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박재환이 1998/11/16에 쓴 글입니다. 10년이나 지났기에 그냥 올려봅니다]

  줄거리  애마는 남편 현우와 이혼한 뒤에도 그를 잊지 못하여 그녀에게 구혼하는 청년 사업가 재하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애마가 배안에서 잠시 만났던 상현은 전남편의 후배인데 그가 하는 일은 제주도 일대의 나비를 채집하는 일이다. 제주에서 만난 현우는 애마에게 다시 결합할 것을 요청하지만 애마는 이를 거절한다. 현우에게는 동거하는 여인이 있다. 외로운 애마는 새벽에 안장없는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린다. 상현과 만난 애마는 그와 외로움을 달랜다. 재하와 상현의 프로포즈를 거부하며 결혼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 애마는 독립을 선언한다.
 
  친구 중에 **라는 아이가 있다. 그 애가 어느 주말 밤 전화로 불러내 술 마시느라 케이블 TV에서 방영한 <애마부인> 1편을 놓친 일이 있었다. 다행히 어제 <애마부인2> 방영할 때에는 **가 전화를 하지 않아서 작품을 다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막상 감상문이라도 쓰려니 뭘 써야할지 막막하다. 솔직히 이 영화를 내 식으로 평한다는 것은 다른 시대, 다른 목적, 다른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을 <제멋대로> 분석하는 짓거리에 불과하니 주저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는 전편(애마부인1)의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고, '여성해방'이라는 거창한 주제의식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니, 사회학적 시각과 대중적 문화이해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하겠지만, 1998년 오늘날 그런 시각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그야말로 분노와 참을 수없는 모욕감만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가 비디오로 나왔는지는 모르겠다만, 솔직히 빌려보며 연구해 볼만한 가치는 있다. (나같이 정신나간 놈이라면...) 아니, 어쩜 상당히 볼만한 작품인지도 모른다. 어설프지만 있어야할 대사는 다 있고, 다루어야할 내용은 다 다루었으니 말이다.

  먼저, <애마부인>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전두환 정권 들어서고 3S정책 (스탠더드, 스태미너, 스마트-영화란 것은 표준이 있고, 힘이 있어야하며, 깔끔해야 한다는 것 - 음, 말도 안 된다!) 이 본격화 되며, 관객은 색다른 영화들을 하나씩 보게 된다. 그것은 화면에서 엄청나게 큰 젖가슴을 '냅다' 들이대는 여자배우와 교태로운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즘 보면 끔찍하기 그지없는 영화기법이지만, 80년대 사회민주화가 좌절되었는지 어쨌는지, 여하튼 영상혁명만은 성공했다. 이런 영화 이후, 십여 년을 이러한 끔찍한 여자배우 벗기기에 진절머리가 난 한국 영화팬들은 우리영화에 발길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말이다. 누구의 탓인가? 이런 영화를 양산해낸 영화인들이 욕을 들어야 하는가? 사회적 소재를 철저히 막아 선 정부당국(전두환을 욕해야 하는가 문공부 장관을 욕해야 하는가?) 탓인가. 아니면 우리 솔직히 "야, 그 여자 정말 슴가 크더라... 야. 잘 보면 보인다..그거..." 같은 전략에 말려들어 속으면서도 꾸준히 찾아가던 우리 영화팬 잘못인가? 내가 보기엔 적어도 그러한 수준과, 그러한 제도와 그러한 팬들이 서로 공존공생(추락의 길로)해온 10여 년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마, 우리나라가 여전히 70년대 경제수준만 유지했다면, 그래서 비디오 가진 사람이 전체 가구의 1% 이하만 되었더라도 우리 영화수준은 여전히 <애마부인>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영화팬은 여자 슴가 하나 쳐다보려, 여자 신음소리 들어보려극장에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인들은 이제 달라져야한다. 이제 남자 젖가슴을 보여주고, 남자 신음소리를 들려주어야 영화팬들이 발길을 다시 극장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

그럼, 애마부인이 도대체 어떤 수준의 어떤 영화였기에 이렇게 최근 15년 한국영화 추락의 오명을 뒤집어 써야 하는가.. 정인엽 감독이나 오수비가 듣고 소송이라도 걸어오면 어쩔려구... 그래서 미리 변명을 하자면, <애마부인>은 죄가 없다. 미국 영화의 발전이 광범위하게 발달한 포르노사업과 연관지을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이 영화를 그렇게 실망스럽게만 볼것은 아니다. 처음 말했듯이 있을 것 다 있고, 다룰 것 다 다루었으니 말이다.

