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스틸] 진짜 철권의 로봇 파이터

2011. 10. 5. 11:08미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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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복싱은 마라톤과 함께 헝그리 스포츠의 대표종목이었다. 가난한 시절 몸뚱이 하나로 처절하게 두들겨 맞으며 부와 명예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시청자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펀치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있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의 숨겨진 야성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 헝그리 복서 김득구가 미국 라스베가스의 호화로운 호텔 특설 링에서 합법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결국 유명을 달리한 것도 야만적 스포츠 게임의 결과였다. 이후 복싱은 올림픽 퇴출론이 줄기차게 나올 만큼 위험종목이 되었고 더불어 헤드기어 착용과 함께 너무나 세심한 아마 경기의 룰은 복싱 자체를 싱거운 게임으로 만들어갔다. 대신 희한한 볼거리의 프로레슬링과 듣도 보도 못한 육체의 부대낌이 예술로 승화한 이종격투기가 링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미디어에 의한 쇼는 계속되고 말이다. 10년 뒤의 링은 어떻게 변할까. 이종격투기의 진화는 어디까지 갈까. 킹콩과 맞대결을 하는 원시시대로의 귀환일까 아니면 한쪽이 죽을 때까지 폭력을 가하는 스파르타쿠스의 재림이 될까. 영화 <리얼 스틸>은 2020년의 모습을 그린다. 물론, 이 영화는 격투기 영화가 아니다!

전직 복서, 로봇 파이터, 그리고 키드



2020년의 세상은 지금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아버지 어머니는 이혼하고 혼자된 아이는 게임기에 매달려 사이버 세상에서 위안을 얻을 것이며, 세상은 격투기 시합에 빠져들어 무모하게 큰돈을 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사람과 사람의 주먹다툼은 위험한 것이 되어 금지된다. 아니면 너무나 재미없어서 더욱 익사이팅하고 파괴적인 게임으로 대체된다. 900킬로그램, 2미터 50센티가 넘는 거대한 로봇 파이터들이 링에 올라 사람을 대신하여 치고받고 한쪽이 고철쓰레기가 될 때까지 로봇팔을 휘두르게 된다. 찰리 켄튼(휴 잭맨)은 전직 복성. 그러나 한 번도 챔피언 타이틀을 안아보지 못한 불운의 루저이다. 그는 이제 고물 로봇 파이터를 데리고 다니며 언더 그라운드의 파이터 게임을 전전한다. 하지만 그의 로봇은 고성능도 아니며 본인도 스마트한 로봇 조종사(혹은 프로모터)도 아니다. 언제나 그의 로봇은 박살이 나고 좀 더 나은 로봇을 구해 크게 한방 터뜨리길 기대할 뿐이다. 그런데 그에게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온 아들 맥스(다코다 고요)가 찾아온다. 엄마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친권자가 된 것이다. 아이에게는 애당초 관심도 없던 찰리는 입양권을 포기하는 대신 거액을 받기로 한다. 그 돈으로 더 나은 로봇 파이터를 구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첫 게임에서 돈도 로봇도 다 날리고 만다. 둘은 정말 고철 쓰레기더미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맥스는 절망적 상황에서 내다버린 로봇 ‘아톰’을 만나게 되고 ‘아버지와 아들’은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

