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스피치] “아아 마이크 테스트. 사랑하는 나의 국민 여러분......”

2011. 3. 18. 09:31미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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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일본 동북부엔 리히터 진도 9라는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고 곧바로 쓰나미가 몰려와서 해안마을은 초토화시켰다. 게다가 해안지역에 건설된 원전은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져들었고 일본 열도 전체는 공포에 휩싸였다. 뉴스에 보도되는 일본인 특유의 ‘표출하지 않는 민족성’은 전 세계를 지진의 진도만큼이나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입헌군주국가 일본의 천황은 비디오 영상으로 “국민여러분 힘내세요.”라는 대국민메시지를 발표한 모양이다. 의외로 일본매체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 같지 않다. 일본 천황이란 게 예전같이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현재로선!) 1945년 전후 맥아더 장군이 천황제 폐지를 한때 검토했다가 거둬들여야 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정말 시대가 많이 바뀐 모양이다. 그럼 같은 입헌군주제인 영국은 어떨까. 한동안은 다이애나 황태자비로 ‘대중적’ 주목을 받았던 영국 왕실이 최근 영화 <킹스 스피치>로 다시 각광받고 있다. 영국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전체 영국민의 단합을 호소하며 구심점 역할을 영국 국왕, 조지 6세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톰 후퍼 감독의 영국영화  <킹스 스피치>는 지난 달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등 알짜배기 4개 부문을 휩쓸었다.

말더듬이 왕자, 영국 국왕이 되다

지금 영국 왕좌를 지키는 사람은 올해 85살의 엘리자베스 2세이다. 1952년에 왕위에 올라 현재 59년째 장기집권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조지 6세이다. 조지 6세는 1936년 굉장히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영국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한사코 왕위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시 국제정세는 독일 히틀러가 급부상하고 있던 때였다.  ‘뛰어난 대중 웅변술’과 ‘놀라운 정치조직력’을 가진 히틀러는 독일국민을 사로잡았고 광기에 넘쳐 이웃 나라 땅을 빼앗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은 이내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다.  오랫동안 왕좌를 지키던 아버지 조지 5세가 죽고 나서 큰 아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8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미국 사교계의 셀레브리티 심슨 부인과 연애하느라 영국왕실의 근엄이나 유럽정세의 위급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결국 형은 왕위에 오른 지 11달 만에 “나의 왕위를 사랑하는 동생에게 넘겨주노라.”하고는 왕관을 내팽개쳤다. 얼떨결에 아니, 오래전부터 이런 날이 한사코 오지 않기를 바랐던 동생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그가 바로 조지 6세이다. 그토록 영광스런 왕위에 오르기 싫어한 이유는 그가 심한 말더듬이 증세를 가졌다는 것. 영국의 로얄 패밀리들은 곧잘 공식행사에 참석하여 ‘왕실을 대표’하여 ‘백성’들에게 인사말을 해야 했다. 이 영화 초반에 보여주는 것은 1925년 당시 왕위계승 서열 2위였던 요크 공작 시절의 ‘버티’의 모습이다. (버티라는 애칭은 왕실 가족들만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의 풀네임은 Albert Frederick Arthur George이다) 버티는 대영박람회 폐막식장에서 행사장을 가득 매운 청중 앞에서 마이크로 간단한 치사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가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마이크 앞에 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문이 막히고, 말을 더듬기 시작하더니 결국 하늘이 노래지고 만다. 이미 연로한 아버지(조지 5세)는 버티에게 그런다. “옛날엔 말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되었지만 요즘 왕은 집집에 비위를 맞춰야하고 홍보도 해야해. 배우가 다 된거지.....” 왕실도 고민이고 버티도 상심한다. 특히 아내도. 그래서 용하다는 언어치료사(교정사), 심리학자는 다 만나보고 새로운 진료법은 다 시도해보지만 효과가 없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만나게 된 구세주가 바로 저 멀리 호주에서 온 라이오넬 로그라는 사람이다. 세익스피어극 배우였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고 런던 교외에서 연극적 요소를 가미한 방식으로 말더듬이 교정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버티’를 만나자마자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미래의 영국 국왕’의 ‘치명적 언어장애’를 치료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언어치료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둘 사이는 특별한 사이가 된다. 의사와 환자, 왕과 신하, 그리고 영국인과 호주인. 확실한 것은 그들은 영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친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역사의 재미, 영국영화의 재미

미국 아카데미의 역사에 있어 영국의 왕실이야기를 포함한 역사물은 꽤 인기 있는 아이템이었다. 오래 전 8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바운티호의 반란>(1935)(☞박재환리뷰보기)란 작품도 영국의 해군의 해상반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었던 작품이다. <레베카>(41)(☞박재환리뷰보기)는 귀족 이야기를 엿볼 수 있었고 <햄릿>(48)(☞박재환리뷰보기)은 덴마크왕실을 이야기를 다룬 세익스피어의 명작이다. 물론 <셰익스피어 인 러브>(98)(☞박재환리뷰보기)라는 기막힌 판타지사극도 있다. 영국사에 관심 있다면 <사계절의 사나이>(67)(☞박재환리뷰보기)와 <브레이브 하트>(98)(☞박재환리뷰보기)의 역사적 배경이 흥미로울 것이고 영국문학사를 전공했다면 헨리 피딩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톰 존스>(64)까지 챙겨볼지 모른다. 앗, 그러고 보니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98)(☞박재환리뷰보기)는 웨일즈 탄광촌 이야기이고, <불의 전차>(80)(☞박재환리뷰보기)는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캠브리지 육상선수 이야기이며 <타이타닉>(☞박재환리뷰보기)은 영국 배구나. 이런 너무많다. <콰이강의 다리>, <올리버!> 등등 너무 많다. 아카데미에서의 영국영화의 비중을 알 수 있다.