이 영화가 앞으로 인용되고 찾아진다면 우선 무조건 여성해방의 과격성을 다룬 것 때문에 찾아질 것이다. 여자가 이제 나란히 밥상머리에 앉게된 것이 우리네식 여성해방이지만, 서구에서도 많은 고난의 길이 있었다. 고대 올림픽 경기장에 여자는 들어갈 수 없었고, 서구에서 여자에게까지 참정권이 주어진것은 금세기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들 아시다시피) 여전히 여자의 길은 전족찬 옛 중국 여자만큼 족쇄찬 신세이다. (설이나 추석때 가끔 나오는 사회적 분석은 왜 여자만 부침개 부쳐야 하나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여자의 (사회적) 해방"을 들고 나왔다. 이 영화에서 오수비가 얻고자 한 것은 여인의 정체성, 인간으로서의 여자, 인격체로서의 여자의 해방이다. "남자만이 여자를 고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도 남자를 고를 수 있다"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다룬 것이다. 음. 여성해방이란 것이 이런 원초적 관념이 아니란 것은 나도 알고, 여성학자도 알고, 관객도 안다. 물론 정인엽 감독도 알 것이고, 오수비도 잘 알 것이다. 이 영화는 쉽게 말해, 여성의 육체적 해방으로부터, 위대한 여성 인격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살짜기 지나간 것은 바로 여성동성애적 묘사이다. 우리나라 퀴어의 역사가 일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다른 이유-관객의 호기심 유발?-로 여성의 성적 기호도를 다룬다. 오수비가 혼자서 침대 위에서 괴로와 하는 장면- 도대체가 감독의 상상력의 빈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냥 바늘로 허벅지 지르며 "참아야 하느니라..."대사나 읊조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오수비가 기찻간에서 처음 만나는 김애경과의 사이는 일반적인 여성간의 우정을 뛰어넘는 특이한 관계로 묘사된다. 둘이 제주도로 가는 배안 선실에서 나누었던 대사는 꽤나 끈쩍끈쩍하다. 김애경이 옷을 벗으며 읊조리는 대사는 "...(나는) 벗어야 잠이 와요. 옷을 입으며 좁은 자루 안에 갇힌 느낌이 들어요. 한번 벗어봐요. 훨씬 기분이 좋아져요...." 우리나라 7-80년대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특유의 성우 목소리(김애경 목소리야 원래 끈쩍거리는 면이 있지만)를 염두에 둔다면 이 다이얼로그가 얼마나 관객의 닭살을 돋우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물론 더이상의 묘사는 없다. 나중에 제주도에서 재회할 때, 어느 섬인가로 가서, 한밤에 어떤 모임에서, 어떤 파티를 하게 된다. 쌍쌍파티-그리고, 대강대강 짝맞춰 뒹구는.... 정말 ...정말....문득 파졸리니의 영화가 떠오를만큼 실험적이다. 오수비는 김애경으로부터 여러가지를 배우는데 그것 중에 하나가 여자도 욕망을 가졌고, 남자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못된 것만 가르쳐줬군...)

오수비가 이혼한 것은 남편과의 性격차이다. 영화에서 오수비는 의사와 상담한다. 의사말인즉슨 "부부간에 만족을 못 얻는 것은 남자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요. 좀더 적극적인인.. 어쩌구 저쩌구.." 오수비는 이혼하고 나서도 다른 남자와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다가 "제주도"라는 (80년식 해방구!)낯선 곳으로 떠나다. 그곳에서 그는 이 남자, 저남자를 알게 되면서, 남자란 다 똑같은 존재란 것을 알고는..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많은 남자들 - '이혼한 남편'.. "난 아직도 애마를 사랑해. 우리 다시 결합하자", '또 한 남자 = 전 남편의 학교후배'... "전 애마씨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볼보 몰고 다니는 남자' (신일용인가?) 우리 결혼하는거야... - 하지만, 애마는 이러한 많은 남자와의 모든 성적 여정, 방황을 거치며 "사랑은 할 수 있지만 결혼은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오늘날 보자면 그것이 무슨 인생의 테마가 되는가도 싶지만, 그 당시엔 그런 이야기로 영화하나 만들어낼만큼 화젯거리였던 모양이다.)

