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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리뷰

[화이 리뷰] 아버지를 삼킨 괴물

by 내이름은★박재환 201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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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 내 아버지는 누군가요?

 

영화를 깊이 다루는 영화사이트나 개인이 열정적으로 만든 영화사이트를 보면 메뉴 중에 FAQ를 둔 게 있다. 대상이 되는 영화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빼곡하게 차 있는 것을 보면 도대체 영화를 몇 번씩이나 해부하면서 보았기에 저런 대단한 사실까지 알아낼까 놀라게 된다. 물론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를 비비 꼬는 경우 영화팬들은 더욱 고심하게 된다. 아마 우리나라 영화로서는 ‘텔 미 썸딩’이 그러한 경우일 것이다. 이번에 ‘텔 미 썸딩’에 준할 만큼 해석의 차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작품이 개봉되었다.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낳은 정 기른정’ 논쟁이나, ‘성선설/성악설’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럼, 화이의 친부모가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영화를 표피적으로 보면 아마도 이경영이 맞을 것이다. 시간적 흐름으로 보아도!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지구를 지켜라’의 천재감독 장준환이라면 혹시 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화이’는 무엇이 잘못되어 총부리를 겨누는 것일까. 살부(殺父) 의식을 거친 뒤 괴물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란 말인가? 만약 이 영화를 아직 안 보았다면 ‘화이’의 친부모가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춰 관람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화이, 소년에서 살인마로

 

화이(여진구)에게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5명 있다. 김윤석, 조진웅, 장현성, 김성균, 박해준 등 개성강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화이의 ‘다섯 아버지’는 놀랍게도 ‘아들’ 화이에게 일반적인 아버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친다. 화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누가 친아버지인지에 대한 인식도 없이 그들에게서 범죄의 기술을 전수받는다. 싸우는 기술, 운전하는 기술, 총 다루는 기술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소년 화이는 언제나 교복차림에 가방을 둘러매었지만 실제 학교에 다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와 어울러 자연스레 범죄 - 좀도둑질이 아니라 살인행각- 에 휩쓸려가는 어린 화이에게 안식처는 어느 날 길에서 만난 여학생(남지현) 뿐이다. 정상적인 성장기를 밟지 못하는 화이가 지하실에 웅크리고 있는 괴물의 환상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결국 다섯 아버지의 인도로 소년은 끔찍한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서 괴물에 맞서게 되고, 괴물과 싸우게 되고, 괴물이 되든지 괴물에 먹힐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 아버지의 경우

 

첫 번째 괴물은 당연히 김윤석이다. 다섯이나 되는 아버지란 존재도 결국 김윤석의 분신일 뿐이며 화이에게 다양한 범죄기술을 전수하기 위한 그림자 혹은 내면의 확대에 불과하다. 실제 영화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선의, 최상의 ‘범죄’기술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게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거나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가장 만족스런 공범의식일 것이다. 김윤석이 아들에게 집착하는 것은 ‘완벽한 범죄’의 수행보다는 ‘원초적 죄악’에 대한 마지막 탈출구를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공범으로 끌어들여 도덕적 고통을 아예 차단시켜 버리는 것이다. 사이코패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간의 정에 대한 결여인 것이다. 김윤석이 완전한 악의 화신이라면, 조진웅은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인간의 조건, 아들의 경우

 

누구라도 화이같은 환경에서 자라난다면 17세가 될 즈음에는 고통스러운 자기인식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예고 없이 닥친 살인의 경험은 ‘첫경험’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충격을 준다. 소년은 가족의 사랑보다는 공범의식을 먼저 배웠고 죄의식보다는 트라우마에 더 시달려왔기에 ‘살인’은 마지막 해결책이라기보다는 ‘그 실마리’를 잡은 셈이다. 이경영-정확히는 이경영 부부-이 오랫동안 그 집에 눌러앉은 것은 사라진 아들을 기다리는 것일 테지만 감독은 친자확인이라는 논리적 전개보다는 충격적 사건 전개에 숨어있는 모호성에 초점을 맞췄다. 화이는 출생이 비극적인 만큼 자신을 옭아맨 가족의 굴레를 깨는 고통도 비극적이다.

 

성선설에 손을 든 화이

 

제목은 ‘화이’다. 감독은 ‘화이목’이라는 가상의 식물을 내세워 뿌리가 다른, 줄기의 성장을 그리려한 모양이다. 혹시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화이부동’(和而不同).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같이 어울려 시시덕거릴지라도 똑같은 패거리는 되지는 말지어다. 화이는 살인을 멈출까? 낳은 정도 기른 정도 모두 처단하면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어쩜 난센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화이는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더 이상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클라리스 스털링처럼. (박재환 201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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