 윌리엄 텔이나 로빈 후드, 원탁의 기사 영국 역사에서 튀어나온 인물을 다룬 영국영화는 은근히 재밌다. 그런데 20세기 대중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서 영국왕실은 타블로이드 (찌라시!)의 집중적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 대표적인 타켓은 다이애나 황태자비였고 말이다. 물론 조지 6세 시절엔 왕실에 대한 경건함, 충성심, 존경심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히틀러가 광분하고 있을 때 영국 국민을 아우르는 통합의 존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한때는 50여 개국 이상의 식민지주의 국민들도 공동의 일체감을 형성할 정도였고 그 최상위에는 영국왕실이 존재했었다. 근현대적 의미의 국가체제의 책임자로서 수상과 내각이 있었음에도 백성들은 저들의 왕의 존재를 통해 권위와 복종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히틀러의 열정적 연설과 비교했을 때 조지 6세의 연설 능력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영화관객을 사로잡을 매력을 다면적으로 갖춘 맞춤형 - 아카데미기획 - 영화인 것이다. 영국왕실 이야기, 장애인의 인간승리, 계급/신분의 벽을 넘은 우정, 왕관도 내팽개친 로맨스(형 에드워드), 그리고 전쟁광 히틀러에 대항하기 위한 가슴을 울리는 명연설까지! 대놓고 호주 출신에 대한 멸시와 학벌에 대한 자긍심등도 등장한다. 영국영화는 아기자기한 유머감각을 보여주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조지 6세는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음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유머와 위트를 영화 곳곳에 장식한다. 영화 마지막 무렵 멋지게 라디오연설을 끝마친 뒤 우쭐하여 스튜디오를 나오자 라이오넬이 그런다. “폐하,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복모음 발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하자 왕의 대답은 “그래야 백성들이 내가 누군지 알잖아..”

조지 6세 연기를 한 콜린 퍼스의 연기력은 워낙 격찬을 받았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받았으니 더 이상 여기에서 소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의 아내, 즉 대영제국의 왕비 역을 맡은 헬레나 본햄 카터도 오랜만에 유럽 상위계층의 우아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 옛날 가보처럼 여겼을 영국왕실의 우아함과 오늘날 로얄 패밀리가 가졌을 ‘반쯤은 서민적인’ 친근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남편(말더듬이왕 죠지 6세)이 1952년 숨을 거두자 딸이 대영제국의 여왕이 된다. 지금의 엘리자베스 2세인 것이다. 영화에서는 귀여운 두 딸 엘리자베스와 마가렛이 등장한다.

유튜브에 가보면 조지 6세의 괜찮은 연설 영상을 몇 개 찾아볼 수 있다. 라이오넬 로그의 도움으로 엄청난 노력 끝에 교정을 본 연설솜씨란다. (교정받기 전의 한 인간의 고뇌를 느낄 영상은 없다.)

말더듬이라는 특별한 캐릭터를 연기한 콜린 퍼스의 연기공력은 대단하다. 이 영화 각본을 쓴 데이빗 세이들러도 어린 시절 심한 말더듬이였단다. 자신의 이야기를 밑천삼아 영국왕실의 흥미로운 (공개된) 비밀을 21세기적 영화기술로 재미나게 재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조지 6세가 말더듬이였던 이유가 조금 나타난다. 그는 위염을 앓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위염을 앓은 이유도 불운한 성장과정에서 기인한다. 형만을 편애하는 유모, 안짱다리-왼손잡이였기에 받아야했던 우울한 기억들이 그를 말더듬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피나는 발성연습과 언어습관 치료를 받았지만 영화 내내 담배를 피운다. 초조함과 강박관념이었으리라. 그가 1952년 아내와 사랑스런 두 딸, 그리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백성(국민)을 남기고 죽은 이유는 뭘까. 폐암이란다. 참 안 됐다.

요즘도 매주 공영방송 KBS라디오와 인터넷을 통해 대통령의 국정연설이 진행된다. 이는 1930년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하자며 했다는 노변정담식 라디오 프로그램과 상통한다. 청와대는 국민과의 소통을 내세웠지만 요즘 같은 메시지/뉴스 과다유통 사회에서는 형식이 아니라 그 진정성이 더 소중해진다. 히틀러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둔 영국 국민을 단합시킨 조지 6세처럼, 지진후폭풍과 처절하게 맞서 싸우는 일본인의 단합을 요청한 아키히토 일본국왕의 경우와 비교하여 우리 국민은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위정자들도 이번 주 개봉하는 <킹스 스피치>를 한번쯤은 봐야할 듯하다. (박재환, 201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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