 김애경이 하던 끈적한 소리 하나더... 오수비는 방황의 끝을 제주도 바다에서 찾는다. 그는 안 그래도 시스루인 의상에서 아예 벗어던지고 바닷물에 뛰어든다. 발가벗고 찬 바닷물에 열기를 식힌 그녀에게 타올을 걸쳐주는 김애경의 소리.. "여자는 숲과 같애. 숲이 무성하면 건강한거지. 그러면 힘센 야생동물도 많이 살지. 애마를 처음 봤을때 그런 느낌이 들었지..." 어떻게 이런 주옥 같은 대사를 써냈는지 시나리오 작가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

  이 영화에 나오는 오수비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려고 해도 특별히 할게 없다. 연기력을 요하는 것도, 미모를 요하는 것도, 몸매를 요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빈번한 클로즈업 (여자의 반쯤 열린 빠알간 루즈 입술)은 사람을 사실 짜증나게 한다. 그리고, 제목답게 말 타고 달리든지, 말에 달라붙어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든지 여하튼 '말'이 자주 나온다. 오수비가 말 타고 달릴 때 그 출렁거리는 큰 가슴을 보라. 도대체 관객 돈을 뺏어먹기 위해 영화인들이 짜낸 특수효과가 얼마나 눈물겨운지를.... (물론 여성팬들을 위해 신일용 샤위씬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남자 영화 배우들 상체는 모두 멋있다. 근육질이고.... --;)

 이 영화제목은 애마부인이다. 1편의 극장제목은 <愛麻부인>이었다. <愛馬->라고 못한 이유는 검열당국이 보기에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반려되어서였단다. 그래서 마약 상용의 부인으로 되어버렸다. 상당히 웃기는 일이지만. 그런대로 제목은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당시라면 <유럽에 엠마뉴엘이 있다면, 우리에겐 애마가 있다>식으로 신토불이 마케팅 전략을 펼칠만 하잖은가. 왜 '말'이 선정적인 의미로 다가올까.. 그것은 순전히 포르노그라피적 상상력의 극치이다. (이하. 100여자 자진 삭제....) 사람들의 기호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오수비는 말 타며, (왜, 말을 탈 때 기다란 장화 신고, 예쁜 모자에 유니폼 안 입고, 그딴 복장으로 젖가슴을 덜렁댔는지는 짜증난다. 모르지 당시엔 그런 화면과 그런 대사에 오르가즘을 느꼈을 관객이 있었는지도..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런 스토리에 그런 화면을 영화 팬은 찾지 않는다.(음 유호 아저씨가 들으면 화내시겠다) 이제 한국의 영화인들이여, 여자에게 옷을 입히고, 젖가슴이 크든, 그게 크든 변강쇠 컴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여자도 남자처럼 상대를 고를 수 있어.." 같은 여성해방이 아니라, 좀더 고차원의 철학적인 여자의 고뇌와 방황을 스크린에 담도록 노력하자. 그래야 나같은 한심한 놈이 영화감상문 쓸 때 보람을 느끼지. 이거 뭐야. 차라리 **랑 술이나 마시는게 낫지... 잉.

비디오자켓


애마부인2 (1984)
감독: 정인엽
원작: 이문웅
출연: 오수비,하재영,최윤석,신일용,방희, 김애경, 마도식
제작: 연방영화(최춘지)  서울개봉: 1984/2/11
서울흥행: 156,767명
촬영협조: 제주대학 김원택교수 고대곤충연구소

Posted by 박재환입니다. 박재환=중국通

Trackback Address :: http://www.kinocine.com/trackback/76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