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후드] 왕, 봉건영주, 전쟁, 그리고, 화살꾼

2010. 5. 13. 19:07미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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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 감독이라 하면 <에일리언>(1편)과 <블레이드 러너>의 명감독으로 영화팬들의 ‘흠모’를 받고 있는 영국 감독이다. 그가 러셀 크로우를 캐스팅하여 만든 <글래디에이터>는 아카데미상을 휩쓸고 엄청난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에픽 드라마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할리우드가 자랑하는 하이테크 촬영기법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스펙터클한 영상, 그리고 아날로그적 감성까지. 특히 남성의 세계를 그 누구보다도 멋지고, 폼 나고, 피 끓게 만들어내었다는 평가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날의 <스파르타쿠스>(큐브릭 영화 말고, 요즘 하는 미드)가 가능했으리라. 그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 후 러셀 크로우와 몇 번 더 작품을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작품 <로빈 후드>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인지는 몰라도 의적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로빈 후드가 두 마쵸 맨들에 의해 어떻게 부활했을지 궁금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콧대 높기도 소문난 프랑스의 ‘깐느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상영되었다니 말이다. 어찌 영화팬으로서 기대가 되지 않으리오.

로빈 후드, 숲으로 들어가기 전

영화는 프랑스에서 시작된다. 때는 1199년. 당시 영국을 호령하고, 프랑스 일대까지 장악했던 리처드 왕이 공성전을 펼치고 있다. 그의 닉네임은 ‘사자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군 전쟁에 나섰다. 예루살렘을 이교도에서 지키기 위해 10년을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용맹을 과시했다. 그가 이제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프랑스 땅을 지난다. 프랑스 군대와 전투를 치른다. 러셀 크로우는? 러셀은 리처드 왕을 따라 종군한 ‘궁수’ ‘로빈 롱스트라이드’이다. 이 시절을 다룬 영화의 주인공은 보통 말 위에서 기다란 창을 들고 마주보며 용기를 겨루든지 무거운 칼을 들고 싸우던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기사 뒤를 따라다니며 전투에서 ‘소모되던’ 궁수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모양이다. 여하튼 로빈 롱스트라이드는 아주 훌륭한 활솜씨를 보여준다. 어느 날 리처드 왕이 한낱 미천한 로빈에게 “자네는 십자군 원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문한다. 용기 있는 자라는 칭찬에 한껏 고무된 로빈은 “쓸데없는 미친 짓입니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고, 왕은 “용감하고, 솔직하고, 게다가 순진하군.”이라며 묶어버린다. 그 날 리처드 왕은 마지막 전투에서 활에 맞아 죽는다. 이제 남은 일은 그의 왕관을 왕위 후계자 - 영국 런던에 있는 못난 동생 존에게 전달하는 일만 남았다. 예상할 수 있듯이 로빈과, 로빈처럼 전쟁에는 끌려왔지만 애국심이나, 명예욕, 기사도 같은 고담준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그 왕관을 손에 넣게 되고,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로빈 후드, 전쟁에서 돌아온 후

로빈 후드라 하면 윌리엄 텔처럼 활을 잘 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실존 인물일까. 리들리 스콧은 이 영화 개봉을 앞두고 수많은 매체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으리라. 그의 답변은 미리 준비된 듯 잘 다듬어졌다. “12세기에서 13세기에 영국의 상황에선 서슬 퍼런, 위정자의 징세에 맞서 굶어죽을 운명에 놓인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가서 의적이 된 경우는 많다. 그러니, 로빈 후드가 되었든, 로빈 롱스트라이드가 되었든 그런 인물은 많았을 것이다.”고.  그런데, 이 영화는 기이하게도 우리나라의 홍길동처럼 ‘호부호형’ 못할 아버지는 아니지만, 꽤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다는 사실을 설정으로 내걸고 있다. 바로, 영국 왕권에 대항하여 ‘대헌장’(Magna Carta)을 주도한 인물로 그려진다. 영국 역사에서 마그나 카르타가 차지하는 위치는 엄청나다. 왕권과 신권, 그리고 봉건영주의 위태위태한 힘겨루기 과정에서 이루어진 이 문서는 이후 전개될 영국식 민주주의의 발전에서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류사의 큰 터닝 포인트였다.

로빈 후드, 숲에서 해안으로

사자왕 리처드의 왕관을 들고 런던에 입성한 이후, 영화는 주로 새로 왕위에 오른 존 왕의 가렴주구 행태와, 이에 맞서는 귀족(영주)의 연합항쟁 움직임을 다룬다. 그리고, 짬짬이 로맨틱 가이 ‘로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써 마리언과의 로맨스를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천하의 명궁, 로빈 롱스트라이드가 언제 활을 들고 부자들을 약탈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지는 알 수가 없다. 대신, 영불해협을 건너 영국 해안에 도착한 엄청난 수의 프랑스 전사들의 모습을 마치 ‘오마하 해변식’ 전투장면으로 후반부를 장식한다. 이 해변장면에서의 전투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영락없는 <라이언 일병구하기>이다. 상륙함(LCM) 해치가 열리면 내려서는 미군들을 기다리는 것은 독일군의 퍼붓는 기관총 세례. 바닷물 속으로 떨어지고, 물속에서조차 슝~슝~ 날아오는 총알에 피가 물보라같이 장식되던 그 지옥의 이미지가  이 중세영화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프랑스 전사들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에서는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장예모의 <영웅>에서 처음 만화적으로 그려졌고, 우리 영화 <신기전>에서도 시도되었다.)

깐느가 선택한 ‘영웅’ 로빈 후드

 깐느국제영화제는 예술적 성취가 높은 유럽영화가 주로 상영되는 ‘수준 높은’ 영화제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다가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까지 아시아 영화가 변방에서부터 점점 주목을 받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할리우드 영화가 슬금슬금 깐느 해변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올해에는 <로빈 후드>가 그 역할을 맡았다. 프랑스 기사들을 피로 물들이는 영국전사 로빈 후드를 다룬 미국영화라니. 프랑스 사람들 찜찜할만한 영화이다. 영화가 이 모양이니 프랑스사람들은 다행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오락 너머, 역사적 의미

영화가 시작되며 오른 자막에는 “............사회가 혼란스럽고 독재가 횡행하면 무법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13세기 절대 왕조시대의 영국 왕이 백성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뜯어내고, 나락에 떨어진 그들 무리에서 로빈 후드 같은 무법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선 양산박으로 올라간 108명의 산적들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홍길동이 있었다. 영국의 노팅엄 셔우드 숲에는 로빈 후드가 활을 들고 설쳤던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독재 권력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탈법적이고, 죽음을 불사하는 항쟁방식’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의로운 정치영화냐고? 농담하슈? 변태 로마인들의 한낱 유흥거리를 위해 비참하게 죽어가던 검투사(글래디에이터)를 현대판 볼거리로 만들어내었던 리들리 스콧이 만든 영화인데 말이오. 그나저나 교훈은 있다. 국민을 쥐어짜면 활과 화살이 잘 팔린다는 것이다. 없으면 초라도. (박재환 20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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