강철도시의 아이언맨

영화 <리얼 스틸>은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원작은 SF작가 리처드 매드슨의 <스틸>이다. 리처드 매디슨의 대표작품 중에는 <나는 전설이다>가 있다. <리얼 스틸>은 얼핏 보아도 차가운 기계덩어리와 연약한 사람의 육신이 부대끼면서 나오는 부조화와 그 속에서 파생되는 끔찍한 현대인의 고독 등이 느껴진다. 게다가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조합이 내보이는 인간적인 유대감도 작용한다. 관객들은 커다란 아레나의 어느 좌석에 앉아있는가에 따라 볼 수 있는 게임의 규모가 다르듯이 다양한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지금이나 (영화 속) 2020년이나 로봇은 인간의 위험한 일을 대신하는 감정이 배제된 기계일 뿐이다. 그러나 수많은 영화에서 인간의 감정을 가진 (혹은 가지고 싶어 하는) 로봇의 진화된 프로그래밍 때문에 많은 비극과 드라마가 있어왔다. 하다못해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 1편의 마지막 장면, 공장의 압축기에 깔려 죽어가는 ‘터미네이터’의 붉은 눈빛이 마지막 깜빡일 때에도 섬뜩한 로봇의 인간적인 최후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로봇에게 히터를 장착한다고 해서 붉은 액체를 주입한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시각인식장치가 위치한 눈동자 부위에 녹색의 동공을 장착하면, 그래서 고개를 약간 기울이기만 해도 관객은 새로운 감정을 가진 ‘인간적 로봇’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톰’이 그러하다. 아톰이 어느 정도 동작인식 센서가 갖춰졌고 얼마나 고도화된 학습능력을 가졌는지 몰라도 인간의 세상에서 버림받거나 추락한 존재들에게는 따듯한 유대감을 안겨주는 주체로 작동한다.

위험한 스포츠, 잔인한 구경거리

<스파르타쿠스>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는 오래 전부터 잔인한 게임에 몰두해왔다. 그것은 자신의 육신이 이룰 수 없는 영역에서의 ‘대결’과 그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사람이 치고받는 게임에선 인간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사회가 진화하고 인간성이 만개할수록 그 애정의 대상은 확대된다. 투우의 소도, 투계의 닭도 보호대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적어도 2020년까진 로봇의 권리는 무시되는 듯하다. 지금도 로봇 대결은 많다. 체스대결같이 지능게임이 될 수도 있다. 이미 로봇카 대결은 은근히 인기 있는 종목이 되었다. 지금과 같은 기계발달, 소프트웨어의 진화, 기계소재산업의 발전으로 보자면 그때가 되면 슈가레이 레너드보다 빠르고 타이슨보다 천배 만 배는 위력적인 펀치를 가진 로봇이 링을 지배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리얼 스틸>의 복싱 장면은 기존의 복싱 장면의 명장면을 리플레이한다. 한쪽이 지치도록 얻어맞다가 한방의 훅으로 승리를 얻는다거나 경기 내내 맹렬하게 치고받는 난타전을 보여준다. 인간의 복싱과 다른 점이 있다면 로봇 팔이 떨어져나가거나 발이 꺾이고 뇌신경이 ‘절단’나도 구경꾼의 만족감을 얻을 때까지 최후의 일격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굉장히 잔인한 격투장면을 담은 스포츠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미국에선 PG-13을 받았다. 사람(선수)을 저렇게 패는 모습을 담다니... 그 느낌은 곽경택 감독의 <친구>에서의 “마이 무따아이가...” 레벨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숀 레비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감독이다. 게다가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에 나섰다. 어찌 가족영화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록키>의 파이팅과 <챔프>의 부성애를 <트랜스포머>에 녹여넣은 것이다. 스필버그는 이미 <A.I.>에서 인간의 마음을 담은 비(非)인간적인 존재를 다루었다. 그 영화에서도 쓸쓸하게 꺼져가는 로봇의 눈은 관객의 마음을 휑하게 했었다. 이 영화는 격렬한 파이팅 장면을 거듭 보여주면서도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유대감을 보여준다. 한때 루저였던, 그리고 여전히 루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는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책임감을 가진 아버지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시각적 성과에 비해 철학적 의미의 걸작 반열에는 오를 수 없을 것이다. 로봇은 소년과 유대를 이어가지 못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피상적이다. 무엇보다 게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정이 인간적이지 못하다. 엄청나게 근사한 링에서 펼쳐지는 게임은 전형적인 라스베이거스의 미디어 쇼라서 기대했던 초코파이적 정은 가지 않는다. 특히 후반부는 말이다. 10월 12일 개봉. (박재환, 20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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