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복서] 병구 리턴 (정혁기 감독 My punch-drunk boxer, 2019)

2019. 10. 14. 12:54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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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주말 낮이면 TV에선 항상 프로 복싱을 중계해주던 때가 있었다.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두 남자가 사각의 링에서 원초적 혈투를 펼치는 이 리얼 스포츠 드라마는 꽤 인기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엔 두 가지가 남아 있다. 시합이 끝나고 클로징 멘트를 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 옆으로 애 어른 할 것 없이 달라붙어 카메라에 얼굴 내보이려고 애쓰는 모습과, 시합 시작할 때 나오는 다이내믹한 음악, BGM. 찾아보니, 프랑스 군가 ‘Sambre et Meuse’와 영화 록키의 테마뮤직 ‘Gonna Fly Now’ 등이 사용되었다. 홍수환, 유재두, 염동균, 박종팔, 장정구, 유명우 등등 기라성 같은 챔피언들이 전설로 남은 가운데, 요즘 누가 복싱을 하나. 충무로에서 한다. 그 서글픈 스포츠를, 대결을.

 

2014년 서독제(서울독립영화제)와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소개된 작품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은 정혁기-조현철이 감독한 단편 뎀프시롤 참회록이란 작품이다. ‘펀치드렁크에 시달리는 복서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판소리 스탭을 익히고 다시 링에 오른다는 내용이다. 얼핏 봐도 상태가 나빠, 권투를 다시 해선 안 될 사람으로 보이는 주인공은 조현철이, 장구로 판소리 가락을 넣어주는 인물로 구교환이 연기한다. 조현철에게 다시 한 번 힘을 불어넣는 인물로 이민지가 출연했다. 단편 뎀프시롤 참회록은 정혁기와 조현철이 함께 각본을 쓰고, 공동연출로 완성시켰다. 이 인상적인 단편에 살을 더 붙여 장편으로 만들어졌다. 배우도 바뀐다. 지난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고 지난 주 개봉된 영화 <판소리 복서>이다. ‘가족 치매력 펀치드렁크상태에 놓인 복서는 엄태구가, 엄태구가 다니는 체육관 관장은 김희원이, 그 체육관에 권투를 배우겠다고 온 소녀 민지 역은 이혜리가 맡았다. 엄태구에게 판소리 장단을 일러주는 전 여친은 이설이 연기한다.

 

단편의 제목으로 쓰인 뎀프시롤 1920년대 미국의 전설적 프로 복서 잭 뎀시’(‘뎀프시가 아니라)의 권투 스타일을 말한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 그다지 특이한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의 권투망가 더 화이팅에서 뎀프시롤은 변칙복서의 상징으로 쓰인다. 영화에서 병구는 우리나라 판소리 장단에 맞춰 새로운, 기이한, 특별한, 황당한, 하지만 그럴듯한 스탭을 창조해낸다. 흐느적흐느적, 비틀비틀 거리다가, 새처럼 날다 벌처럼 주먹을 날리게 된다.

 

영화는 어두운 과거를 가진 비운의 복서가 주위 사람이 도움으로 다시 한 번 링 위에 올라 불꽃 펀치를 날릴 것 같지만, 뜻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병구는 오래 전, 금지약물 복용으로 선수자격을 박탈당하고, 체육관마저 파리만 날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병구가 관장에게 다시 권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눌하게, 느릿느릿하게, 바보처럼.

 

시대는 변하고 있다고 한다. 민지는 체육관에 걸린 오래된 병구의 사진을 보고, “이거 필름 카메라로 찍은 거에요?”란다. 재개발 들어가야 할만큼 퇴락한 체육관의 아날로그TV는 고장 났고, 세탁기는 헛돈다. 고장 난 텔레비전을 고집스레 고치려는 병구가 소리친다. “고장났다고 다 버리면 어떡하냐. 자신의 망가진 육체에 정신마저 어둠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동안 영화팬과 TV시청자에게 각인된 엄태구는 억세고, 강인하다. 그런데 감독이 뽑아낸 엄태구의 얼굴은 때로는 원빈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병구의 상태를 말할 때는, 특히 민지 앞에서의 행동거지는 남성성이 거세된 수준이다. 휘청거리는 그의 상태를 말한다.

 

체육관장 김희원은 언제나 성경을 들고 있다. 체육관이 사라지면 신학을 공부할 것이란다. 죽음을 희롱하고, 그 죽음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간증하는 듯하다.

 

성룡이 술을 마시며 '취권'을 창조했듯이, 병구는 판소리 자진모리와 휘모리장단에 복싱의 필살기를 개발한다. 단편에서도, 장편에서도 감독은 사라져가는 시대의 아이콘을 사라져가는 가락에 애타게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병구는, 관장은, 고장 난 TV는 사라지거나 살아남거나 달라진 모습으로 한쪽 벽에 붙어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유기견의 운명처럼. 고유문화의 전승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는 주성치가 소림축구 마지막에 보여준 것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판소리복서는 변해버린 한국에선 현실화되지 못할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더 애잔한 이야기이다. 10 9일 개봉 감독:정혁기 출연: 엄태구,혜리,김희원,최준영,이설,최덕문 (박재환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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