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페이드] 알 수 없는 삶

2008. 4. 5. 21:40홍콩영화리뷰

반응형

012

[Reviewed by 박재환 2001-9-10]  한때 젊은 영화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홍콩 영화는 다분히 '왕가위'적 스타일의 영화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두가풍(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와 장숙평의 미술(의상과 세트 포함)이 결합한 흔들리는 화면, 건너뛰는 편집이 만들어낸 알맹이가 그다지 없는 드라마 양식이다. '남과 여'의 러브 스토리를 다루면서 한없이 무거운 인생을 한없이 가벼운 멋에 실어 나르는 방식이다. 그러한 왕가위 스타일의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졌지만 청출어람이라고할 작품을 아직 만나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왕정' 스타일까지 침투하여 곧잘 관객을 찾았다. 물론, 이들 영화가 영화 미학적인 관점에서 논란이 있긴 하지만 MTV적 감수성을 가진 세대에게는 볼만한 것들이었다.

 진휘 (陳輝 데이비드 챈) 감독의 <슬로우 페이드>도 이러한 왕가위적 스타일의 영화이다. 내용은 암흑가의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불의의 사고로 잃고 마약에 빠져 살다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어 갱생의 길을 가러 하지만, 또다시 악의 손길이 다가오고 그의 새로운 연인을 위험에 몰아넣고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낯익은 홍콩의 밤 풍경과 속도감 있는 자동차의 질주 씬을 예의 현란한 카메라로 보여준다. 그리고는 몽롱한 화면으로 빠져들고 만다. 남자 주인공은 마약을 과다 복용하고 병원으로 실려온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자신의 과거가 어떠한지를 밝히지 않는다. 그는 병원에서 '장시락'으로 불리게되고, 그와 같은 병실에 있던 아킴이 그에게 관심을 갖는다. 장시락이 조금씩 떠올리는 자신의 과거는 '아핀(阿Fin)'이라는 암흑가의 해결사였다. 그는 돈을 쉽게 벌 수 있게 해주겠다는 친구 알렉스에 이끌려 흑사회 조직원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돈 때문에 너무 쉽게 살인을 저지르는 알렉스에 환멸을 느낀 그는 조직을 이탈하러 하지만 보스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핀에게는 갓 결혼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날 밤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실의에 빠진 아핀은 마약에 빠져들고 급기야는 죽기 일보 직전에 병원으로 실려온 것이다. 그는 병원에서 부터 호의를 보인 아킴에게 빠져들지만 그녀를 위해 또다시 암흑가로 몰리게 되고, 그의 기구한 운명은 그와 아킴, 그리고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장시락(아핀)역을 맡은 왕합의(王合喜 Ken Wong)란 배우는 <신투차세대>, <신투첩영>, <벽혈남천> 등에 나왔던 배우이다. 왠지 분위기 있다. 망가질대로 망가진 그에게 연정을 느끼는 아킴은 하초의(何超儀 Josie Ho)라는 배우가 연기한다. <친니친니>와 <퍼플 스톰> 등에 나왔던 배우이다. 사실 이들 두 배우는 주연급 배우나 연기파는 아니다. 하지만 감독은 이들을 적절히 기용하여, 연기보다는 이미지와 스타일로 저예산 영화의 미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류의 홍콩영화에서는 조연이 곧잘 돋보인다.

영화에서 장시락을 죽이고 살리고, 살리고 죽이는 알렉스는 황가락(黃嘉諾)이 맡았고, 갱생의 길을 가는 장시락에게 또다시 마약거래를 맡기는 보스 역은 장요양(張耀揚 )이 맡았다. 둘다 홍콩영화의 낯익은 조역들.

이 작품은 진휘 감독의 데뷔작이다. 친구인 카일 데이비슨과 함께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 프리 셀(사전판매)방식으로 제작비를 조달했다. 물론, 이 방식은 무척이나 고생스러웠다고 한다. 제작비 조달이 더디어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200만 홍콩달러(3억원)라는 저예산으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고, 러프 컷을 본 베를린 영화제 관계자에 의해 곧바로 베를영화제에 소개될 수 있었다. 진휘 감독은 캐나다에서 영화공부를 한 후, 홍콩으로 건너와서 미술감독, 편집 등을 하였고 단역 출연도 가끔은 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제작비로 따지자면 진짜 '싸구려' 홍콩영화이며, 미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왕가위'의 겉멋만 잔뜩 수혈받은 작품이지만 꽤 볼만한 영화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어딘가에 중독된 젊은이의 고뇌와 죽음 앞에 다다른 절망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졸작이라지만 내게는 멋졌던 그런 영화 중의 하나이다.  (박재환 2001/9/10)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