약했던 시스템이 이제(근미래)는 학교에서 불량학생을 팔로우하고 있는 것이다. CCTV공화국 한국의 미래일지 모른다.
감독은 그런 AI감시체계라는 과학적 미래와, 지진이라는 자연적 재해를 안고 사는 일본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배타적인 사회로 치닫고 있는지 ‘학교’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 감시와 자위대의 거대한 담론 속에서 음악과 우정을 이야기하는 흔들리는 청춘을 이야기한다. 어쨌든 졸업은 했고, 우정은 계속될 것이다....고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 믿음이 영원하기를.
참, 소라 네오 감독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이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은 대만의 에드워드 양(양덕창)이란다. ‘Panopty’는 감옥감시 체계에서 많이 활용되는 ‘파놉티콘’이다. 파놉티콘을 찾아보시라.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시라. 카메라 불빛이 반짝이는가?
▶해피엔드 (원제:Happyend) ▶감독: 소라 네오(空ねお) ▶출연: 쿠리하라 하야토(유타) 히다카 유키토(코우) 하야시 유타(아타) 펑 시나(밍) 아라지(톰) 이노리 키라라(후미) 사노 시로(나가이 교장)▶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공동배급/제공: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개봉:2025년4월30일 /113분/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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